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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비사(宮中秘史) - 조선편(朝鮮篇): 정조~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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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서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8 11:25 조회2,8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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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비사(宮中秘史) - 조선편(朝鮮篇): 정조~태종
王子의 亂

때는 태조 5년 병자(丙子=西紀 1,396년) 음 8월 13일이었다. 강씨는 자리에 누워서 한동안 눈을 크게 뜨고 내실를 두루 살펴 보다 허망하게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강씨의 임종을 지켜보다가 강씨의 시체 앞으로 나아가 목을 놓고 운 사람은 부군(夫君)인 태조뿐이었다.
태조는 슬픔을 사민(士民)과 더불어 나누고자 10일간 정무를 중지시킴과 동시에 일반 서민에 대해서는 철시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전국 8도의 사민은 애도(哀悼) 속에 잠겨 있게 되었다. 그리고 또 능지(陵地)를 택하기 위하여 15일이란 시일을 소비하였다. 그 결과 능지로 택해진 곳이 안암동(安岩洞), 행주(幸州), 서부 황화방(皇華坊)이었다.
이 서부 황화방이란 오늘날의 정동(貞洞)을 말함이다. 당시 물망에 오른 땅은 위에 말한 세 개소인데 그중의 안암동 땅은 습해서 버림을 받았고 또 행주 땅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버려졌다. 그래서 황화방이 능지로 결정되었는데 이 땅이 쉽사리 결정된 것은 대궐 측근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강씨의 능지가 대궐 측근으로 확정되자 태조는 그해 9월 9일부터 친히 정능(貞陵) 축조에 정성을 기울였고 또 그해 10월 10일에는 좌정승 조준(左政丞趙浚)과 판중추원사 이근(判中樞院事李懃) 등을 시켜 강씨의 시책(諡冊)을 받들어 신덕왕후(神德王后)란 묘호(廟號)를 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정월 초사흘에는 황화방 북원(皇華坊北原)에다 안장하고 능호를 정릉(貞陵)이라 했다. 정릉동(貞陵洞)이란 동명이 여기에서 생겼고 이를 약하여 정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사대부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도성 안에 능묘(陵墓)를 두는 것은 옛 법을 무시함에서 생겨진 일이다.”
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태조는 강씨의 백골이나마 자기 측근에 두고자 해서 한 일이므로 아무도 이를 탄하지는 못하고 지냈다. 그리고 또 태조는 죽은 강씨의 혼령을 오래도록 위안해 주려고 정릉 안 동쪽 지대에 흥천사(興天寺)라는 원당(願堂)을 지어 주었다.
이 흥천사는 태조 6년 3월 19일에 착공하여 태조가 몸소 공사를 독려하였는데 이것이 준공되기는 그해 10월 28일이었다. 원당이 준공되자 태조는 이 흥천사에다 밭 천결(千結=結은 조세를 계산하기 위한 토지면적의 단위)을 하사하여 절의 유지재산으로 쓰게 하였고
대선사(大禪師) 상총(尙聰)을 두어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당시 이 흥천사는 조계종(曹溪宗)의 본산이 되어 있었다.
제3대 태종(太宗) 8년 5월 24일 태조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태종은 태조가 돌아간 지 아홉 달쯤 되어 당시의 정릉을 동소문(東小門)밖에 있는 사을한리(沙乙閑里)에다 옮겼는데 이 사을한리란 곳은 오늘의 정릉동을 말한다. 정동의 정릉을 사을한리로 옮긴 것은 능묘를 도성 안에 두지 않으려고 한 처사일 것이다.
그런데 제10대 연산군(燕山君) 10년쯤부터는 흥천사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황폐해졌다. 다만 남아 있는 것은 황폐한 건물 사리각(舍利閣)뿐이었다. 그리고 제11대 임금 중종(中宗) 5년 3월 26일에 이르러서는 유생(儒生)들이 작당하여 방화하였기 때문에 황폐된 건물은 말할 것도 없고 사리각 오층탑까지고 재로 변하고 말았다.
