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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학범 할아버지 이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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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우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1-07-02 23:33 조회3,7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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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日報 인터뷰 기사에 나타난 學凡 朴勝彬

학범 박승빈에 대해서는 대체로 국어 연구자로 많이 알려졌지만 그의 학문적 출발은 법조인 이였다.

그는 1880년 9월29일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일본 관비 유학생이 되어 1907년 일본 중앙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1908년에는 번역서인 <헌법>을 펴냈고 1909년에는 <언문일치 일본국육법전서>를 펴냈다

기록을 살펴보면 법전을 번역하면서, 학범이 조선어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같게 된 것 으로 추정된다. 김완진(1985,170)에 의하면 학범은 법전 편찬에 관심이 있었는데, 법전 편찬에 뜻을 두다보니 표기법이 정비되어있지 않아 표기법에 관심을 두었고, 표기법을 뒷받침 할 문법연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1909년은 학범에게 여러모로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시기였다. 황성신문 1909년 3월 4일자 기사에 의하면, 그는 이 당시 평양공소원(平壤公訴院) 검사로 변호사 개업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경성으로 온 것은 1909년 7월로 여겨지는데, 1909년 7월 13일 대한매일신보 2면 4단에 보면 “본 10월에 경성에 있는 변호사 제씨가 상업회의소에서 총회를 하고 변호사 최진씨가 의장으로 출ㅅ격하야 변호사회 규측을 의뎡하고 임원을 선뎡 하엿난데, 회장은 리면우씨오 상의원은 쟝도회진. 태명식. 뎡명셥. 박승빈. 제씨라더라”는 기사가 있다.

대한민보 1909년 10월 24일자를 보면 학범의 변호사 개업 광고를 볼 수 있다.

기사에 나온 학범의 변호사 사무실 주소는, 경성 중부 서린방 합동 (母校北) 10통 7호이다.

계명구락부에서 활동했고, 1921년 <계명>창간호에서 조선어에 대한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1913년부터 1925년 까지, 그는 조선인 변호사만의 단체인 경성 제2변호사회의 상 의원으로 활동한다.

학범은 1925년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본격적으로 교육과 국어학자의 길로 들어선다.

학범이 표기법에 대해 작성한 논문은 1927년에서 1928년에 <현대평론>8~11호에 기고한 “ㅎ은 무엇인가”라는 글이다. 김완진(1985.171)에서는 이 시기부터 학범이 문법서<조선어학>의 집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1928년 12월 18일자 동아일보 3면 1단에 실린 기사내용에는 박승빈 선생의 서재에 대한 묘사가 있다.

(표기법을 현대식으로 고침) ~전략~ 흑색 커튼을 반쯤 늘인 양편 창 앞에, 따로 깔아 놓인 테이블에 대한 씨의 설명은 이러 했습니다. “한편쪽 것은 사무 테이블입니다, 학교 살림살이에 대한 문서만 모아놓고, 이편 쪽에는 조선어 공부하는, 즉 내 공부만 하는 테이블입니다. 서적은 급히 참고할 책만 날라다 두고 있습니다. 방에 책이 잔득 놓이면 왜 그런지 머리가 무거운 듯해서요. 습관상 서적을 따로두고 여기서는 간단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슬림전기 스덴드, 그리고 전화통 외에는 과연 복잡한 세간은 없었습니다. (이하생략)

그리고 그해인 1928년 12월 28일자의 동아일보 인터뷰에서는

“내가 한글로 해서 연애병에 걸린 지 20년이나 됩니다. 어릴 때는 공자. 맹자. 시편. 서전이니 하면서 한문 공부만 하다가, 젊었을 때 들어서는 법률학을 마치고, 변호사의 생활에 교장까지 했었습니다 만은

일본에서 법률방면으로 연구할 때, 그 때부터 나의 가슴에는 조선에 대한 애착이 싹트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연치 않은 일만 같습니다.

