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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성.예조참의 남곽공 박동열(朴東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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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서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6 11:35 조회2,1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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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성.예조참의 남곽공 박동열(朴東說)

박동열(朴東說)
시대 조선 생몰 년 1564-1622 (명종19-광해군14)
자 열지(說之) 호 남곽(南郭)/봉촌(鳳村)
사간 소(紹)의 손자로, 대사헌 응복(應福)의 아들이며, 동량(東亮)의 형이다.
다섯 살에 이미 글을 읽을 줄 알았고, 1585년(선조 18)진사가 되었으며
1594년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성균관전적이 제수 되었고, 이어 정언·병조좌랑·사서등 지냈다.
1601년 홍문관의 수찬·교리를 거쳐 이조정랑에 올랐으며, 그 해 가을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의주(義州)에 다녀왔다.
1603년 검상(檢詳)·사인(舍人)을 거쳐 사성(司成)·상례(相禮)·통례(通禮)를 역임하고, 뒤에 황주목사로 나가 부역(賦役)을 고르게 하고 민폐를 없애는 등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어사(御使)의 추천으로 표리(表裏)를 하사 받았다.
1606년 예조참의·동부승지 등을 지내고 우부승지에 올랐다.
그 뒤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형조참의가 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충주목사가 되고 이어서 대사성이 되었다.
이듬해 정인홍(鄭仁弘)이 이황(李滉)을 문묘에 배향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상소를 하자, 이에 분격한 유생들이 정인홍의 유적(儒籍)을 삭제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말을 듣고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유생들을 투옥시킬 때, 이를 말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진하여 나주목사로 나아갔다.
나주는 원래 다스리기 어려운 고장이었으나, 그는 유풍(儒風)으로 잘 다스렸다.
1613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 반대하다 동량과 함께 옥에 갇히게 되었으나, 마침 중풍으로 석방되었다.
시문(詩文)에 능하였고, 경사(經史)와 백가(百家) 및 국조의 고사에 두루 통하였다.
만년에 송추(松楸)에 폐거(廢居)할 때 이항복(李恒福)과 자주 내왕하였다.
저서에 《봉촌집》이 있다.