부군(夫君)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정릉은 돌보는 사람 없는 쓸쓸한 능묘로 황폐를 면치 못했고 강씨의 원당이며 태조의 원당으로 지어졌던 흥천사도 한줌의 재로 변하고 만 것이다.
때는 태조 7년 무인(戊寅=西紀 1,398년) 가을이었다. 어느 날 정도전은 남은과 만나 네 왕자와 세자 방석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감, 이제는 세자 방석이 고단한 몸이 되었구려.”
“글쎄 말이요. 부왕이 계시기는 하지만 곤전이 계실 때보다는 신변이 고단하실 밖에.”
“그런데 우리는 강비(康妃)의 긴탁을 받고 있으니 세자 방석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하지 않겠소?”
“그럼 최선을 다해야지.”
“무슨 좋은 생각 좀 해 보셨소?”
“내 두뇌는 삼봉의 두뇌처럼 융통성(融通性) 있는 게 못돼서 특별히 좋은 생각이 나질 않소. 어디 삼봉의 얘기나 좀 들어봅시다.”
“낸들 별 수 있겠소? 그저 당하는 대로 당해 보는 것이지. 그런데 요즘 태조께서 몸이 불편하시어 자주 누워 계신 모양인데 이 기회를 이용하여 무슨 장난을 하고 싶소.”
“무슨 장난을?”
“그 장난은 대감의 힘을 꼭 빌려야 할 것이요. 그리고 태조의 병세가 좀 더 악화해야만 할 수 있는 장난이니깐 좀 기다려 보아야 하겠소.”
“지금 당장에 방법을 말할 수 없소?”
“방법만은 말할 수 있죠.”
“어디 들어 봅시다.”
“지금 태조가 누워 계신 모양인데 좀 더 악화되면 나는 대감과
참내하여
피접(避接)요양의 필요를 역설하면서 모든 왕자를 불러들이게 하려오. 나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네 왕자를 도륙할 생각을 갖고 있소. 대감은 나의 이 의견을 어떻게 생각하오?”
“글쎄요, 될 것도 같군요. 그러나 이 소문이 사전에 바깥으로 나가게 되면 우리만 죽고 말 것 같으니 이 일을 절대 비밀에 붙이고 추진시켜야겠소. 그런데 우리 편 사람도 이 일을 알고 있습니까?”
“ 몇 사람은 알고 있소.”
이 음모가 있은 지 단 열흘도 안 돼서 태조의 병세는 심히 위중해져서 정말 피접해서 요양할 정도에 이르렀다. 정도전과 남은은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몇 번이나 참내하여 문병하고 피접의 필요를 진언 하였다. 태조도 이 말에 귀가 솔깃해서 도전의 진언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이때부터 도전과 남은은 힘을 얻게 되어 태조 측근의 중관(내시)에게
“태조의 병환은 피접요양(避接療養)을 해야만 쾌복될 것으로 믿어지니 여러 왕자가 참내하여 이어(移御)하시는 것을 보는 게 도리일 것인즉 중관들은 곧 모든 왕자로 하여금 참내케 하라.
하는 분부를 내렸다.
전 참찬(前參贊) 이무(李茂)란 사람도 역시 정도전의 한파였으나 이무는 정도전의 음모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리 정안대군 방원에게 전부 고자질해 버렸다. 방원은 어느 때고 형님왕자들과 함께 근정문(勤政門) 밖에서 밤을 세우곤 했다. 그의 부인 민씨(후일의 원경왕후)는 자기의 오라버니 민무질(閔無疾)과 의논하고 하인 김소근(金小斤)으로 하여금
“마님께서 별안간 흉통(胸痛), 북통으로 안절부절못하십니다.”
알리게 하였다.
방원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면서 자저(自邸)로 돌아왔다. 방원은 돌아와 보고서야 자기를 부른 이유가 다른 데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방원은 부인 민씨와 민무질을 상대로 한참 동안 밀담(密談)을 주고받다가 벌떡 일어섰다. 민씨는 눈물을 흘리면서
“어디를 가시려 하십니까? 지금 대궐로 가시는 것은 죽으러 가시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옷자락을 잡고 놓지 않았다. 방원은 정색을 하고
“놓으시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오. 어서 놓으시오. 더구나 형님들이 이미 대궐 안에 계신데 내가 어찌 안 가겠소? 첫째 정도전의 흉계를 형님들에게 빨리 알려야 하겠소.”
