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원씨 대종회 오창공 묘소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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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원씨 대종회 전회장, 회장,부회장(원주향교 전교),전 원주시의회의장 및 원주원씨 여러 종친들 께서 5월19일 오창공 묘소참배 하셨습니다.
耘谷 元 天 錫 先生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先生께서는 고려(高麗) 국자진사(國子進士)로 충정왕(忠鼎王) 17년인 서기1330년 7월8일 출생하셔 90여세를 강령(康寧)하셨으며 인품은 물론 문장과 학문(學門)이 당대의 거성(巨星)이시다.
운곡(耘谷)께서는 국자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고려말 정치적 어지러움을 보시고 벼슬길에 나서지 않으신다.
이성계가 高麗를 멸망시키고 朝鮮을 建國하자 72현의 忠臣들과 두문동에 모여 나라를 걱정하지만, 힘이 없는 지라, 고려 멸망을 한탄하며 고향인 원주 치악산에 낙향 초근목피로 은둔생활을 하시면서 오직 충절(忠節)로 나라를 걱정하시며 일생을 보내신다.
태종은 운곡(耘谷)께 수차 사람을 보내어 출사를 권유하였으나 거절하자 태종께서 직접 운곡(耘谷)께 출사를 권유코자 耘谷을 찾아 원주 치악산(雉岳山)에 행차하시였으나, 운곡(耘谷)께서는 벼슬의 길을 택하지 않으시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의 선비정신을 굽히지 않으시며 치악산 상봉에 위치한 변암에 피하여 태종을 만나지 않으시니,
태종(太宗)은 비로서 운곡(耘谷)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돌릴 수없음을 알고, 한 정자에서 귀하신 몸을 칠일(七日)간이나 묵으면서 운곡(耘谷)을 경모(敬慕)하시니,이곳이 바로 그 유명(有名)한 태종대(太宗臺)이다.
태종대는 현재 횡성군 강림면 치악산 기슭에 태종대라는 현판과 정자 한동이 옛 역사를 간직한체 사적으로 보존되고 있다.
운곡의 그 고절(高節)을 삼은(三隱:圃隱 정몽주. 牧隱 이색. 冶隱 길재) 보다 더 휼륭하고, 백이숙제(伯夷叔齊)의 절개와 비교할 만 하시다고 높이 평가받고 있다.
문집으로는 〈운곡시사 耘谷詩史〉가 전한다. 이 문집은 왕조 교체기의 역사적 사실과 그에 관한 소감 등을 1,000수가 넘는 시로 읊은 것으로 제목도 '시사'(詩史)라 했다. 야사는 없어졌으나 이 시가 하나의 증언으로 남아 있어 후세의 사가들은 모두 원천석의 증언을 따랐다.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로 시작하는 고려왕조를 회고하는 시조 1수가 전한다.
耘谷行錄詩史序(운곡행록시사서)
내 일찍이, 원주 사람 원천석(元天錫)이 고려말에 숨어 살면서 책을 써서, 우왕(禑王)과 창왕(昌王) 부자가 신돈(辛旽)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자세하게 서술하였는데, 우리 왕조가 들어서자 세상에 나오지 않고 일생을 마쳤으니, 그 맑은 풍모와 높은 절개는 포은(圃隱)과 야은(冶隱)등 여러 선생과 비교할 만하지만, 자손들이 그 책을 숨겨둔지 오래 되어 읽어 본 사람이 없고, 그 이름조차 사라져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다고 들었다.
200년 뒤에 내가 이 고을에 관찰사로 왔다가 마침 선생이 지으신 운곡시집(耘谷詩集)을 얻어 보니, 비록 기록한 것이 많지는 않아도 예전에 들었던 사실과 달라서, 모두 특필할 만한 사실이었다.
아아! 우왕(禑王)이 처음 왕위를 이어받을 적에 최도통(崔都統) 목은(牧隱) 포은(圃隱) 같은 몇몇 원로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당시에는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어서 즉위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이의가 없었다. 그뿐 아니라 목은(牧隱)이 먼저 말하기를, “마땅히 전왕(前王)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까지 했다. 그런데 창왕(昌王)을 폐위할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왕(禑王) 부자는 신돈의 자손이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창왕을 폐위시킬 길이 없었기 때문에, 다만 이것으로써 구실을 삼았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왕씨(王氏)의 후손은 이미 공민왕(恭愍王) 뒤에 끊어진 셈이니, 몇몇 분들이 과연 누구를 위해 정충(精忠) 대절(大節)로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죽고 말았는가. 하물며 당시에는 조정의 기강이 그다지 문란하지 않고 군국(軍國)의 큰 정사도 몇몇 분들에게 일임되어 있었으니, (그분들이) 거짓 임금을 쫓아내고 나라 왕실의 성(姓)을 존속시키는 일에 누구보다도 앞장설 분들이 아니었던가.그분들이 취할 태도는 이미 마음속에 강구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역사를 쓰는 저 무리들도 일찍이 왕씨(王氏)의 국록을 먹은 자들이건만 죽음으로써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도리어 우왕(禑王) 부자를 신돈(辛旽)의 출생으로 덮어씌웠으며, 그것도 모자라 공민왕이 병풍 뒤에서 홍륜(洪倫) 등의 외설스런 짓을 보았다고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지금도 (역사를) 읽는 자들이 모두 침을 뱉으며 더럽게 여긴다.