남곽공에 대한 추가자료
<조선왕조실록에 있는자료>
선조27 2/29 유생에게 정시(庭試)를 베풀어 박동열(朴東說) 등 15인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壯元)
선조27 5/14 정언 박동열(朴東說)
선조29 3/17 함경도 순안 어사(咸鏡道巡按御史) 박동열(朴東說)이 장계하기를,"남도(南道)의 걱정이 하루가 긴박한데,
선조29 6/25 박동열(朴東說)을【기국(器局)이 얕고 좁다.】 지중추부사로,
선조33 9/13 박동열(朴東說)을 홍문관 수찬으로
선조33 9/19 박동망(朴東望)을 사헌부 지평으로
                 박동열(朴東說)을 홍문관 부교리로 (박동망=박동렬의 아우)
선조33 11/19 비변사가 유장(儒將) 유공신(柳拱辰) 등 16인을 천거하였다.
                 [박동열(朴東說)·
선조33 12/24 왕세자가 겸사서(兼司書) 박동열(朴東說)을 보내어 문안하니,
선조34 2/29 박동열(朴東說)을 홍문관 교리로
선조34 3/16 홍문관이【교리 ·박동열(朴東說), .】
선조34 3/19 조강이 있었다. 상이 전에 수강한 것을 한 번 읽고, 시독관(侍讀官) 박동열(朴東說)‘상왈산하유 화(象曰山下有火)’에서부터 ‘수능능지호(誰能陵之乎)’까지 강하였다. 상이 새로 수강한 것을 한 번 읽고 나서 이르기를,"산하유화괘(山下有火卦)에 어찌하여 절옥(折獄)을 말하였는가?" 하니, 박동열이 아뢰기를,"비괘(賁卦)는 바로 과병(戈兵)의 상(象)으로 살벌(殺伐)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절옥을 말한 것입니다.
선조34 4/24 박엽(朴燁)을 사간원 정언으로, 박동열(朴東說)을 이조 좌랑으로,
선조43 8/11 박동열(朴東說)을 사헌부 지평으로, 삼았다.
선조34 8/20 강을 마치자 지평 박동열(朴東說)이 나아가 아뢰기를,
선조34 8/23 박동열(朴東說)을 홍문관 교리로
선조34 9/6 박동열(朴東說)을 이조 정랑으로
선조34 11/5 .여러 고을의 영위사(迎慰使)를 차출하였는데,
                 박동열(朴東說)을 원접사 종사관으로 삼았다.
선조35 3/17 박동열(朴東說)을 성균관 전적(典籍)으로,【범용(凡庸)하였다.】
선조35 4/1 박동열(朴東說)을 사예(司藝)로
선조35 4/20 지제교 성균관 사예 박동열(朴東說)이 지은 것이었다.
선조35 9/28 별문사 낭청(別問事郞廳) 박동열(朴東說) 에게 각 숙마 1필 씩에다 승서(陞여)하고
선조36 2/16 박동열(朴東說)을 의정부 사인으로
선조36 7/27 박동열(朴東說)을 황주 목사(黃州牧使)로 삼았다.
선조37 10/1 황해도 어사(黃海道御史) 오백령(吳百齡)이 서계하였다."(信川郡守) 박동망(朴東望)은 자신의 생활은 검소하게 하고 백성 사랑하기를 자상하게 하였습니다.(黃州牧使) 박동열(朴東說)은 마음을 다해 고을을 다스렸으므로 온갖 폐단이 모두일신 되었습니다.
선조37 10/1 박동열(朴東說)에게는 각기 표리(表裏)를 하사하라.
"선조39 3/7 황해도 암행 어사 윤효선(尹孝先)이 아뢰었다."황주 목사(黃州牧使) 박동열(朴東說)은 정치에 근실하고 부역이 평등하여 임기가 차서 떠날적에 백성들 이 더 유임하여 주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조39 8/25 박동열(朴東說)을 동부승지로,
선조40 7/19 박동열(朴東說)을【문예(文藝)로 진출하였다.】
선조40 9/24 박동도(朴東燾)를 마전 군수(麻田郡守)로,
                 박동열(朴東說)을 황해도 관찰사로,
광해0 8/13 박동열(朴東說)을 형조 참의
광해0/9/20 박동열(朴東說)을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광해3 2/19 박동열(朴東說)을 대사성으로
광해3 7/18 박동열(朴東說)을 예조 참의로
광해3 7/30 박동열(朴東說)을 나주 목사로
광해5 6/29 왕이 몸소 국문 하였다. 박동열의 원정을 받았다.
[나주 목사였는데 붙잡아 왔다.】그가 공초하기를,"신은 선 왕비의 외가붙이로서 집안 대대로 근신하여 지켜 왔으며 또 성질이 거칠고 게을러서 사람들과 사 귀며 놀지 않았는데, 이는 온 조정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입니다. 김제남과 같이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범연히 서로 알뿐이고 본디부터 절친하게 지내지 않았습니다."하고, 또 말하기를,"정미년 겨울 무렵에 유릉에 차마 말하지 못할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하였는데, 박동량의 공초와 대략 같았다. 또 말하기를,"김응벽을 처음에 나주에 가두어 두었을 때에 그가 술을 달라고 하였으나 주지 않았고, 그가 머물러 있기를 원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는데, 필시 이로 인해 혐의를 샀을 것입니다."하였다. 박동열을 붙잡아 왔을 때에 중풍에 걸렸는데, 대궐의 뜰에 끌고 나와 공초를 다 끝마치기도 전에 얼굴색이 변하고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상이 치료하라 명하고 이어 방면하라고 명하였다
.
<사마방목 에 진사시 합격한자료>
《박동열(朴東說) / 宣祖 18 式年 進士 》
【시험년도】선조(宣祖) 18 (1585) 식년(式年) 진사(進士)
【합격등위】 3등 0060
【본인성명】 박동열(朴東說)
【본인 자】 열지(說之)【본인생년】 갑자(甲子) 1564
【본인본관】 나주(羅州) 박(朴)
【본인거주】 경(京)
【본인문과】 갑오(甲午) 1594 정(庭) *
【본인전력】유학(幼學)부친성명.박응복(朴應福)부친관직 병조(兵曹)/참지(參知)

