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이 潘南朴氏 →羅州朴氏 → (錦城朴氏)→潘南朴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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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nampark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1-04-27 15:54 조회4,572회 댓글0건본문
1. 潘南朴氏의 유래
본래 우리 선조는 언제부터 반남에 살았는지 기록이 없으나, 고려조(高麗朝) 고종(高宗)때 박응주(朴應珠)께서 반남(潘南) 호장(戶長)을 지내셨던 관계로 본관이 관향인 반남(潘南)으로 하였다.
우리의 선조가 처음으로 한국(韓國) 역사상(歷史上)에 부각되기 시작한 고려 공민왕 때 판전교시사를 지낸 박상충(朴尙衷)과 아들 조선조 태종 때 좌의정을 지낸 박은(朴訔)과 밀직공의 계축호적 기록을 참고하면
<기록1>
密直公 癸丑戶籍
典議 恭愍王22년 癸丑(1373년) 12월 日 北部上 五冠山 三里 壬子年 戶口準
奉翊大夫 密直副使 上護軍 致仕 朴秀 78 本은 潘南
父 進士 良醞令 同正인 允茂
祖 及第인 宜
曾祖 戶長인 應珠
<기록 2>
高麗史
《112 열전 25 / 제신 / 박상충(朴尙衷) 》기록
§ 박상충(朴尚衷)
박상충(朴尙衷)의 자(字)는 성부(誠夫)요 나주(羅州) 반남현(潘南縣) 사람이니 공민왕조(恭愍王朝)에 등제(登第= 급제)하고 여러번 옮겨 예조 정랑(禮曹正郞)이 되었다. •••••••••
<기록 3>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종4년 1422 5월 9일 금천 부원군 박은의 졸기 知 經筵
금천 부원군(錦川府院君) 박은(朴訔)이 졸(卒)하였다. 은의 자는 앙지(仰止)요, 전라도 나주(羅州) 반남현(潘南縣) 사람이요, 고려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박상충(朴尙衷)의 아들이다.•••••••••
태종 원년에 호조 전서로 전임되고, 익대 좌명 공신(翊戴佐命功臣)의 호를 받았는데, 교서(敎書)를 내려 포장하였다. 병·리(兵吏) 두 조(曹)의 전서(典書)를 역임하고, 추충 익대 좌명 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의 호를 더 받고, 관계를 올려 반남군(潘南君)에 봉하였다.
위의 기록에 의하면 평도공 때 까지 반남을 관향으로 삼았고 평도공께서 태종원년 익대좌명공신으로 훈호(勳號) 반남군(潘南君) 받으실때도 관향의 이름에 의해서임을 알수 있다.
2. 나주박씨로 개칭
조선조 초 태종 때 지방행정조직의 개편으로 반남현이 나주목에 속함으로 인하여 관향이 반남에서 나주로 변경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태종12년12월13일 《반성군 박은의 본향을 나주로 정해 주다》
반성군(潘城君) 박은(朴訔)의 본향(本鄕)을 나주(羅州)로 내려 주었다.
박은은 본래 나주 임내(任內) 반남현(潘南縣) 사람인데,
이제 예(例)에 따라 임내(任內)를 혁파(革罷)하여 나주에 합치었으므로,
이같은 명이 있었으니 박은의 청을 따름이었다.
뒤에 금천군(錦川君)으로 고쳐 봉(封)하였다.
위와 같이 태종 12년에 반남현이 나주로 합쳐짐에 따라 관향이 반남에서 나주(羅州=錦城)로 바뀌게 되어 평도공의 군호(君號)가 반성군에서 나주의 별칭(別稱)인 금성(錦城)과 관계된 금천군(錦川君)으로 개칭(改稱)되었다.
이후 숙종때 까지 관향을 나주로 쓰이고, 이후로부터 는 우리 선조님들 에게 의빈의 위호. 군호(君號)를 봉할 때마다 나주가 신라시대에는 금산이었기에 앞 글자에 금(錦)자(字)가 꼭 들어가게 됐다.
(예로 금양위 금창부위. 금평위.금성위.금능위, 금주군,금능군.금원군,금완군 등등)
평도공 朴訔 이후의 선조님 들의 관향은 나주로 쓰이게 되었다.
3. 금성박씨로 잠시 사용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금성박씨가 사마방목외 타 문중의 족보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원본 사마방목중에서 집계된 금성박씨는 13분의 기록을 찾아볼수 있으며
현재 한국학 중앙연구원에서 발표된 자료중에는 서계 박세당, 박세장은 본관이 반남으로 수정되어 있으나 그 외분들은 거의 생원,진사 에는 금성박씨로 기록 되어있고
박태소(朴泰素), 박태손(朴泰遜)의 기록은 문과급제에는 본관이 반남으로 수정 되어있고 생원 진사시에는 금성으로 되어 있는 분이 있다.