그런데 현재 한글을 연구한다는 다른 분들과 같이, 나도 처음에는 오로지 주시경씨의 주장을 목표로 삼고 음미하는 동시에 어느 정도까지 공부 했었습니다 마는, 근년에는 그의 흠집만 발겨질 뿐임으로, 자연히 나의 신안(新案), 즉 나의 독단적 의견만 날로 늘어갈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동료들에게 상스럽지 않은 주목과 비평을 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다만 ‘진리는 당시에는 손가락질을 당할지언정 영구불변으로 끝까지 남을 것 이라는 신념을 갖고 나의 연구를 힘 있게 세워나갈 작정입니다. 그리고 새 힘과 용기를 뽑고 있습니다. 아무튼 한글이란 것이 나를 꼭 붙든 셈입니다. 집에서 밥을 먹을 때와 또 다른 일을 할 때나 저녁 같을 때, 좀 머리를 쉬게 할 차로 계명구락부에 가서 친구들과 농담 만담을 할 때도 문득 머리에 떠오르든가, 혹은 입에서 흘러나오고 마는 것은 조선어에 관한 생각과 소리뿐입니다. 전혀 병적이라고 할 만큼 요사이 나는 그 편으로만 기웁니다.

그러나 왠지 나의 공부를 할 틈이 적어서 걱정입니다. 방문객과 전화가 나의 정신을 뺏어 갑니다.

방학 때라고 이 책상 앞에서 항상 생각한 바를 정리할 도리가 없습니다. 금년에도 예년같이 온천으로 피신을 하고서, 일 년 동안의 생각을 묶으려 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소득이 있을 런지 의문입니다. 침을 한 망년을 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표기법은 현대식으로 고침, 원문 확인은 한국역사정보 종합씨스템에서 검색할것)

시스템 주소. http.//www.koreanhistory.or.kr.

1927년 7월 5일 <동광>15호에 실린 학범 박승빈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寶性專門學校長. 朴勝彬.

雅號. 學凡. 開國 489년 9월 29일 鐵源 出生.

原籍 京城府. 淸進洞 175. 現 桂洞

父. 農業. 妻. 宋秀卿. 1893년 結婚. 3子1女

1907년 日本 東京 中央大學校 法科 卒業.

1898년 外部 判任官

1908년 平壤 地方法院 檢事.

1909년 辯護士.

1925년 京城 輔成專門學校 校長.

啓明俱樂部 理事.

재단법인 京城 輔成專門學校 理事.

재단법인 0文義塾 理事

재단법인 京城保育院 理事.

京城 辯護士會 常務委員.

京城 救護會 評議員.

著書, <조선어 문법>發布.

中國旅行. 愛讀書 조선어연구서적. 취미 談論. 기호 운동관람.

參考資料. 김효진(1997) 근대 한국의 변호사들.

.김완진(1995) 박승빈 국어연구의 발자취.




朝鮮의 藏書家들

부산대 강명관 교수가 <민족문화사연구> 제9호에 발표한 논문 (조선후기-서적의 수입유통과 장서가의 출현)의 요약본을, 출판저널 제198호(1996년 6월5일)에서 옮긴다.

북경의 유리창이 공급원.

민간 영역의 중국서적 수입이 이루어지기는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반부터의 일이다.

경전 따위의 고전적 저작물이나 실용서는 그 전에도 많이 수입되었지만, 중국 당대의 문인, 지식인들의 저작들은 16세기 말경에 와서야 비로소 조선 지식층의 독서 범위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 문인 진계유(1558~1639)는 당시 조선인의 서적구입 열에 대한 증언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조선인은 책을 가장 좋아한다, 사신의 입공(入貢)은 50인으로 제한되어 있었지만, 옛 책과 새 책 패관소설로, 조선에 없는 것은 날마다 시중에 나가 베껴들고, 만나는 사람마다 두루 물어보고, 비싼 값을 아끼지 않고 구입해 간다. 그래서 조선에 도리어 이서(異書)의 소장본이 있다.”고 하였다.

조선 지식층의 중국 서적에 대한 관심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크게 증폭된다. 임진왜란 후 중국인이 대거 입국해 중국인과 접족할 기회가 많아지고, 그에 따라 중국문단이나 책에 대한 정보를 소상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허균(許筠)의 경우 1614년과 1615년, 두 차례 북경에 갔을 때, 서화를 제외 하고도 4천권의 책을 사왔다.

책은 주로 북경의 거대한 서적시장 이였던 유리창에서 구입하였다. 명나라 말기 이래, 강남지방에서 민간 인쇄업이 비약적으로 발달하였고, 여기서 출판된 책들이 유리창으로 모여 들었던 것이다. 유리창 서점가가 특히 번성하게 된 것은 건륭(1735~1796)때 부터인데, 이 무렵(1766)에 북경에 갔던 실학가 洪大容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서점은 일곱이 있다. 삼면 벽으로 돌아가며 수 십층의 시렁을 달아매고, 상하로 부서별(분야별)표시를 해서 질서 정연하게 진열해 두었는데, 각 권마다 표지가 붙어있다. 한 점포안의 책만도 수 만권이나 되어 고개를 들고 한참 있으면, 책이름을 다 보기도 전에 눈이 먼저 핑 돌아 침침해 진다.