하며 옷자락을 뿌리치고 나왔다. 그러나 민씨는 대문 밖에까지 쫓아 나와
“신변을 조심하세요. 신변을 제발 조심하세요!”
하고 신신 부탁하였다.
아내의 부탁을 뒤로 하고 집을 나온 정안대군 방원은 나는 듯이 말을 달려 대궐로 들어섰다. 소관(小官) 하나가 궁중에서 나오면서 말했다.
“상감마마의 병환이 몹시 위중하시와 지금 피접을 하시려 하오. 여러 왕자께서는 모두 입시하시라는 분부입니다.”
그런데 전날까지도 궁문에 등불을 매어달아 앞을 밝혔는데 이날 밤에는 궁문에 등불이 없어 어둡기 칠흑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게 웬일일까?”
의심을 품게 되었다. 이때 정안대군은 변소로 가려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본 익안대군 방의, 회안대군 방간, 상당군(上黨君) 이백경(李伯卿)은 정안대군의 뒤를 쫓아오면서
“정안대군! 정안대군! 어찌할 작정이야?”
큰 소리로 외쳤다.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지를 말아요. 이런 경우에 별 묘책이 없어서 크게 걱정이요.”
대답할 뿐이었다.
정안대군은 방의, 방간, 백경과 함께 영추문(迎秋門)으로 나왔다.
“우리 형제들은 말을 광화문(光化門)밖에 세워놓고 천명(天命)을 기다립시다. 그러는 편이 득책일 것 같소이다.”
정원대군이 이같이 말하고 곧 사람을 시켜 정승 조준, 정승 김사형(金士衡) 등을 불러오게 하였다. 공교롭게도 마침 조준은 점쟁이를 상대하여 길흉을 점치고 있었다.
그러나 정안대군의 성화같은 독촉에 하는 수 없이 조준은 갑옷 차림의 병졸들을 이끌고 정안대군 앞으로 나왔다. 이 때 정안대군은 예빈사(禮賓寺) 앞 돌다리를 막게 하고 다만 두어 사람만 거느리고 오도록 명령한 후 조준에게 호령했다.
“공(公)들은 이씨 왕국의 사직을 이대로 버려두고 있을 참이요?”
추상같은 목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조신(趙臣)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들 중에서 조준, 김사형 등은 정당으로 들어가 자기를 잡으려 했다. 이것을 본 정안대군은
(만약 궁중에서 군사를 내놓았을 때 우리 군사가 좀 후퇴하면 저 군사들이 궁중으로 들어오리라.)
생각하고 다시
“우리 형제들도 말을 타고 노상에 서 있는데 대감들은 어찌 정당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으려 하시오?”
하며 앞을 가로막아 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운종가(雲從街)에 주저앉았다. 그들을 운종가에 앉힌 후 정안대군은 백관을 불러들이게 하자, 찬성(贊成) 유만수(柳曼殊)가 그의 아들을 데리고 왔다. 정안대군은 유만수에게 갑옷을 내주어 입게 하고 자기 뒤에 서 있게 하였다. 이를 본 이무는
“안 됩니다. 만수는 방석의 일당입니다.”
귀띔을 했다. 눈치를 챈 만수는 말에서 내려 정안대군의 말굴레를 잡고
“정안대군 저하! 신이 솔직히 아뢰겠사오니 들어주옵소서.”
애걸복걸했으나 정안대군이 못들은 체 해 버리자 김소근은 칼을 번쩍 들어 만수와 그의 아들을 찔러 죽여 버렸다.
정안대군은 친히 무사를 거느리고 정도전 등의 동정을 염탐한 결과 정도전은 이직과 함께 남은의 작은집에서 불을 밝히고 모의에 열중하고 있음을 알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들의 부하는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정안대군이 이숙번(李叔蕃)을 시켜서 불화살 한발을 쏘아 그 집 지붕 위에 떨어뜨리게 하자 불길은 삽시간에 확 피어올랐다. 이를 본 정도전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급히 뛰어나와 이웃에 있는 판봉상(判奉常) 민부(閔富)의 집으로 들어가 은신하려 하였다. 그러나 민부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우리 집에 배불때기 하나가 들어와 숨었소.”