효종5년(1654)~ 숙종5(1679) 사이로 사마시합격자의 명단에는 본관이 금성으로 나타난다. (※ 이시기는 일차 임오보(1642년)가 간행된 이후 이차 계해보(1683년)가 간행되기 전)
금성박씨에 대한 자료는 오직 사마방목에만 나타나고 있기에 앞으로 더 연구를 해 보아야할 과제다.
그렇다면 왜 금성박씨를 썼을까?
인조 때 와 효종 때 나주목 관아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여 나주가 금성현으로 강등되는 시기가 있었다.
인조때는 나주 목사(牧使) 이갱생(李更生)이 칼로 찔려 목사가 중상(重傷)을 입는 불행한 일이 있었고
효종 때는 나주의 객사에 있던,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훼손하는 사건으로
나주가 금성현으로 낮아지는 불행한 일로 인하여
전라도(전주+라주)가 전남도(전주+남원)로 명칭이 바꾸는 일이 있었기에
나주 박씨 대신에 금성박씨를 쓴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46권, 23년(1645 을유 / 청 순치(順治) 2년) 7월 11일(경신) 1번째기사
목사를 상해한 일에 대한 전라 감사의 치계로, 나주의 칭호를 강등시키다
전라 감사 윤명은(尹鳴殷)이 치계하기를,
“나주(羅州)의 주리(州吏) 양한룡(梁漢龍) 등이 목사(牧使) 이갱생(李更生)을 칼로 찔러 목사가 중상(重傷)을 입었으나 죽지는 않았습니다.”
하였는데, 이 사실을 들은 자들이 모두 경악하였다. 이갱생은 성품이 굳세고 과단성이 있으며, 총명하고 관찰력이 있어 본디부터 고을을 잘 다스리기로 이름이 났었다. 그가 나주 목사가 되어서는 그 지방 풍속이 모질고 포악한 것 때문에 오로지 형벌의 위력을 사용하여 함부로 형벌을 가한 일이 많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원망하였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주리 양한룡이 임금에게 진상할 전죽(箭竹)을 훔치다가 발각되었으므로, 이갱생이 그를 힐문하였으나 복종하지 않자, 다시 다음날에 그를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양한룡의 족당(族黨)인 정이명(鄭爾明) 등이 밤에 그의 무리 10여 인과 함께 양한룡을 감옥에서 탈출시키고, 칼을 가지고 아문(衙門)으로 들어와 이갱생을 찔렀으나, 이갱생이 이불로 자기 몸을 감쌌으므로 죽지 않았다. 이갱생은 이를 양한룡 등이 한 짓이라고 생각하고 마침내 그들을 체포해서 신문한 결과 과연 모두 승복하였다. 윤명은이 또 치계하기를,
“이갱생이 인심을 잃은 것이 쌓여서 이런 변이 있게 되었으니, 이갱생을 파직시키소서.”
하였는데, 이조 및 비국이 아뢰기를,
“적도(賊徒)를 국문도 하기 전에 먼저 그곳 수재(守宰)를 파직시키는 것은 한갓 적도들의 마음만 맞추어 주는 꼴이 될 뿐이니, 파직시키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이 일은 평범하게 처치해서는 안 되니, 추고 경차관(推考敬差官)을 내보내어 다시 엄하게 국문해서 법에 따라 사형에 처하고, 감사는 중하게 추고하라.”
하니, 이에 경차관 장응일(張應一)을 보내 그 무리들을 국문하여 모두 베어 죽이고서 나주의 칭호를 강등시켜 금성(錦城)이라 하고 전라도를 전남도(全南道)라 하였다. 그 후 마침내 윤명은도 명하여 파직시켰다.