<조선조방목>박동열(朴東說) More Info.
선조(宣祖) 27년(1594년), 정시(庭試) 갑과1(甲科1) :갑과1 은 장원을 뜻함
생년(生年) 1564년, 갑자 자(字) 열지(說之) 호(號) 남곽(南郭)
본관(本貫) 반남(潘南)
부(父) 박응복(朴應福)
조부(祖父) 박소(朴紹)
증조부(曾祖父) 박조년(朴兆年)
외조부(外祖父) 임구령(林九齡)
처부(妻父) 신벌(申<벌0x6276>)
자(子) 박황(朴潢)
제(弟) 박동량(朴東亮)
손(孫) 박세모(朴世模)
소과(小科) 1585(을유) 진사시
전력(前歷) 진사(進士)
관직(官職) 대사성(大司成), 홍문관/리(弘文館/吏

14世 諱 박호(朴濠) (1586 - 1667)첨추공 응복-동열-호-세모-태장-필성
1625년(인조3) 위솔(衛率)
1626년(인조4) 남평부사,
1631년(인조9) 부여현감,
1636년(인조14) 종부시주부
1637년(인조15) 돈령판관
1638년(인조16) 영주군수(1638-1642),
1648년(인조26) 익산군수
1656년(효종7) 군자감정(軍資監正),
1661년(현종2) 제용정
1666년(현조6)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등을 역임했다.



14世 濠(호)3자2녀
자 伯游, 宣祖19년 丙戌(1586)生
光海1년(1609)進士 官歷 濟用監正 至 僉中樞府事
顯宗8年丁未(1667) 12월7일卒 壽82
贈 吏曹判書
○配 贈貞夫人平山申氏 父 領議政欽 祖 都事 贈領議政承緖 外祖 文兵使 贈領議政全義李濟臣, 宣祖20年丁亥 (1587)生 光海10년戊午(1618)卒 2子2女
○繼 贈貞夫人坡平尹氏 父獻民 祖福 外祖 生員寧越辛廷憲 宣祖32年壬寅(1602)生 孝宗8年丁酉(1657)卒 2子 1女
○墓在 楊州渼金面鳳頭山 巽(손)坐原三墳 有表石又有碣 藥泉南九萬撰 約齋 柳尙運 書 判書尹德駿篆 從姪世采撰誌 東陽尉申翊聖撰 申夫人誌, 庚申(1980)년 移奉于考墓局內 坤坐3合?(폄)表墓碣 移建

4세 호(호)3자2녀
자 백유, 선조19년 병술(1586)생
광해1년(1609)진사 관력 제용감정 지 첨중추부사 현종8연정미(1667) 12월7일졸 수82
증 이조판서
○배 증정부인평산신씨 부 영의정흠 조 도사 증영의정승서 외조 문병사 증영의정전의이제신, 선조20연정해 (1587)생 광해10년무오(1618)졸 2자2여
○계 증정부인파평윤씨 부헌민 조복 외조 생원영월신정헌 선조32연임인(1602)생 효종8연정유(1657)졸 2자 1여
○묘재 양주미김면봉두산 손(손)좌원삼분 유표석우유갈 약천남구만찬 약재 유상운 서 판서윤덕준전 종질세채찬지 동양위신익성찬 신부인지, 경신(1980)년 이봉우고묘국내 곤좌3합?(폄)표묘갈 이건

1)첨추공 호(僉樞公 濠)
임오보(壬午譜),1642년에 처음 족보를 발간할 적에 육우당 회 무(六友堂 檜茂)와 실무담당, 상촌 신흠(象村 申欽)사위.