당시 북경에는 서반(序班)이라는 말단 구실아치들이 있어, 이들이 부업으로 서적 중개인 역할을 했다. 그래서 조선 사신들이 책을 사고 싶으면 역관을 통해 이들에게 의뢰 하였다.

한편 국내에서 서적의 유통을 맡은 것은 역관과 書快 라는 서적 중개상 이였다. 역관이 중국에서 책을 수입해 오면 書快 들이 국내 판매를 담당했다. 이들은 또 몰락한 양반집안의 가장(家藏)서적이 시중에 흘러나오면 이를 재차 유통시켰다. 이들이 장서가의 출현에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서울 장안에 서점이 등장한 것 은 18세기 말경부터이다. 19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이르면, 종각과 광퐁교 일대, 그리고 오늘의 세종로와 태평로 일대에 서화와 서적시장이 형성된다. 이렀듯 시정에서 책의 유통이 활발해진 것도 장서가의 출현을 촉진하는 요인 이였다.

19세기 문인 洪漢珠는 어느 글에서, 중국의 이름난 藏書家와 함께 우리나라의 藏書家를 소개하는 가운데, 심상규(沈象葵)1766~1838, 조병귀(趙秉龜)1801~1845, 윤치정, 서유구(徐有榘)등 과 李慶億의 집안을 대표적인 藏書家로 꼽았다. 이 밖에도 서울에서 천권, 만권 정도의 장서가는 일일이 손으로 꼽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들은 모두 18~9세기의 대표적인 京華世族임은 물론이다.

그중 4만권 이상을 소장 했다는 심상규(1766~1724)는 당대의 명문인 청송 심씨로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고, 3~4만권을 소장했던 조병귀(1801~1845)는 풍양 조씨세도의 핵심인물 이였던 조만영(趙萬永)1776~1846의 아들이다. 집안은 조엄~조진관~조만영~조병귀로 이어지는 대표적인 벌열가문이다.

한편 李慶億 가문의 장서란, 실제로는 李夏坤(1677~1724)의 장서를 말한다.

李夏坤은 慶州 李氏로 그의 가계는 李時發(형조판서)~李慶億(좌의정)~李寅燁(이조판서.대제학)~李夏坤으로 이어지는 名文家이다. 이하곤은 1711년 충청도 진천으로 낙향하고, 서재 이름을 <萬卷樓>라고 짓고,“책을 몹시 사랑하며 누가 책을 파는 것을 보면 옷을 벗어서라도 그것을 샀고, 비록 병석에 있을 적에도 하루도 손에서 책이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실학자인 徐有榘(1764~1845)는 達成 徐氏로 헌종 때 이조판서 대제학을 지낸 인물인데, 그의 가계 역시 徐文有~서정옥~徐命膺~徐浩修~徐瀅秀~徐有榘로 이어지는 혁혁한 벌열 가문이다. 서유구의 장서는 그의 아버지 서형수의 장서를 물려받은 것이니, 2대 이상에 걸쳐 형성된 것 이였다. 서형수는 집 뒤에 堂을 지어, 만권의 책을 쌓아놓고 집안의 자제들에게 그곳에 모여 학업을 닦게 했는데, 子孫중에 반드시 學文을 좋아하는 자가 있으라는 뜻에서 당호를 필유당(必有堂)이라 이름 했다.

이 밖에도 이름난 장서가 들이 많았다. 숙종 때 소론의 영수로 여덟 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전주 최씨의 崔錫鼎(1646~1715), 영조 때 이조판서 우의정을 지낸 원주 원씨의 원인손(1821~1874), 순조때 영의정을 지낸 연안 이씨의 李時秀(1745~1821)와, 대제학을 지낸 李萬秀(1752~1820) 형제, 그리고 안동 김씨세도의 중심인물인 金祖淳(1765~1831)의 가문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상의 인물들은 거의 예외 없이 18~19세기의 경화세족으로 권력의 핵심부에 있던 가문 출신들이다.

이들의 장서 취미는 단순히 서적을 모아 쌓아 두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장서를

골동서화와 함께, 그들 특유의 세련된 생활취미와 생활문화로 발전 시켰다는 데에 특징이 있다.

