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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천공후 신계종중 한국동란 수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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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우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1-02-26 21:14 조회5,658회 댓글0건

본문

肅川公三子 寅字輔字新溪小宗會 資料

(숙청공후 신계종중 한국동란 수난사)

제1화 부락의 형성

黃海道 新溪郡 麻西面 草灘里 始居 이곳은 말 그대로 산자수려(山紫秀麗)한 곳입니다. 황해도의 젖줄인 예성강(禮成江)이 흐르고 발원지는 수안군(遂安郡) 언진산에서 기원하여 인근 지역에서 흐르는 지류(支流)가 합수(合水)하야 곡창(穀倉) 황해도 연백군(延白郡)을 끝으로 황해 바다로 유입되고 있다.

우리 신계군 마서면 초탄리(푼여울)은 풀초(草) 여울탄(灘) 풀여울을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발음대로 부르는 푼여울의 유래(由來)임.

예성강 중상류에 위치한 우리 푼여울의 동네 지형은 동에서 서로 낮이막한 산밑을 배경으로 남향(南向) 일렬로 취락 부락이 된 곳이며 아래끝에서 위 끝까지 동네 길이는 약 2.5키로 동산 뒤쪽에서 서쪽으로 활자(弓)모양으로 다시 남쪽으로 흐르는 강물에 둘려 싸여 있는 전형적인 동네이고 재실(承有齎) 서쪽은 운무산(雲霧山)이 있고 그 밑에 용물이라 칭함.
본류(예성강)와 만나는 약 2키로의 거리에는 타지역에서 볼 수 없는 특산물 물버섯(석이버섯과 같음)이 돋는곳으로 봄(春)한철 미각을 돋구는 식품으로 유명함.

운무산에서 아래로 오수수베냥(검은암벽높이 높이 약100미터, 가로약200미터)이 솟아있는 것을 가리켜 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 함.
그 암벽에는 명필가 찬설(贊卨)씨 휘호(揮豪)가 부착되어 있고(한글자 크기가 가로세로 약1미터) 연이어 앞산(일명 매산)은 봄이되면 각종 꽃이 울긋불긋 꽃이 피며 강물에 투영된 그 풍경은 가히 묵개의 이목을 끌게 되는 곳이며 그 바로 아래 새리는 자갈밭이 마치 수석과 같이 잘 마모된 흰(白色)자갈 밭을 이루고 있음. 금수강산 암벽 간판이 부착된 강물 맞은편은 백사장으로 약4-5천평이 펼쳐지고 바로 아래에는 금잔디 벌이 약3천여평으로 형성되여 봄˙가을철에는 군(郡)내 학교에서 원족(지금은 소풍이라함)을 오는 곳으로 각 학교 대항 운동경기가 진행되는 곳이기도함.

동내 호구수(戶口數)는 약 110-120여호로 반남박씨 집성촌으로 타성(他姓)은 부자집 더불사리하는 몇 가구뿐이였으며 일정시대 군수˙경찰서장이 처음 부임하면 제일 먼저 찾아 부임인사를 하였음으로 군내에는 반남박씨 푼여울 하면 인근 군에서도 알려진 대성(대성)의 고장이였음.(윗푼여울 약40호, 적여면 삼합리 약20호, 사지면 굴원리 약20호)

제 2화 일제강점기

1937년부터 일본의 전쟁 강행으로 고요하든 고장도 증병 증용등으로 일본 탄광으로 젊은이들이 다수 증발 되었으며 다행히 큰 사고없이 귀국하였으나 1945년 8월 9일 소련의 대일전 참전으로 불과 1주일만에 일황 무조건 항복으로 노도와 같이 진격하는 소련군으로 하여 부녀자들이 외부출입 할 수 없었음.
부녀자를 보기만 하면 노소를 막론하고 총을 드리대고 강간을 하여 악명이 높았음. 8˙15일 광복을 맞은 환희의 기쁨도 잠깐 공산주의자들이 주로 함경도 출신이 각 시˙군 면단위까지 공산당 세포위원장이 되어 배치됨.
 매일같이 선동활동하여 우리 박씨 일문은 숨도 제대로 쉴수 없이 압박이 조여 오게 되었음.
 해방정국은 드디어 토지개혁, 남녀 평등권, 노동법령, 노동시간 8시간제 법령을 실시하고 지주(地主)는 악질적으로 무산계급을 착취하였다하여 1947년 지주 이주(移住) 계획에 따라 축출사업이라 하여 오늘저녁까지 집을 버리고 재산등을 가지고 떠나라 법을 어기면 더 가혹한 처벌을 한다하여 강제적으로 추방함.

