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과 소현세자의 역사적 교훈 잊지 말자![브레이크뉴스-2012-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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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자호란과 소현세자의 역사적 교훈 잊지 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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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것처럼 역사라는 도도한 물줄기도 잠시도 멈추지 않고 하염없이 흐르고 있다. 세계적인 역사학자인 E.H.Car가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의미심장한 명언을 남긴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필자는 역사란 단지 과거에 있었던 흔적이 아니라 그 역사는 오늘날에도 살아 꿈틀거려서 계속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역사라는 하나의 거울을 통하여 현재의 우리모습을 진단을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진단을 통하여 미래를 전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러한 역사의 교훈을 하나의 구체적인 사건을 들어서 피력하고자 하니, 바로 그것은 17세기 조선왕조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던 병자호란에 대한 부분이다. 그런데 병자호란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소현세자인데, 국제적 이벤트가 많은 2012년이 소현세자가 탄생한지 400주년이 되는 해가 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 나라의 왕세자로서 뒤주 속에서 죽음을 당한 사도세자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거늘, 여기에 못지않게 낯선 이국(異國)땅 심양(瀋陽)에서 8년간 볼모로 있다가 귀국한지 두 달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 소현세자도 참으로 비운의 왕세자라 아니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그동안 알려진 바로는 소현세자가 병으로 급서(急逝)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당시의 여러 정황을 분석하여 볼 때 독살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는 점이며, 그 구체적인 증거가 소현세자의 시신이 검게 타 있었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사약을 받은 이후 나타나는 증상과 비슷하다고 하니 이로 미루어 볼 때 확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독살일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소현세자가 비운의 죽음을 당할 때가 34세라는 젊은 나이였으니, 당시 조선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무척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는데, 이와 관련하여 의친왕의 아들로서 민족의 식이 투철하였던 이우 황손도 올해가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데,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처럼 그도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에서 원폭으로 희생되는 불행을 겪게 되니, 당시 그의 나이도 소현세자와 같은 34세이며 황실의 기둥이라 할 수 있었던 그의 죽음 역시 생각할수록 비통한 심정 금할 수가 없다. 한편 청나라의 선진문물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비교적 개혁적인 성향이 강하였던 소현세자가 왕위를 계승하였다면 당시 조선의 역사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였을 것으로 보기에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생각할수록 아쉬움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소현세자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는 뜻에서 그가 청나라에 8년 동안 볼모로 가게 된 하나의 원인이 되었던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된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기로 하자. 여기서 병자호란을 논하기 전에 하나의 전주곡(前奏曲)이라 할 수 있는 정묘호란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정묘호란은 1627년 당시 청의 전신인 후금(後金)이 조선을 침략한 것이며, 이 때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신하는 그야말로 위기상황이 초래되었으며, 결국은 후금(後金)과 조선이 형제관계가 되면서 후금(後金)의 군사들은 철수하게 된다. 그런데 그로부터 9년 후가 되는 1636년 이러한 후금(後金)이 국호를 청나라로 바꾸면서 스스로 황제국으로 선포하는 큰 변화가 생기며, 자연히 이러한 변화는 조선에도 그 영향을 미치니, 그 핵심은 기존의 형제관계(兄第關係)에서 군신관계(君臣關係)로 격상(格上)하자는 것이며, 이와 더불어 조선이 청나라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청나라의 요구에 대하여 당시 조선의 조정은 청나라의 요구를 수용하자는 주화파(主和派)와 청나라를 공격하자는 척화파(斥和派)의 의견으로 대립하게 되며, 인조는 이러한 상황에서 결국 척화파(斥和派)의 손을 들어주게 되며, 결국 이것이 하나의 불씨가 되어서 드디어 1636년 12월 청나라 태종이 직접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니 바로 이것이 그 비극의 역사인 병자호란의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이후 전광석화(電光石火)같이 조선을 공격하여 압록강을 건넌지 얼마 안되어 한양 근접까지 침공하게 되는 급박한 상황이 되는데, 왕족들은 대부분 강화도로 피신하며, 인조와 소현세자를 비롯한 대신들도 원래는 강화도로 피신하려고 하였으나 청나라 군사들이 그 길목을 차단하여 불가피하게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되는데, 결국 1637년 1월 조선의 국왕이 청나라의 황제앞에서 절을 하는 치욕을 겪게 되었으니 역사는 이를 "삼전도의 치욕" 이라 전한다. 그런데 문제는 왕이 적의 황제에게 절을 하는 것도 엄청난 수치인데, 병자호란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당시 왕세자인 소현세자를 비롯하여 봉림대군이 청나라의 볼모가 되어 심양(瀋陽)으로 끌려 가게 되며, 이와 더불어 수십만의 우리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참담한 비극이 발생하니 필자가 비록 당시의 상황을 목격할 수는 없지만 그 모습을 상상만 해도 참으로 통탄스러운 심정 금할 길이 없다. 결론적으로 병자호란이 경술국치같이 국권(國權)을 잃은 것은 아닐지라도 형식상 국권(國權)은 유지되었을지 모르나, 당시 조선의 임금이 청나라의 황제에게 절을 하며 군신관계(君臣關係)로 맺어진 이후 1897년 10월 12일 고종황제가 원구단에서 대한제국을 반포하기 전까지 260년동안 조선은 청나라의 종속국(從屬國)으로서 살아야 하는 불행을 겪었으니, 소현세자 탄생 400주년을 맞이하면서 두번 다시는 이런 비극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에서라도 소현세자와 병자호란의 역사적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pgu77@hanmail.net *필자 박관우, 국제 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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