중국 서적의 대량 유입과, 장서가의 출현은 18~19세기의 문학과 학문 전반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소설의 유행과 문체의 변화, 고증학풍의 성립 등은 그 특징적 징후들이다.

이는 나아가 정권과 체제의 안정을 동요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던 것으로 평가 된다. 終.




과시적 컬렉션 문화를 꾸짖은
燕巖 朴趾源.

연암, 평생소원인 중국을 가다. (상투 튼 기자 燕巖 朴趾源: 1737~1805)

18세기 후반 실학자 연암의 <熱河日記>를 읽었다. 책장을 덮었을 때, 이 조선의 선비에게서 기자를 떠 올렸다. 연암선생님은 43세 되시던 1780년(정조4년), 종형님이신 금성위(錦城尉) 朴明源이 청나라 고종(乾隆)황제의 70세를 축하하는 사절로 북경에 갈 때 따라갔다.

그곳에서 당시 약 2개월 동안 보고 들었던 경험을 기록한 기행문이 <열하일기>다.

책은 여정의 구석구석을 기가 막힌 문장으로 전해준다. 마치 다큐메리 작가가 카메라를 들이밀듯 생생하다. 열하일기 국역본은 3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 이였다. 그런데도 읽는 내내 지루하다는 생각이 한 번도 들지 않았다. 그 현장감 있는 묘사에 마치 그 시절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했다.

평생소원이던 중국 출장을 간 기자 연암선생, 그는 튀어 오르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규정을 어기고 밤에 몰래 숙소를 빠져나가 중국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다. 기록 정신은 어떤가?

중국말을 못해 필담을 나누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런 불편함에도 이 부지런 하고 꼼꼼한 실학자는 보고 들은 것을 대강 흘리는 법이 없었다. 우연히 만난 중국인이 내놓은 음식종류까지도 그것이 10가지가 넘어도 일일이 거명하였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였다.

“차려들인 음식은 떡 두 쟁반, 삶은 거위 한 쟁반, 닭찜 세 마리, 신출 과일 세 쟁반, 양배알국 한 자배기, 임안 술 세 병, 계주 술 두 병, 잉어찜 한 마리, 백반 두 마리, 나물 두 쟁반에 값이 열두 냥이라고 한다.” 밥상 하나에 대한 묘사가 이렇게 구체적이다. 다른 것은 오죽 했겠는가?

동영상 카메라를 비추듯 한 리얼리티는 요즈음 기자들처럼 취재수첩에 꼼꼼히 기록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지필묵을 지참하고, 거추장스런 도포 소맷자락을 걷어붙이고, 종이 위에 세필로 빠르게 적어 내려가는 민활한 선비의 모습이 상상된다. 이것이야 말로 기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는 이국적이거나 새로운 것, 조선과는 다른 것 들을 찾아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예리한 더듬이를 내밀었다.

살아있는 듯한 서양화 내 속을 꿰뚫듯.

그렇지 연암선생이 그곳을 무심히 지나칠 리 없었다. 북경의 천주당, 서양에서 전해내려 온 첨단 문화의 상징이다. 조선 사신들이 묵는 옥화관에서 멀지 않아, 중국을 방문하는 사신들에게는 필수 코스이기도 하였다. 서양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건립했다는 성당에는 벽과 천장에 성화가 그려져 있다. 지금까지 한번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의 서양그림을 대하였을 때 받은 감동을, 선생은 아주 정확하게, 그러면서도 신선하게 표현하였다. “천장에 그려진 구름과 인물이 살아있는 듯 너무나 생생해 마치 내 가슴속을 꿰뚫고 들여다보는 것 같았고 내가 숨긴 것을 꿰뚫어 맞힐까봐 부끄러워하였다.”

조선시대 인물화는 세밀 했으나 평면적이었다. 이와는 달리 서양화는 3차원적인 입체감이 특칭이다.

실물을 캔버스위에 그대로 재현하려고 원근법과 음영법이라는 기술을 구사하는 덕분이다.

그림속의 인물이 입체적인 특성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는 것을 당대 최고의 문장가는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숨긴 것을 꿰뚫어 맞힐까봐 부끄러웠다” 서양화 기법의 종교적 그림을 봤을 때의 충격과 감동을 전하는데 이보다 더 멋진 문장을 어디서 찾을 수 있으랴?

그림을 가까이서 보신 선생은 또 한 번 놀라고 만다. ‘가까이 가서 보니 성근 먹이 허술하고 거칠게 묻어 다만 그 귀, 눈, 코, 입의 짬과 터럭과 살결사이를 희미하게 갈라놓았을 뿐이었다.

