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강서원 두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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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문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1-05-18 12:16 조회4,469회 댓글0건본문
1977년 10월 경기도 기념물 제41호로 지정된 노강서원은 서슬 퍼런 흥선대원군의 사원 철폐 칼날을 피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다. 요즘 시청자들의 인기를 받고 있는 MBC 사극 ‘동이’의 역사적 무대가 되는 숙종 때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의 폐위에 반대하다 고문으로 돌아간 정재(定齋) 박태보(朴泰輔)를 기리고자 1695년(숙종 21)에 세운 서원으로 본래 노량진에 있었다고 한다.5) 그러다가 한국전쟁으로 모두 불타 없어졌지만, 일찍이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이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을 기리고자 수락산 자락 자신의 집 가까이 세운 청절사(淸節祠)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훼철되고 남은 빈 터에 후손들이 노강서원을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렀다.
5) 1697년(숙종 23)에는 숙종으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현재 사우에 걸려 있는 현판은 정조가 1791년(정조 15, 신해)에 내린 것이다.
노강서원의 이러한 우여곡절을 가슴에 담아두고 찾아갔을 때에는 너무 작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냐하면, 교육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강당이 없이 사우(祠宇)와 양 옆의 동재와 서재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강서원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들어 보고자 서계종택으로 향했다. 종부이신 김인순님께서 반가이 맞이해주시면서 싱그러운 차와 함께 노강서원과 관련한 여러 이야기들을 얻어 들을 수 있었다. 종부님 말씀에 따르면, 본디 협소한 청절사 터에 노강서원을 다시 세운 까닭에 교육 공간인 강당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서계 후손들은 종택과 노강서원, 그리고 서계 선생이 교육장의 하나로 썼던 궤산정(憒山亭) 등을 연계하여 2007년까지는 의정부시에서 지원하는 서계문화제를 열었다고 한다. 그리고 서원의 교육적 기능을 되살려 보고자 2004년부터 의정부 31개 초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한 ‘우리고장 바로알기 문화유적답사’ 대상 지역으로 종택과 서원을 개방하는 한편, 2006년에는 반남학교를 열어 서계 선생에 대한 학문과 사상, 일생에 대한 특강을 진행하기도 하였고, 2007년에는 장암ㆍ동암초등학교 5∼6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서계 박세당선생 실학교실을 진행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2008년부터는 의정부시에서 더 이상 재정 지원이 나오지 않아 실학교실은 진행하지 못하였고, 반남학교는 후손들을 중심으로 하여 근근이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 노강서원 사우와 현판
종부님의 자세한 설명을 듣던 가운데 서계종택 종손이자 서계문화재단(http://www.seogye.com/) 이사장인 박용우님께서 함께 해주셨다. 박용우님께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종택과 서원을 아울러 연계하여 단지 서계 선생을 기리는데서 멈추지 않고 오늘날에도 소중한 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의정부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싶다는 자그마한 바람을 전했다. 서원은 오늘날로 보면 사립학교다. 그런 까닭에 서원이기에 앞서 교육이라는 공익적 측면에서 볼 때, 한 집안의 조상을 숭배하는 것으로 그 목적을 다했다고 볼 수는 없다. 다행히도 박용우님의 바람을 알았을 때, 공공의 차원에서 의정부시 자체의 적극적 돌봄이 필요할 때라 여겨진다.
▲ 궤산정
▲ 청풍정 터(청풍정 유지)
노강서원과 서계종택을 뒤로 하면서 문득 그 자리가 오늘날 서울특별시 노원구와 의정부시의 경계에 있음을 알았다. 마치 한 시대에 큰 획을 그어 자취를 남긴 서계 선생의 사상과 학문이 경계인의 모습 온새미로 있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서계 선생이 이곳에 자리할 무렵에는 양주 땅 한 가운데에 가까웠을 터였지만, 그런 까닭에 더더욱 서계 선생이 앞날을 바라보고 자리 잡은 혜안까지 느껴졌다. 모쪼록 노강서원과 서계종택이 서계 선생의 사상과 학문을 되살리고 드높여 교육의 공공성을 밝히는 터전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알찬 역사를 일구어가는 의정부 시민들에게 커다란 역사적 반석으로 굳건히 자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 서계 종택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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