이 말에 대군의 부하들은 떼를 지어 민부의 집으로 들어가 정도전을 끌어내었다. 도전은 피할 도리가 없어 칼을 옆에 끼고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군사들은 기어 나온 도전을 끌어다 대군 앞에 꿇어 앉혔다. 도전은 고개를 들어 대군을 바라보면서
“정안대군 저하! 죽을죄를 범하였소이다. 저하께서 저를 살려 주시면 전심과 전력을 다하여 저하를 돕겠습니다.”
살려 주기를 애걸하였다. 이 말에 대군은 목소리를 높여 호령했다.
“네놈은 이미 왕(王)씨를 배반한 놈인데 이젠 또 이씨를 배반하여 하느냐?”
흥분한 정안은 당장에 칼을 빼어 도전을 죽이고 또 나아가서는 그의 아들 유영(遊泳)까지도 참형(斬刑)하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 남은은 몰래 미륵원(彌勒院) 포막(圃幕)으로 피해 은신하려 했으나 추병(追兵)에게 결국 붙잡혀 죽었고 이직이란 자는 아무 내용도 모르고 도전에게 끌려 왔다가 의외의 봉변을 당하게 되었다고 애걸을 했기 때문에 참형은 받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런데 불은 남은의 집에만 그치지 않고 이웃집에까지 퍼져서 남은의 집 일대가 불바다가 되어 화광이 충천하였다. 궁중에서는 이를 바라보고 소란히 굴면서 활을 쏘았다. 세자 방석의 파당은 이때를 기회로 군사를 내놓으려고 군사로 하여금 세자를 받들고 성상으로 올라가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그 결과 광화문에서부터 남산에 이르기까지 철기(鐵騎)가 자기를 잡고 있어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안대군은 휘하 군사에게 보다 이상의 피를 흘리게 하지 않고 세자 방석을 배경으로 하고 일어났던 정도전 난을 평정하였다.
그런데 태조의 병세는 날로 위중해지기만 해서 결국 청량전(淸凉殿)으로 피접하고 말았다. 태조가 청량전으로 이어(移御)한 지 며칠이 못돼서 좌정승 조준은 여러 중신과 함께 백관을 거느리고 태조 앞으로 나와 정도전, 남은 등이 범한 죄를 상세히 보고함과 동시에 세자를 딴 왕자로 개봉(改封)할 것을 간청하였다.
이때 세자 방석은 태조의 곁에 있었다. 태조는 조준의 간청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경등은 방석을 세자로 봉한데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지 않소? 오늘날 왕자 사이가 불화해진 것이 방석을 세자로 책봉함에서 생긴 것같이 사람들은 말하는 모양인데 경들도 그리 생각하오? 어디 대답 좀 해보오.”
그러나 이 하문에 대하여 아무도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왜들 대답을 하지 않소? 내가 신덕왕후(강씨)를 위해 후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은 아니요. 방석이 막내인데다 사람됨이 될성부르고 또 늙은 내 눈에는 방석이가 귀여워 보이기만 해서 세자로 책봉하였던 것이요. 부왕(父王)으로서 아무나 됨직하고 맘에 드는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는 게 뭣이 잘못이요?”
태조는 이와 같이 말한 후 곁에 있던 세자 방석을 불러 말했다.
“너는 세자의 자리를 내놓고 싶으냐?”
“아바마마의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알았다. 그러면 너 좋을 대로 해라.”
“저는 세자의 자리를 내놓고 싶습니다.”
“그래서 맘이 편해질 것 같으면 그리하는 것이 득책일 것이다.”
태조가 이렇게 말하자 방석은
“저는 아바마마의 마음을 편안히 해드리고 또는 제 마음을 편안케 하기 위하여 깨끗이 세자의 자리를 내놓고 말겠습니다.”