유화를 가까이서 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성화는 성모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은 장면이 포함 되었던 것 같다.

그림에는 한 여자가 무릎에 대여섯 살 된 어린애를 앉혀두었다. 천장을 바라다본즉 수 없는 어린애들이 오색구름 속에서 뛰어 노는데, 허공에 주렁주렁 매달려 살결은 만지면 따듯할 듯 하고, 팔목이며 종아리는 살이 포동포동 쪘다’라고 연암선생은 적고 있다.

‘살결은 만지면 따듯할 듯 하고’, 나는 이곳을 읽으면서 또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림에서 체온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 그리고 그것을 미사여구가 아닌 따듯하다는 아주 단순한 형용사 하나로 해결해 버리는 대 문장가의 명쾌함에 감탄할 뿐이다.

미술애호가이신 연암선생 박지원

조선 후기의 최고 문장가 연암선생, 그분이 미술 애호가라는 사실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열하일기>의 북경 천주당 성화 감상기만 보더라도 선생의 관심영역은 미술에도 뻗혀 있었고, 깊이도 또한 예사롭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 챌 수 있을 것 이다.

선생이 당대 흐름을 꿰뚫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나온다. 여행 중에 만난 청나라 사람이 조선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모은 화첩을 불쑥 내밀면서, 각각의 그림을 그린 화가들의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청 하였다. 이십 점이 넘었지만 선생은 단박에 가르쳐 주었다. 목록은 <열하일기>열상화보에 나온다.

김식의 한림와우도, 이경윤의 석상분향도, 이정의 녹죽도와 묵죽도, 이징의 노안도, 김명국의 노선결기도, 윤선도의 연강효천도, 임지사자도, 겸재의 산수도수도, 사시도, 대은암도, 조영석의 부장임수도,

심사저의 금상산도, 초충화조도, 이인상의 검선도, 강세황의 난죽도,

18세기를 풍미했던 문인 화가의 계보를 꿰뚫고 계셨던 것이다. 당시에는 화랑도 없었다.

그림 감상이라는 것은 미술을 애호하는 선비들이 몇몇이 모여 소장하는 그림을 함께 보는 식이였다.

웬만큼 그림을 즐겨보지 않았다면 이렇게 줄줄이 꿰지 못하였을 것이다.

선생이 남긴 여러 제발(題跋)도 선생의 서화 완상취미를 입증한다.

선생이 남기신 제발은 모두 7편이라고 미술평론가들의 글속에 나와 있다.

제발은 그림에 써넣는 짤막한 시 형식의 글이다. 작가가 자신이 그린 그림의 배경이나 동기 등을 보충하기 위해 직접 쓰기도 하지만, 감상자가 감상과 품평의 성격을 띤 글을 적기도 한다.

선생이 제발을 남기신 그림은 제이당화, 천산엽기도발, 청명사하도발, 관재가 소장한 청명상하도발,

일수재가 소장한 청명상하도발, 담헌이 소장한 淸明上下圖跋, 제우인국화시축 등 7편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제발 4편을 청명상하도에 할애하셨다.

<청명상하도> 북송 때 장택단 이라는 사람이 그렸다는 이 그림은, 宋代의 격물지치에 따라 사실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한다. 만물이 소생하는 청명(淸明)전날에 宋 時代 변京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서민들의 일상을 파노라마처럼 꼼꼼하게 그렸다.

강(江)가에서 화물을 싣고 내리는 큰 배, 나그네에게 술과 음식을 파는 주점이 나타난다고 한다. 마을 밖에 있던 집은 초가집 이였으나, 마을로 오면서 기와집으로 바뀌는 등, 도시화를 실감하게 하는 아주 긴 두루마리 그림이라 하는데, 내가 본 것은 단편적인 인쇄된 몇 장의 그림뿐이다.

明代에 구영은, 또 이 그림을 당시의 풍경에 맞게 패러디하여서 그렸다고 한다. <청명상하도>는 마치 숨은 그림찿기 그림책을 보는 듯, 볼 때마다 새로운 광경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경제 성장과 함께 도시 문화가 발달 하면서, 중국에서 건너 온 淸明上下圖는 도시의 멋쟁이 들을 사로잡았다. 연암선생 역시 이 그림을 보면서 이런 즐거움을 누렸음을 고백하셨다.

