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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니 장터 만세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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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1-04-19 13:37 조회7,99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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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니 장터 만세 시위

경서지역의 3대시장에 하나인 오라니 장터에서의 만세운동은 당시 경성제1고보(현 경기고등학교 전신) 3학년 졸업반이던 양촌면 누산리 619번지 출신 박충서(朴忠緖, 당시 22세)를 중심으로 한 조직과 대곶면 초원지리 423번지에서 젊은 2세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사재를 들여 서당(초원학술강습소) 을 설립하고 직접 교사로 재직하던 정인섭(丁寅燮, 당시 36세)을 중심으로 한 조직 등 2개 조직이 동시에 지휘한 만세운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박충서 지사는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경부터 4시경까지 대학생들과 함께 파고다 공원∼종로거리∼대한문 앞∼남대문 등에서 만세 시위에 가담하고 4일 후인 같은 달 5일 오전 9시경에 남대문 역(현 서울역) 전에서 약 200여명의 군중과 더불어 "조선 독립 만세"를 고창하는 등 계속적으로 적극 가담했다. 그러나 당시 향리에서 훈장을 하시던 부친 박승혁(朴勝赫)이 왜경으로부터 강압적 권유를 받고 상경하여 열사를 대동 귀향했다.



박 열사는 귀향 후 즉시 "만세운동"을 계속할 의지로 인근에 거주하고 있던 삼촌 박승만(朴勝萬, 당시 24세)과 친지인 안성환(安聖煥, 당시 32세), 전태순(全泰順, 당시 24세) 등과 같이 협의하기 시작하여 3월 19일 안성환의 집에 모여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는 격문과 일본인에게 하는 경고문 수십 통을 작성했다.



또 본 계획에 찬동하는 인근거주 오인환(吳仁喚, 당시 21세)과 양촌면 학운리 171번지 거주 외가친척 정억만(鄭億萬, 당시 27세) 등 7인이 각각 책임부서를 정하고 작성한 물건을 인근 주민들에게 배포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고 오라니 장터 장날 "독립만세!"를 절규하면서 사용할 구한국기(태극기)를 품속에 간직하고 3월 23일 오후 2시경 시장에 도착하여 수백 명의 군중과 더불어 시장을 돌면서 "조선독립 만세"를 선두에서 고창하였다.



대곶면 출신 정인섭 지사는 동리 거주 친구인 임철모(林哲模, 당시 37세) 지사와 3월 초순경부터 전국 각지에서 "조선독립"을 갈구하는 시위운동이 반발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찬동하면서 적극 참여키로 결심하고 거주지부락에서 "조선독립시위운동"을 전개시킬 목적으로 3월 22일 임 지사의 집을 방문한 자리에서 다음 날인 3월 23일이 양곡시장 장날이므로 이 날 거사하기로 결정했다.



이어 정인섭 지사가 무명천에 먹 글씨로 "독립만세"라 쓰고 한국기 1장을 그렸으며 3월 23일 오후 4시경 양인이 시장에 모여 있던 300여 명의 군중 속으로 들어가 정 지사가 갖고 있던 대나무 장대를 휘두르며 군중을 지휘하면서 임철모 지사와 같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조선독립 만세"를 절규하였다.



당일 오후 시간 불상경 현장에 말을 타고 출동한 일본 유산 헌병대와 경찰에 의해 강제 진압되면서 검거된 위의 열사별 형량을 보면 박충서 징역 2년, 박승각 징역 1년, 박승만 징역 1년, 정억만 징역 1년형을 받았고 안성환, 전태순, 오인환 등 3인은 징역 3월을 받았으나 정상을 참작한다는 이유로 90대의 태형(笞刑)에 처하였으며, 정인섭 징역 1년, 임철모 징역 8월을 받았다.





■만세운동 이후



박충서 지사는 만기출소 후 일제의 심한 감시 등으로 인하여 강원도 등지를 배회타가 폐결핵을 앓게 되어 귀가한 후 37세에 병사하였고, 정인섭 지사는 함흥형무소에서 만기출소 하였으나 고문휴유증으로 인한 정신 이상증세로 고생하다가 해방 1년 전인 1944년 7월 22일 5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임철모 지사는 특이한 신분의 소유자로 부친 임승필이 구한말 당시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직에 있었으며 본인 또한 참봉직을 역임했는데 서대문 감옥에 수감 중에도 식음을 전폐하는 등 계속해서 투쟁하다가 5월 10일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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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촌면은 1919년 3월 23일 오라니장날을 기해 수천여 주민이 참가한 두차례

대규모 만세시위가 전개된 지역이다. 양촌면 누사리 출신 박충서, 박승각, 박승만,

안성환, 전태순, 오인환, 정억만, 정인섭, 임철모, 임효원 등 이 주도했다.

 

오라니장터3.1만세운동기념사업회는 매년 3월22일 추모제를 거행해 왔으며

2.1만세운동기념사업회는 매년 3월23일 추모제를 거행해 왔으며 3.1절 기념,

현충일, 광복절, 순국선열의 날에 참배를 실시해왔다. 또 지역의 초중고 학생과

일반 주민들을 대상으로 년2회 유적지 순례를 실시하고 김포지역의

 항일독립운동의 역사와 자료발굴사업과 학술심포지움 등을 개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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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김포시 양촌면 양곡리 266-6

■ 건립일자 :  1985. 12. 11 

■ 건립/관리자 : 김포시 양촌면

■ 시설제원 : 면적 33㎡, 기단높이 1.5m  비높이 2.33m

■ 건립취지 및 유래

    1919년 3.1독립만세로 한민족의 문화정신을 고취시킨 이 고장에 자취를 기리기 위하여 양곡리 475-15번지에 건립하였다. 그후 주변의 개발로 1985년 12월 11일 양곡리 산 266-14번지로 이전하였다가 다시 유적비 위치가 부적정하여 2000년 11월 20일 양촌면(및 이장협의회, 번영회)의 주선으로 이곳으로 이전되었으며 비문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상이하여 오라니장터 3.1만세운동기념사업회가 2001년 8월 15일 일부 수정하였다.

 

■ 양촌면 3.1 독립만세운동 개요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박충서, 박승만, 전태순 등이 1919년 3월 19일 안성환의 집에서 양곡 장날인 3월 23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고 태극기, 격문, 경고문 등을 작성하여 오인환, 정억만에게 배포하도록 하고 3월 23일 양곡 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시장을 행진하는 등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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