하고 태조의 곁을 물러났다.
방석은 형 방번과 함께 대궐의 서문으로 나와 어디론지 가려 했다. 이 때 방원은 방번에게 말했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아서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다. 두 말 할 것 없다. 가고 싶은 데가 있거든 빨리 가거라.”
방번이 어디론지 가자 도당(都堂=홍문관의 교리 이하 벼슬아치의 총칭)은 그들의 뒤를 쫓아가 중도에서 살해했다. 태조는 방번, 방석이 이렇게 죽은 것을 알고
“이게 누구의 잘못에서 생겨진 것이냐? 이게 아비의 잘못에서 생겨진 것이라면 나도 죽여 달라고 하겠다. 이 원통한 일을 어찌 참고 산단 말이냐? 저 두 애가 불쌍해 어찌 하나? 하늘도 무심하구나!”
하고 목을 놓고 통곡하였다.
그 후 태조는 틈만 있으면 흥천사(興天寺=강씨의 원당)로 거동하여 부처님께 참회를 하고 두 아들의 명복(冥福)을 빌고 지냈다. 그리고 경순공주(慶順公主)는 방번, 방석과 한 가지로 신덕왕후(강씨의 묘호)가 낳은 오직 하나의 따님이었는데 정도전 난에 부군(夫君)인 흥안군(興安君)이 피살되어 어린 과부가 되고 말았다. 어느 날 태조는 경순공주를 찾아가 대성통곡 하면서
“방원이란 놈을 살려 둔단 말이냐? 그놈은 포악한 놈이다. 네 어머니는 그놈 때문에 병들어 죽었고 너의 두 오라비는 그놈에게 참살을 당했다. 그리고 네 신랑마저 그놈 때문에 죽어 네가 어린 과부가 되었구나! 이런 절통한 일이 또 어디 있겠니? 너는 이젠 중(僧)이나 되어 네 몸이나 지키면서 네 남편, 어머니, 두 오라비의 명복이나 빌어다오.”
가위를 들어 공주의 머리를 사정없이 베어 버렸다. 일세의 대영웅도 인생의 무상함을 크게 느꼈던 모양이다.
정안대군 방원이 정도전 난을 평정하자 중외(中外)의 사민은 모두 태조께 정안대군을 세자로 봉해 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그러나 정안대군은 한사코 세자 자리를 둘째형 영안대군에게 돌리려 하였다. 그러나 영안대군은 응하지 않았다.
“당초부터 개국(開國)을 건의한 사람도 방원이고 또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난리를 평정한 사람도 방원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나는 세자 됨에 족한 공이 없다.”
그래도 방원이 듣지 않고 여전히 고집을 부리자 영안대군은 정안대군에게 다음과 같이 언질을 준 후에 세자의 자리에 임했다.
“그러면 내가 어느 시기까지 세자의 자리를 맡아 가지고 있기로 하자. 시기가 오면 너에게 전하겠다.”
동년 9월, 태조는 임금의 자리를 세자 영안대군에게 전하였으니 이분이 바로 정종(定宗)이었다.

咸興差使
정종(定宗)이 임금의 자리에 나아가자 방원은 동궁으로 책립되었다.
정종의 비(妃) 김씨는 왕자의 난을 생각해서 항상 정종에게 간청했다.
“상감마마, 동궁의 눈을 조심해 보시옵소서. 입궐할 때마다 그 기색이 무엇을 구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루 바삐 임금의 자리를 내주시어 그 마음을 편케 하소서.”
그리하여 정종은 마침내 임금의 자리를 방원에게 내주고 말았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방원의 야심이 어떠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방원은 결국 경북궁에서 왕위(王位)에 오르게 되니 이가 바로 이조 제 3대 임금 태종(太宗)이다.
태종은 임금으로 있었음이 2년에 불과한 정종을 추존(追尊)하여 상왕(上王)으로 태조를 추존하여 태상왕(太上王)으로 모시었다. 그러나 태조는 태종의 소행을 생각하고 내주어야 할 대보(大寶=옥새)를 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신하들은 모두 다 이를 걱정하고 있었다.