관재(觀齋)서상수가 소장한 <청명상하도발>에서 말하기를 “이 그림은 상고당 김씨(김광수)가 소장했던 것이다. 그는 구십주(仇十州 구영을 말함)의 진품이라고 생각해서 자신이 죽고 난 뒤 같이 묻겠다고 맹세했다. 뒷날 김씨가 병이들자 다시 관재 서씨(서상수)차지가 되었다. 응당 묘품에 속 하니, 비록 세심한 사람이 열 번이나 꼼꼼하게 감상하더라도 번번이 그림을 펼칠 때마다 빠트린 곳을 새로 찾아내곤 한다. 그래서 절대로 오래 보지 못하게 하니, 눈을 버릴까 염려해서였다.”

청명상하도는 지금 13억 중국인으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는 ‘국민서화’가 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이 그림은 사회주의 이념과도 들어맞아 정권차원에서 높이 평가한다고 한다.

수년전 청명상하도가 상해 박물관에서 공개 됐을 때,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들 때문에, 이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4~5시간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였다 한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국민적 사랑을 받는 서화가 없다는 것이 아쉽다고 평론가들은 말한다.

내친김에 연암선생의 미술 애호론에 대해서 알아보자. 연암선생의 말한 바로는 서화애호가에는 수장가와 감상가의 두 부류가 있으니, 연암 선생은 후자에 속 하신다.

“감상할 줄을 모르고 단지 수장만 하는 자는 부유하지만, 그는 그의 귀만 믿는 자이고, 감상은 잘 하되 수장을 못하는 자는 가난하지만, 그 안목을 저버리지 않는 자이다.”

그는 또 당시 조선사회에 수장가는 있으나 그 깊이가 깊지 못하다하면서 부박한 수장문화를 개탄하기 까지 하셨다. 당대 최고의 수장가 김광수도 연암선생의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김씨는 감상에 뛰어났다. 골동과 서화에 아주 잘된 작품을 만나면 문득 가산을 기울이고, 농토와 집을 팔아서 계속 샀다. 그래서 나라 안의 보배로운 물건들은 다 김씨에게 돌아갔으나 집은 나날이 더욱 가

난해져 갔다. 늙어서 말하기를 나는 이미 눈이 어두워졌다. 평생 눈으로 보았던 것이 이제 입에 이바지 할 수 있다. 그러나 판 가격은 십분의 이 삼을 넘지 못했고, 이미 이가 빠져서 이른바 입에 이바지하는 것이 모두 즙과 가루일 뿐이다. 애석한 일이다. 애석한 일이다”

사실 김광수뿐 아니라 이조묵의 경우처럼 그림에 미쳐 가산이 기울 정도로 그림을 사서 모은 수장가들이 있었다. 연암께선 그런 사람들을 한심스럽게 보셨다. 참으로 실학가 다운 반응이시다. 그래서 선생은 깊이를 갖추지 못한 과시적인 수장의 문화에 대해 따끔하게 꼬집으신다.

우리나라에 비록 간혹 수장가가 있기는 하나, 책은 곧 건양의 방각본이고, 서화는 곧 금창의 가짜일 뿐이다. 밤껍데기 빛의 술독에 곰팡이가 피었다고 갈아 버리려 하고, 장경의 종이가 더럽다고 씻어내려 한다. 질 나뿐 엉터리 물건을 만나서는 그 값을 비싸게 하면서도, 보배는 버려서 수장을 못하게 하니 그 또한 슬퍼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수집가로서는 어떤 태도가 바람직할까?

선생은 담헌소장의 <청명상하도발>에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셨다.

“글씨는 어째서 반드시 종요, 왕희지, 안진경, 유공권의 글씨라야 하며, 그림은 하필 고개지, 육탐미, 염립본, 오도현의 그림이라야 하며, 골동품은 하필 선덕, 오금의 정이라야만 할 것인가? 그 진품을 구하기 때문에 온갖 가짜가 나와서 진품에 가까울 수 록 더욱 가짜이다. 융복사와 옥하교에서 손수 그린 서화를 파는 자들이 있으니 잘 되었나 못 되었나는 대략 판단해서 사면된다.

정이는 비록 건륭 년간에 만들어진 것이라도 모양이 반듯하면서 예스럽고 특이하며 돈후한 것을 산다면 아마도 북경시장에서 웃음거리는 되지 않을 것이다.“

저렴한 판화 하나라도 보고 즐길 줄 아는 것, 그것이 연암선생이 생각하시는 진정한 미술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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