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랑공(휘 조년) 배위 윤씨의 돌아가신 때
페이지 정보
한가람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1-07-14 14:37 조회4,532회 댓글0건본문
정랑공 배 윤씨의 졸년
O 계해보에 이르기를 야천선생 비문에 공이 등과 한 후 고을을 맡아 편하게 모시려고 했는데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했으니
선생의 등과는 기묘년(1519) 3월 이었은즉 부인이 몰 한 것은 아마도 마땅히 경진년(1520) 正月 이었을 것이니 라고 하였다
O 병술보에 이르기를 숭효록을 보면 야천선생 가장에
신사년(1521) 복을 마쳤다라고 했으니 부인의 졸년은 경진년도 아니고 정월역시 틀린것 같다 라고 하였다.
(위의 두기록은 '경신보'에 기록 되어있음)
조선왕조실록에 문강공(호 야천)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중종14년(기묘 1519) 3월20 일
문과(文科)의 (殿試)를 출방(出榜)하였는데, 박소(朴紹) 등 29인
을 뽑았다 장원
중종14(기묘 1519년) 7월15일 성절사 박영이 표문을 받들고 북경
으로 조회가는데, 표문의 배송 의식을 거행하다
중종15(경지 1520년) 1월 2일 성절사 박소가 경사로부터 돌아와서
보고 들은 사건을 아뢰다
중종17(임오 1522녀) 9월 13일 신상·강현·박소에게 관직을 제수하
다 박소(朴紹)를 홍문관 부수찬으로 삼았다.
위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의하면
1520년 정월부터 1522년 9월까지 2년 8개월간 벼슬을 하신 기록이
없다.
문강공의 신도비 기록
공은 등과(1519년)해서는 장차 지방현령이 되어 자친(慈親)을
봉양(奉養)하는데 편의 하도록 하려고 하였으나 돌연히
당고(當姑)(1520년)를 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여 그
침통한 마음은 한이 없었다. 영남에서 운구를 해서 김포
선형 아래로 반장(返葬)하고 묘하에 노막을 지어서 내적
으로는 그 뜻을 다하고 외적으로는 그 물을 다하니 향인
들은 그의 순효(純孝)를 감탄하였다. 삼년상(중종 17년
1522)을 마치고는 시강원사서로 임명되어 사간원 정언
을 전임
조선왕조실록과 문강공 신도비 기록을 종합하여 정리를 하면 다음과 같다.
기묘년(1519) 3월 과거 장원 급제
7월 성절사 박영(문강공 스승) 서장관 박소 북경으로 가다
경진년(1520) 1월 2일 북경으로부터 귀경후 임금께 보고(報告)
1월 19일 자친(윤씨 부인)돌아가심
신사년(1521) 시묘살이
임오년(1522) 1월 19일 대상(大喪)
9월 13일 홍문관 부수찬으로 임명
조선왕조실록과 문강공 신도비 비문을 종합해 보면
족보의 두가지 기록중
병술보의 숭효록 기록보다는 계해보의 기록이 조선왕조실록과 신도비문 기록과 비슷하고
앞으로 더 정확하고 자세한 기록이 발견되어 정확한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랍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