태조는 사실 두 왕자를 잃은 후부터 마음에 상처가 생겨 태종을 사갈(蛇蝎)과 같이 미워하였다. 이와 같이 미워한 나머지 태상왕의 자리를 헌신짝같이 내버리고 함흥으로 가 버렸다. 태종은 부왕 태조가 함흥으로 물러간 후부터 이것, 저것이 걱정되어 자주 중사(中使)를 보내어 문안을 하곤 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문안사를 보기만 하면 태종이 더욱 미워졌다. 따라서 문안사를 화살의 세례만 받고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말았다. 태종의 문안사는 가기만 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나가서 안 돌아오는 사람이 있게 되면 함흥차사(咸興差使)가 됐나보다 하고 농담을 하였는데 오늘에도 이 말이 전해지고 있다.
당시 사람으로 성석린(成石璘)은 태조의 옛날 친구였다. 그는 태종에게 나아가
“신이 태조의 행재소(行在所)로 가 인륜의 도를 역설하여 태조의 마음을 돌리도록 하겠나이다.”
하고 가기를 자청하였다. 그리하여 석린은 나그네처럼 몸차림을 한 후 백마를 타고 나섰다. 그는 거의 목적지에 도달하자 말에서 내린 후 불을 피우면서 밥 짓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태조는 이를 바로보고 중관(中官=내시)으로 하여금 가보게 하였다.
중관이 석린을 찾아보고 말을 걸었다.
“뭣을 하시는 것이요?”
“나는 무슨 볼일이 생겨 여행을 하는 도중인데 날이 저물어 말에게 먹이를 주고 여기서 하룻밤을 세우려 하는 것이요.”
석린의 대답을 듣자 중관은 더 이상 묻지를 않고 돌아와 그대로 태조께 고하였다.
태조는 이 말을 듣고 만면에 희색을 띠우고
“알겠다. 그 사람을 불러오라.”
또 중관을 보냈다.
그리하여 석린은 중관의 인도를 받고 태조를 만나게 되었다. 태조를 만나게 된 석린은 인륜의 도를 들어가며 태조께 간하였다. 태조는 이 말을 듣기 무섭게 얼굴빛을 고치고 고함을 쳤다.
“그대는 누구를 위해서 하는 말인가? 그대의 임금을 위해 하는 말은 듣기도 싫다. 물러가라!”
석린이 여전히 말을 이어
“신이 참말로 지금의 주상(主上)을 위해서만 하는 말일 것 같으면 신의 자손이 꼭 실명하여 장님이 될 것이올시다.”
맹세까지 하였지만 태조는 결국 석린의 말도 듣지 않았다.
태조가 서울을 떠나 울화를 소산(消散)시키고 있던 곳은 태조의 구저(舊邸)로 여기서 몇 해를 보내자 태종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신하들도 황송한 생각을 억제할 수 없었다.
“상감마마! 무학상인(無學上人)은 부왕 태조와 친교가 있던 사람입니다. 태조께서는 일찍이 무학상인을 스승으로 모신 일도 있었으니 이 무학상인을 문안사로 보내셔서 선처케 하시면 태조께서도 응하실 것 같습니다.”
한 신하가 간곡히 태종에게 간하자 태종은 특사(特使)를 보내 무학상인을 불렀다. 무학은 태종 앞으로 나와 태조에 대한 얘기를 들은 다음 태종에게 말했다.
“상감마마, 부자 사이에 어디 이런 일이 또 있겠습니까? 저 같은 몸이 무슨 능력이 있어 태조로 하여금 회가(回駕)하시게 한단 말입니까? 그런 말씀은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태종의 태도가 더욱 친절하고 더욱 공손해지자 수월치 않은 무학이었지만 불응으로만 고집할 수 없어 마침내 태종의 청을 받아가지고 함흥으로 갔다. 함흥에 도착한 무학은 태조에게로 나아가 내함(來咸)의 인사를 올렸다. 무학의 인사를 받은 후
“무학상인이 여기까지 찾아왔느니 웬일일까? 상인도 누구를 위해 온 것이 아닐까?”