효종 14권, 6년(1655 을미 / 청 순치(順治) 12년) 1월 17일(임인) 3번째기사
나주에서 전패를 파손한 변을 도신이 아뢰어 읍호를 낮추어 금성현으로 하다
나주(羅州)에서 전패(殿牌)를 파손한 변이 있었는데 도신(道臣)이 아뢰니, 그 읍호를 낮추어 금성현(錦城縣)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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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패(殿牌) 조선시대 지방관청의 객사(客舍)에 왕의 초상을 대신하여 봉안하던 목패(木牌). 앞에 '殿'자를 새겼으므로 이와 같이 부른다. 지방에 출장한 관원이나 수령이 여기에 배례(拜禮)하였으며 만일 훼손하거나 모독하는 경우에는 왕에 대한 불경죄로 취급되어 본인은 물론 수령 및 그 고을도 처벌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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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방목《검색결과 : 13 건, 금성:박 &錦城: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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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혁(朴世爀) / 孝宗 05 式年 生員 박태징(朴泰徵) / 孝宗 08 式年 進士 박세장(朴世樟) / 孝宗 08 式年 進士 |
孟智-椿幹-綏-楹厦-弘珠-文休-세혁-태첨 소-응천-동현-병-세기-태징 소-응복-동량-유-세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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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혁(朴世爀) / 顯宗 01 式年 生員 박세당(朴世堂) / 顯宗 01 增廣 生員 박표(朴사의 오류) 顯宗 01 增廣 進士 박태소(朴泰素) / 顯宗 03 增廣 生員 박세봉(朴世封) / 顯宗 03 增廣 生員 박세희(朴世熙) / 顯宗 03 增廣 生員 박태손(朴泰遜) / 顯宗 03 增廣 進士 박세량(朴世樑) / 顯宗 04 式年 進士 |
집-응인-동위-여-세혁-태등 소-응천-동선-정-세당 소-응복-동량-사 소-응천-동선-정-세견-태소 소-응천-동현-병-세봉 빈-세희 소-응순-동언-황-세楠-태손 潾-세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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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첨(朴泰詹) / 肅宗 05 式年 生員 박태서(朴泰舒) / 肅宗 05 式年 生員 |
孟智-椿幹-綏-楹厦-弘珠-문휴-세혁-태첨 소_응인-동위-梠-.世준-泰舒-필재- | |
(자료;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 )
4. 나주박씨로 개칭
그러다가 나주박씨에서 반남박씨로 바뀐 이유와 시기
우리 반남박씨 족보가 현재까지 7차례 나왔는데
처음에 출간된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선조의 사위)께서 편찬하신 임오보(1642년)에는 표지에 “羅州朴氏世譜”로 기록 되어있어 평도공께서 태종으로부터 받은 나주박씨를 이어 쓰고 있었으며
두 번째 출간한 西溪 朴世堂이 편찬한 계해보(1683년)에는 표지에 “반남박씨세보”로 되어 있으며 계해보 序文 기록 중에 “반남박씨세보증수범례(潘南朴氏世譜增修凡例)” 두 번째 내용 중 다음과 같이되어 있다.
舊譜稱羅州朴氏吾朴氏本出潘南卽高麗舊縣至我 朝?於羅州故舊譜云然然據輿地勝覽羅州姓氏有本州朴 從義朴 潘南朴 伏龍朴 押海朴 任城朴 之異若但稱羅州無以自別於他族而惑致混淆僞冒之患今謹改羅州曰潘南
임오보(壬午譜)에서 본관(本貫)을 나주(羅州)라 한 것을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의해 반남(潘南)으로 고친다. 위와 같이 기록 되 있으며 그이유가 “여지승람의 나주 군지(郡誌)의 성씨에는 이 고을(나주) 박씨중에 반남박씨 (潘南朴氏)는 복룡(伏龍)의 박씨, 압해(押海)의 박씨, 임성(任城)의 박씨와는 다르다는 뜻을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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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나주박씨라고 하였으나 우리 박씨의 본은 반남에서 나왔는데 고려의 옛 현이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나주에 합병되었기 때문에 옛 현명으로 명칭한 것이다. 그러나 여지승람의 나주군지의 성씨에는 이 고을 朴박씨 중에 반남(潘南)지방의 박씨, 복룡(伏龍)지방의 박씨, 압해(押海)지방의 박씨, 임성(任城)의 박씨와는 다르다는 뜻을 따른 것이다. 만약 나주라고만 한다면 다른 종족宗族과 구별 할 수가 없으므로 혹은 혼동이 되어서 허위로 남을 속일 폐단이 있기 때문에 나주를 반남이라고 개칭한 것이다. |
만약 나주라고만 한다면 다른 종족(宗族)과 구별 할 수가 없으므로 혹은 혼동이 되어서 허위로 남을 속일 폐단이 있기 때문에 나주(羅州)를 반남(潘南) 이라고 개칭(改稱)한 것이다.
“위에와 같은 기록을 보면 우리의 반남박씨의 본관이 반남으로 확정된 것이 1683년 계해보 발간 이후이기에, 계해보 발간 이전 기록에는 우리의 선조 분이라도 반남박씨가 나주박씨로 기록된 기사가 남아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 예로 문과방목(과거급제자 명단) 이나 사마방목 합격자(생원과 진사합격자 명단)의 본관에서도 숙종 이전에는 반남박씨라도 본관이 나주 박씨로 합격하셨고 숙종 이후에부터 반남박씨 합격자가 등장하면서 나주박씨를 본관으로 쓰시는 분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숙종 이후에 본관을 나주 박씨라고 하는 합격자의 신상명세를 조사하면 실상은 반남박씨였기에 숙종 이후에도 많은 분들이 본관을 반남과 나주박씨를 함께 쓴 것 같다.
현재도 문과방목에 나주박씨로 기록된 분이 많이 남아있기에 안타까운 일이나
위의 결과를 검토해보면 처음에는 관향을 반남(潘南)으로 했으나 태종 12년에 반남현이 나주(羅州)로 흡수되면서 관향이 나주(羅州)로 되어 본관이 나주였으나 숙종 9년 서계공(西溪公 朴世堂)이 계해보(癸亥譜)를 출간하면서 반남으로 관향을 바꾸므로 그때부터 우리의 본관이 반남으로 정해진 것으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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