우왕의 한 가지 사실만 근거해서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었으니,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라는) 선생의 한 마디 말씀이 아니었더라면 천백년 뒤까지도 반드시 그릇된 기록을 답습하는 일이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서야 우리나라에 역사가 있다고 말하겠는가. 충신과 의로운 선비가 나라에 유익함이 바로 이와 같다.
목은(牧隱)과 포은(圃隱) 같은 분들이 조정에 계셨기에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이미 떠난 뒤에도 (고려왕조가) 수십 년 동안이나 부지할 수 있었다. 선생같이 재야에 숨어 계시는 분이 시를 읊고 회포를 서술하면서 사실에 근거하여 바로 썼으니, 말씀 한 마디 글자 한 자가 모두 충분(忠憤)에서 나온 것이다. (선생의 글로 인해서 우왕과 창왕이) 왕씨의 부자(父子)로 정해졌을 뿐만 아니라 「고려사」 가운데 어지러운 말과 망녕된 글들도 이로 말미암아 변증할 여지가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궁하게 묻혀 살거나 세상에 나가 벼슬한 길은 달랐지만, 나라의 빛이 된 것은 마찬가지이다.
만약 당시의 임금들이 일찍이 충(忠)과 사(邪)를 판단해 처음부터 끝까지 국정을 위임하고 그 경륜을 펼치게 했더라면 목은과 포은(圃隱)이 어찌 문천상(文天祥)이나 육수부(陸秀夫)같이 (죽게) 되었겠으며, 지초(芝草)를 먹고 국화를 먹는 것도 어찌 선생이 좋아서 스스로 택했으랴. 슬픈 일이로다.
선생의 시고(詩稿) 2권은 모두 선생이 스스로 쓰신 것이고, 대부분 산인(山人)이나 석자(釋子)들과 오가며 주고받은 것인데, 그 가운데 약간은 바로 선생의 대절(大節)을 담은 글이라서 빨리 세상에 널리 퍼뜨려 표식(標式)을 삼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곧 베껴내어 한 책으로 만들고, 연대순으로 편집하여 제목을 「詩史」라고 하였다. 풍속을 살펴보려는 자들이 보지 않으면 안될 책이니, 붓을 잡는 자들이 채집할 수 있도록 대비해 둔다.
만력(萬曆) 계묘년(1603) 여름.
강원도 관찰사 박동량(朴東亮)은 삼가 쓰다.
耘谷行錄詩史序
嘗聞原州人元天錫在麗末隱居著書。言禑,昌父子非辛出事甚悉。逮我朝。閉門終身。其淸風峻節。直可與圃,冶諸公相伯仲。而子孫秘其書久益密。人無得以見者。幷與其名遂泯泯不傳於世。後二百年。余按節到是州。適得其所爲詩耘谷集。雖所紀不多。與向所聞異。要之不失爲特筆也。嗚呼。方禑之嗣王位也。數三元老如崔都統,牧隱,圃隱諸公猶在也。不惟當時上下無異議。牧隱首曰。當立前王之子。及昌之廢也。始曰。禑父子乃旽之子孫。盖不如是則昌無可廢之道。特爲此以籍之耳。不然。王氏之祀已絶於恭愍之後。而以數公精忠大節。竭誠盡。死而後已者。果爲誰乎。況朝廷綱紀不甚潰裂。而軍國大政。一委之數公。則廢僞君存國姓。必不出他人之後。其所進退取舍。講于中者固已審矣。彼修史輩亦嘗食王氏之祿者。旣不能一死。又以禑父子冒之辛。此猶不足。至記恭愍從屛後觀洪倫等褻行事。至今觀者莫不醜唾。據禑一事。不足知其誣。微公一言。千百載下。必將襲謬不已。可謂東國有史乎。若是乎忠臣義士之有益於爲人國家也。有牧隱,圃隱諸公而立於朝。則當天命人心已去之後。能有所扶持。至於數十年之久。其隱而在下也有如公者。則吟,陶寫之間。據實直書。一言一字無非忠憤所激。不但王氏之爲父子者定。麗史中亂言妄書亦將因此。而或有辨證之地。則窮達出處雖不同。其爲邦家之光一也。當時之君。早辨忠邪。終始委任。得以展布所蘊。牧隱,圃隱豈終爲文天祥,陸秀夫之徒。而茹芝餐菊亦豈公之所欲自托者哉。可悲也夫。公之詩二卷。皆公所自書。多與山人釋子所嘗往來酬唱。而其中若干首。卽公之大節所寓以存者。當廣布於世。爲之標式。遂抄而爲一冊。編其歲月於其間而名之曰詩史。盖觀風者之所不可已。而亦以備秉筆者採焉。
萬曆 癸卯 夏。江原道 觀察使 朴東亮。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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