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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랑공 배위 졸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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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람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1-07-11 11:29 조회4,617회 댓글0건

본문

※위의 글은 새로운 족보중 정랑공(휘 임종)의 자손록 기록의 번역문입니다.(공지사항에 접속하시면 서포공 족보 교정본 중에 있습니다.)

위의 글을 클릭하시면 자세히 보실수 있습니다.




정랑공 배 윤씨 졸년

<족보기록>

o계해보에 이르기를 야천선생 비문에 공이 등과 한 후 고을을 맡아

어머니를 편하게모시려고 했는데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했으니

선생의 등과는 기묘년(1519) 3월 이었은즉 부인이 몰 한 것은 아마도 마땅히 경신년(庚辰경진년 1520) 정월 이었을 것이니 다시 상고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O병술보에 이르기를 숭효록을 보면 야천선생 가장에 신사년(1520)에 복을 마쳤다라고 했으니 부인의 부인의 졸년은 경진년도 아니고 정월 역시 틀린것 같다 라고 하였다.

<신도비기록>

과거 공부에는 힘을 쓰지 않았으나 재능이 높아서 또한 특출하였으니 무인년(1518년) 가을 향시 삼과에 다 수석으로 합격이 되고 그 이듬해(1519년) 봄에는 사마시에 차석으로 합격되었다. (중약)

그때 공의 이름은 이미 현량과로 추천하는 중에 있는데도 항시(恒試)에 나아가니 식자들은 그를 칭송하였다

그 후에 전서가 되었다가 전중(殿中)으로 옮겨서 홍문관 수찬으로 임명되었다.

공은 이미 등과해서 장차 지방 현령이 되어서 자친(慈親)을 봉양하는데 편의하도록 하려고 하였으나 돌연히 당고(當故)를 해서 그의 본의를 이루지 못하여 그 침통한 애정(哀情)은 몰세까지 이르렀다.

영남에서 운구해서 김포선영하로 반장하고 묘하에 여막을 지어서 내적으로는 그 물(物)을 다하니 향인이 그의 순효(純孝)를 감탄하였다.

삼년상을 마치고

시강원사서로 임명되어 사강원 정언으로

<왕조실록 기록>

중종 35권, 14년(1519 기묘 / 명 정덕(正德) 14년) 3월 20일(계축) 3번째기사

문과의 전시를 출방하였는데, 박소 등 29인을 뽑다

문과(文科)의 전시(殿試)를 출방(出榜)하였는데, 박소(朴紹) 등 29인을 뽑았다.

중종 38권, 15년(1520 경진 / 명 정덕(正德) 15년) 1월 2일(신묘) 2번째기사

성절사 박소가 경사로부터 돌아와서 보고 들은 사건을 아뢰다

성절사(聖節使)9682) 박영(朴英)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왔다. 서장관(書狀官) 박소(朴紹)가 보고들은 사건을 아뢰기를,

“황제가 영왕(寧王)9683) 이 강서(江西)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친정(親征)하겠다고 조서(詔書)를 내렸는데, 태감(太監) 장충(張忠)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영왕을 사로잡고 이 사실을 아뢰었습니다.”

중종 46권, 17년(1522 임오 / 명 가정(嘉靖) 1년) 9월 13일(병진) 6번째기사

신상·강현·박소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신상(申鏛)을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로, 강현(姜顯)을 세자 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司書)로, 박소(朴紹)를 홍문관 부수찬으로 삼았다.

중종 46권, 17년(1522 임오 / 명 가정(嘉靖) 1년) 11월 9일(신해) 5번째기사

허위·한승정·박소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허위(許渭)를 세자 시강원 필선(世子侍講院弼善)으로, 한승정(韓承貞)을 문학(文學)으로, 박소(朴紹)를 홍문관 수찬으로, 원계채(元繼蔡)를 홍문관 부수찬으로 삼았다.

위의 족보기록 문강공의 신도 비문기록 왕조실록 기록을 종합하여 보면

1520년 1월 2일 성절사 서장관으로 북경을 다녀 오신후

1522년 9월13일 문강공께서 홍문관 부수찬이 되실 때 까지 벼슬을 하신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동안은 문강공의 어머니 윤씨께서 돌아가시고 삼년상을 김포 선영에서 시묘를 하시기 위해서 벼슬살이를 안하신것 같다.

그렇다면

족보 계해보의 기록과 같이

정랑공 배위 윤씨께서는 1520년 경진년 정월(正月)에 돌아가신 것으로 보는것이 옳지 않은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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