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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항일정신 재평가되어야 한다[브레이크뉴스-2012-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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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관우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1-27 11:07 조회4,4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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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항일 정신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박관우 국제칼럼니스트
 
박관우 국제칼럼니스트 icon_mail.gif
고종황제는 지금으로부터 160년 전인 1852년에 탄생하여 12세가 되는 1863년 조선왕조 26대왕으로 즉위하고 1897년 10월 12일 원구단에서 대한제국 황제의 위(位)에 오르나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인하여 일제로부터 강제퇴위 당하고 결국 1919년에 덕수궁 함녕전에서 붕어를 하면서 파란만장한 68세의 삶을 마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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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황제   
사실 그동안 고종황제하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극과 극을 이룬 측면이 있다고 볼수 있는데, 필자가 고종황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1992년에 고종황제의 손자를 알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고종황제는 공교롭게도 등극할 때는 조선왕조의 왕이었는데, 붕어할 당시에는 대한제국 황제로서 붕어하였으니, 참으로 특이한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배경을 간략히 소개한다면 1392년 개경 수창궁에서 태조 이성계에 의하여
건국된 조선왕조는 엄밀히 말하여 1897년 고종황제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하면서 그 506년의 장구한 왕조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그 이후부터는 새로운 국호인 대한제국으로 변모하게 되는데, 통탄스럽게도 이러한 대한제국의 역사가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불과 13년 만에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니, 생각할수록 비통한 심정 금할 길이 없다. 그러니 바로 고종황제는 13년밖에 유지가 안된 대한제국 흥망성쇠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며, 한마디로 대한제국을 논하는데 있어서 고종황제가 없는 역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할 정도로 대한제국에서 고종황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가히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태조가 조선왕조를 건국하였듯이 대한제국은 바로 고종황제에 의하여 건국되었기에 고종황제 없는 대한제국은 생각하기 힘든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1897년 10월 12일 현재의 조선호텔이 위치하고 있는 원구단에서 하늘에 제(祭)를 올리고 천자(天子)의 자리에 오른 고종황제가 건국한 대한제국이 왜 불과 13년만에 허무하게 무너졌는지 여기에 대한 철저한 통찰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고종황제의 손자를 알게 된 것이 하나의
동기부여가 되어 그 이후 오랜동안 고종황제를 비롯하여 의친왕, 이우 황손의 삼대에 걸친 황실독립운동에 대한 자료수집을 하였으며, 관련 칼럼들을 인터넷에 올린 바 있다.
 
사실 그동안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병탄된
근본적인 원인이 당시 고종황제를 비롯하여 황실이 무능하였기에 그러한 불행이 생겼다는 시각이 지배적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나 적어도 고종황제가 당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1905년의 을사늑약은 그가 강제퇴위 당하기 2년 전에 있었던 불행한 사건이었는데, 결국 이 늑약으로 인하여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제의 지배에 들어간 것이 되지만,그는 을사늑약에 서명한 적이 없으며, 일제가 이토오 히로부미를 중심으로 고종황제를 위협하면서 강제로 체결된 것이다.
 
고종황제는 을사늑약 당시 극비리에 외국의 왕들에게 이 조약의 부당함을 호소하며 무효로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으며, 이러한 을사늑약 이후 새로운 항일운동을 추진하니 그것은 역사적으로도 잘알려져 있는 1907년의 헤이그 밀사 사건인데, 이러한 사건이 결국은 안타깝게도 수포로 돌아가면서 결국 고종황제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통한의 강제퇴위를 당하게 되며,그야말로 정식 절차도 아니고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순종황제가 등극하게 되는 불행한 사건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러한 통탄스런 사건이 생긴 이후 불과 3년이 지나서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넘어가는 불행한 역사를 맞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고종황제는 강제퇴위된 이후 덕수궁 함녕전에 사실상 유폐되어 고난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일제가 아무리 고종황제를 위협하여도 거기에 굴할 황제가 아니었으니,그것은 일제가 고종황제를 독살하게 된 하나의 계기라고 할 수 있는 중대한 계획을 추진하게 된다. 하나는 북경으로 망명하여 거기에
망명정부를 수립하는 점과 또 다른 하나는 파리강화회의에 의친왕과 하란사를 극비리에 파견하여 일제침략의 부당함을 전세계에 호소하려는 것이었는데,이러한 두가지의 야심찬 계획이 사전에 일제에 발각되면서 일제는 고종황제를 제거하려는 무서운 음모를 꾸미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는 덕수궁 함녕전에서 일제의 사주를 받은 궁중 전의가 독약을 탄 식혜를 마신 이후  통한의 붕어를 하게 되니,그야말로 하늘도 울고 땅도 우는 청천병력같은 사건이 생긴 것이다.

이리하여 대한제국을 건국하면서 이 나라를 다시한번 크게 일으키려는 웅장한 포부를 가졌던 고종황제는 천추(千秋)의 한(恨)을 남기고 68세에 비운의 붕어를 하게 된다. 끝으로 올해로 붕어한지 93주년을 맞게 된 고종황제를 애절한 심정으로 추모하며,
국권회복을 위하여 일제에 끝까지 저항하였던 그의 항일정신(抗日精神)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pgu77@hanmail.net

*필자/박관우 국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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