이주대상자(당시)

박성준(朴聖雋) 一家

박지만(朴持萬) 一家

박한준(朴漢雋) 一家

박익서(朴益緖) 一家

이 네 가구는 황해도 신천군 산청면 구월산(九月山) 밑 아주 허룸한 골짜기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됨.
 이사는 하였으나 현지 적응을 못하여 가지고 있든 패물, 돈 될만한것 다 팔아 좀 환경이 낳은 곳으로 또 다시 짐을 옮겨야하는 고통을 겪다 견디다 못하여 38선을 인민군의 눈을 피하여 월남하게됨.
근근히 어려운 생활을 하여 오든 중 1950.6.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고향에 정착되여있든 종회원은 국가총동원령에 따라 인민군으로 징집당하여 낙동강 전선으로 투입되여 많은 젊음이들이 생명을 잃고 부상당하고 하였으나 나중에는 40세이상된 건강한 남자는 모조리 인민군에 끌려가게됨.

9.28 맥아더장군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으로 인민군은 일시에 북쪽을 향하여 퇴각이 시작되였고 10월 1일을 기점으로 38선 전역을 국군이 돌파하면서 북조선 정권에 미온적인 자들이 국군을 대환영 대한민국 만세가 곳곳에서 일어나자 북한당국 보위부는 요주의 인물이라는 그들의 정책의 계획에 따라 체포˙총살등을 행하여 무수한 인명이 살상되였음.

노도와 같이 북진하는 국군은 괴멸된 적 인민군을 일일이 소탕하지 못하고 20여일 만에 평양에 입성 패주하는 적을 따라 압록강에 이르러 압록강물을 수통(군용물수통)에 담고 환희함.
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게서 10만평양시민의 열열한 환대도와 통일을 눈앞에 두고 불행하게도 중공군의 한국전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국은 전선에서 작전상 후퇴을 하게 됨.