운중반월의 명당 (雲中 半月의 明堂)
반남 우리 도선 산에 호장공의 산소를 풍수지리 학적으로 양유도수의 명당 (楊柳倒水의 明堂)이라고 한다.
풍수학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어떠한 연유에서 양유도수의 명당이라고 하였는지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없어 명색 풍수 지리학을 전공한 학자에게 질의하여도 납득할 만한 설명을 못한다.
차라리 속칭 "벌 명당" 이라고 하면은 이 유래는 나도 설명을 할 수 있다.
반남박씨 성지(聖地)하면 세거지(世居地)는 현 시점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 이는 각기 생활 연고지가 도시 집중으로 되어 인구 통계상 수도권(서울, 경기도, 인천)에 55%의 종원이 이거 하여 생활하고 있다.
따라서 성지(聖地)라 하면 자연 선대의 묘소를 기준으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반남, 문산, 하남시, 김포, 합천, 영주, 안동, 함양, 금산 등이 반남박씨의 성지이다.
전남에는 도선산 외에 남곽공 산소가 영암군 서호면 엄길리에 모시어져 있는데 이를 "운중반월의 명당"(雲中半月의 明堂)이라고 흔히들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13세조 남곽공 동열(南郭公 東說), 14세조 첨추공 호(僉樞公 濠), 남양공 정(南陽公 渟), 15세조 참판공 세모(參判公 世模)를 모신 곳이다.
반남박씨 종중에 신도비와 묘갈비등 많은 유적 보물이 있는데 합천 야천공 신도비(陜川 冶川公 神道碑)가 경남 유형문화재 제301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외에도 지방 문화재로 지정될 만한 우리 선대의 신도비 또는 묘갈비의 소재를 알리는 작업으로 본 글을 올립니다.
    위 글은 전 부도유사 박정서 글모음에서 펴옴


일차적으로 거론하여 사적 유물로 지정 대상된 곳은
1).인천시 대곡 서포공 동선 신도비(西浦公 東善 神道碑)
             금주공    정 신도비(錦洲公 炡 神道碑)

2).시흥시 군자 오창공 동양 신도비(梧窓公 東亮 神道碑)
             [시흥향토유적 제12호 지정]
             분서공    미 신도비(汾西公   神道碑)

3).영암군 서호 남곽공 동열 신도비(南郭公 東說 神道碑)
             첨추공 호 묘갈비(僉樞公 濠 墓碣碑)
             남양공 정 묘갈비(南陽公 渟 墓碣碑)
             참판공 세모 묘갈비(參判公 世模 墓碣碑)

박세모(朴世模)
효종(孝宗) 5년 (갑오, 1654년), 춘당대시(春塘臺試) 갑과1(甲科1)

인적사항
생년(生年) 경술1610(庚戌1610)
자(字) 여도(汝道)
본관(本貫) 반남(潘南)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가족사항
부(父) 박호(朴濠)
조부(祖父) 박동열(朴東說)
증조부(曾祖父) 박응복(朴應福)
외조부(外祖父) 신흠(申欽)
처부(妻父) 안두원(安斗元)


이력 및 기타사항
소과(小科) 1630(경오) 진사시
전력(前歷) 내시부교관(內侍府敎官)
관직(官職) 예조/참판(禮曹/參判) 갑장.


[1] 박세모(朴世模) [1610-1667(광해군2-현종8)]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여도(汝道). 첨지중추부사 호(濠)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흠(申欽)의 딸이다.
1630년(인조 8)진사시에 합격,
1645년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세마(洗馬)를 지냈다.
1654년(효종 5)춘당대정시에 갑과로 급제하여 전적·병조좌랑·정언·직강·지평·사예·부평부사(富平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1660년(현종 1)사간으로 있을 때,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기년제(朞年制)를 주장하여 채택하게 하였다.
이듬해 첨지중추부사에 이어 좌승지·도승지·내의원부제조·한성부우윤·동지의금부사를 거쳐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
1663년 호조참판으로 재직중 당시 판서인 정치화(鄭致和)는 그의 업무처리가 매우 상심(詳審)한 데에 크게 탄복하였다 한다.
그 뒤 도승지·예조참판·개성부유수를 역임하였다. 평소 도량이 넓고 검소하여 재산을 모으지 못하고 항상 빚을 얻어 생활하였다.
온건한 서인계열로 홍명하(洪命夏)·박장원(朴長遠)·이경휘(李慶徽)·서필원(徐必遠)·이상진(李尙眞) 등과 교유하였고, 특히 윤선거(尹宣擧)와는 우의가 두터웠다. 송준길(宋浚吉)은 그를 가리켜 재상(宰相)의 풍도(風度)가 있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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