 당시 우리고향 신계군 마서면 초탄리는 총한발 쏘지 않고 무사하였으나 군소재지는 1차전진때(1950.10.11) 유엔군의 폭격으로 윱내전체가 파괴 소실되여 기거조차 할 수 없는 처참한 상태였음.
그리하여 후퇴하는 국군8사단 16연대가 우리 초탄리(푼여울)에서 1박 2일의 약간의 휴식을 하고 패잔병 토벌에 동내 청장년들에게 군인들의 지원을 위하여 장비(탄약, 중장비)을 운송수단으로 따라 나서게 되었음.
동시에 북쪽으로부터 피난민의 행렬이 줄을 이었음. 그 행렬에 우리 푼여울도 늙으신분만 집직히기로 남고 남행 피란줄에 서게됨.
 평생 고향에서 농사밖에 모르고 살던 종원(宗員)은 평산군을 거처 경의선 철로를 따라 경기도 개풍군(지금의 개성)을 지나 장단군 봉동 임진강까지 왔으나 (지금의 임진각 맞은편) 12월 하순이라 눈도 많이 내리고 날씨는 영하15도이하인 날씨에 떠났던 종원들은 죽어도 고향땅에서 하며 도루 회향하고 젊은이들만 약3개월 내지 4개월만 지나면 다시 북진할 것을 믿고 부모․형제들은 회향시키고 단신 월남 당장 먹고 자는 문제 해결을 위해 군에 입대하게 됨(일부 인민군에 징집되였다 국군˙유엔군의 포로가 됨).
1951-53년까지 휴전 협정이 조인 될 때까지 행여나 살아서 고향간다는 마음으로 모든 위험에서 이를 감내하였으나 어언 61년의 타향살이가 되고 말았음.
 여기서 1971년 경향 각지에서 생활 근거지를 마련하고 이사람 저사람의 입소문으로 흘으젓든 종원들의 1차모임에 참석자는 고 박성준씨, 고 박한준씨, 고 신준씨, 고 점서씨, 고 승기씨, 고 찬화씨, 고 지정씨, 고 창서씨, 고 희서씨, 고 찬욱씨, 고 지상씨, 고 지견씨, 고 찬규씨, 고 찬호씨, 고 찬백씨, 고 연준씨, 고 치준씨, 고 지풍씨, 고 찬양씨, 고 송춘씨, 고 지생씨, 고 지번씨, 고 찬양씨, 고 동준씨, 고 경준씨, 고 필준씨, 고 찬명씨, 고 지견씨, 고 지운씨, 고 찬운씨, 고 평준씨,
 현재 피난 1세대 생존자는 박지만, 박지영(거동불능), 박낙준(거동불능), 박왕서, 박사준(거동불능), 박찬홍(거동불능), 박문준, 박지권, 박용춘, 박충춘, 박상성, 박지섭(거동불능) 경인보 수보자중 처음 연결된 박찬일, 박만우, 박찬옥, 박찬석 삶의 터전이 주로 경․인․서울지구에 거주하며 제천․진천에 산재돼 있고 상기 열거한 나머지 모두 6.25이후 세대로 그들의 고향(출생지)은 남한 사회에서 자라고 커서 북녘의 우리 선조님의 경모정신은 피난 1세에 비하여 현저하게 애향에 대하여 부족한 것은 어쩔수 없는 시류(時流)로 밖에 볼 수 없음.
피난 세대들의 가장 큰 비애는 정월(설)과 추석(한가위)에 각기 고향을 찾아 가는 그 광경을 TV로 시청할 때 서울에서 부산 9시간, 광주․전남 몇시간, 태백․준령을 넘어 영동지역 등 각기 고속도로가 정체 거북이 걸음을 하여도 모든 귀성객이 밝은 얼굴로 피로감없이 환한 우슴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왜 저 행렬에 동참을 못하는가의 고통은 마음속 깊히 간직하여야 함을 새기고 그 긴 24시간(1일간) 지내는 것이 마음 답답함을 간직하고 살고 있으나 지금 내고향 산천의 그 옛날 모습은 그대로 일까?
 간접적 TV뉴스를 통하여 북한실정을 소개하는 프로그램 또는 소위 이탈주민(탈북자)들의 입을 통하여 조금이나 듣고 있으나 상상만하고 있는 중임.
지난 2005년 우리고향 신계군에서도 2명의 탈북자가 정착되였는데 그들은 우리 실향민 단체인 신계군중앙군민회에서 초청 그들의 후원(정착)을 위하여 자매결연을 맺고 1년에 한번하는 정기총회에 초청하여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지요.
필자(박왕서)도 직접 그들을 만나 대화하여 본 결과 우리 푼여울에서 약 5키로 떨어진 곳에서 출생 신계군내(읍) 초․중․고급 중학교까지 졸업하였다 하여 푼여울 동네에 대하여 물어본 결과 모르고 있었음.
그 사실은 북한정권은 6.25전쟁 휴전후 행정구역을 개편하여서 모르고 있었음.
우리 신계군 마서면은 본래 9개리였으므로 3개리로 개편 초탄리, 구낙리, 증영리를 한데묶어 반남박씨의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구낙리로 리명이 되고 있음.
그래서 구낙리는 아느냐고하고 물은 즉 안다하여 동내지형을 물어보니 동네가 야산을 따라 길게 생긴 동네라고 합니다.
본래 푼여울은 집집마다 돌기와집이였는데 다 허러버리고 방두칸, 부엌한칸 비둘기 둥지 집으로 동네 건물을 개조하여 그들의 세포조직이 주민 감시에 편리하게 만들었음을 알게 되었죠. 그러면 뒷솔밭(東山), 앞솔밭(灰山)의 그 무성하였던 소나무 숲은 보존되었는가 물었드니 야산이라 나무는 모두 벌목 땔감으로 없어지고 산은 개발하여 식량생산을 위하여 조상의 묘역 모두 파 헤처져 남아 있지 않타함.
 이제 고향을 찾아가 선조님들의 숨결은 조금도 느낄 수 없게 된 것이라 함.
후손으로 부끄럽습니다.
선조님의 업적에 미흡한 점이 너무 많습니다.
 돋보이는 재력가도 없고 현재의 생활에 만족할 수 밖에 없지요.
광복이후 월남하여 공직에는 감사원 감사위원을 하신 박지영씨(1920년생) 녹조근정훈장 홍조근정훈장 청조근조훈장 수여받음. 박찬석(1944년생) 모범공무원, 옥조근정 훈장 수여받음. 교통부 서기관을 한 박문준씨(1931년생), 명예군수 박평준씨(1914년생), 박지권씨(1930년생), 양천구 신월동에 우리들의원 원장 박지혁씨(1952년생), 중소기업 대신엔지니어링대표을 경영하는 박찬옥씨(1943년생), 박연춘(1955년생) 투투엘 주대표, 박윤춘(1947년생) 화성주대표, 박공춘(1956년생) 토지공사 부장, 박재형(1973년생) 고분자공학박사 경희대 환경공학대 교수, 6.25참전 박왕서(1927년생) 화랑무공훈장, 박찬양․박지권 6.25참전, 6.25참전 전사자 박영춘 강원도 인제군 현리 전투에서 동작동 국군묘지 안장 묘역 10구역 1591

6.25첨전 유엔군 불란서군에서 박찬운, 박사준, 박문준 형제 불란서 무공훈장수여, 박찬운씨와는 숙질간임.

인민군에 징집되였다 포로가 된(유엔군, 국군)자는 고 박찬묵, 고 박찬두, 고 박찬호, 고 박찬명, 박찬홍, 고 박찬규,
고 박지정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좌․우익의 피비린내 나는 사상 싸움에서 북괴의 지령을 받은 골수 빨갱이들의 만행(천막안에서 때려 죽임)에서 벗어나 광주포로수용소로 이감. 1952년 고 이승만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반공포로석방의 대열에서 자유의 몸이 되었고 그 중 박찬명, 박찬홍은 한국군에 입대 근무하였음.

이상과 같이 푼여울동내 유래에서 일제시대와 해방후 6.25전쟁을 통하여 숙천공(三子) 인자보자(寅字輔字) 후손들의 60년 비애를 첫째(문경), 둘째(김포) 종원 여러분은 셋째(황해도 신계)의 종손들의 비극을 숙천공(史)에 길이 남아 후세들에게 전쟁의 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이글을 쓰게된 보람이 있지 않을까요.

아 -- 숙천공 후세들이여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없기를 기원합니다.

숙천공 삼자(三子) 인자보자(寅字輔字)

신계 소종회 유사 박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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