태조가 이렇게 묻자 상인은 파안일소(破顔一笑)하면서 그럴 듯이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소승이 상감마마와 친교를 맺은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소승이 지금 온 것은 옛날을 회상하고 하루만이라도 더 마마의 얘기 벗이 되고 싶어서 온 것이올시다.”
태조는 이 말을 듣고야 안심을 하고 자기 방에서 자도록 하였다. 무학은 태조 방에서 유숙하는 동안 한 번도 태조의 잘못을 들어 말한 일이 없이 태연스럽게 수십 일을 지냈다. 태조는 무학과 태종과의 사이에 무슨 일이 없다고 생각하자 무학을 더욱 신뢰하고 지냈다. 그러자 무학은 어느 날 밤중에 기회를 타서 태조에게 간곡히 진언하였다.
“마마께서는 왜 여기에 와서 계십니까? 태종은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태종도 마마의 귀여운 아드님이 아닙니까? 매우 어려운 말씀이오나 보위(寶位)를 맡길 만한 아드님이 이 아드님밖엔 없지 않습니까? 만약 이 아드님을 그렇게 대접하신다면 마마의 일평생 고심해 이룬 대업을 누구에게 맡기려 하십니까? 딴 사람에 이를 맡기시는 것보다 마마의 혈육에게 맡기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오늘날 천하가 좀 안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안에 있어서는 건국의 중신이 없어지고 밖에 있어서는 실의(失意)한 자들이 칼을 갈고 있지 않습니까? 마마! 십분 생각하시어 행하십시오.”
그제야 태조는 이 말을 그럴듯하게 듣고 대답했다.
“말인즉 옳소, 옳아. 어디 생각 좀 더해보고.”
“그러시면 심사숙려하시고 하루 바삐 환궁하시기로 하십시오.”
무학은 때를 놓치지 않고 권고를 거듭했다. 태조가 함흥에서 환궁하기로 되자 태종은 성밖으로 나아가 맞이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궁중은 장악을 준비하기에 바빴다. 이때 하륜(河崙) 등 여러 사람은 태종께 간곡히 권고했다.
“태상왕의 노여움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을 처리하는 데는 어느 때나 원려(遠慮)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차일(遮日)의 고주(高住)는 꼭 아름드리 대목을 쓰셔야 합니다.
태종도 이 말을 듣고 열 아름이나 되는 대목을 써서 고주를 세웠다.
태조는 차일이 쳐진 곳을 바라보기가 무섭게 숨어있던 분노가 얼굴에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지니고 있던 강궁 백우전(强弓白羽箭)을 꺼내어 태종을 목표로 한 대를 쏘았다. 이때 태종은 당황하여 얼떨결에 고주 뒤로 은신하자 화살은 고주에 박혀버렸다. 이를 본 태조는 어이가 없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할 수 없다. 하늘이 이렇게 만드는 것 같다.”
태조는 가지고 있던 국보(國寶=옥새)를 태종에게 던져 주었다.
“네가 원하는 것이 이것이 아니냐? 당장 이것을 가지고 가거라.”
태종은 눈물을 머금고 나와 옥새를 받은 후 뒤를 이어 대연(大宴)을 베풀었다. 잔치 도중 태종이 태조의 만수무강(萬壽無疆)을 비는 뜻에서 잔을 올리려 할 때 하륜은 역시 태종에게로 나아가 진언했다.
“상감마마, 상감께서는 술통이 있는 곳으로 가셔서 잔에 술만 따라 놓으시고 이를 중관에게 주어서 올리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서 태종은 그의 말대로 중관으로 하여금 술잔을 들어 태조에게 권하게 하였다. 태조는 그 술을 받아서 다 마신 후 웃음을 띠우고 소매에서 철여의(鐵如意)를 꺼내 놓고
“할 수 없다. 하늘이 시키는 모양이다.”
탄식만 연발하고 말았다.
그런데 무엇이 일대의 영걸 태조로 하여금 서복(庶腹)의 말자(末子)를 세자로 책봉케 했으며 또 유공한 왕자였던 태종을 백우전으로 또는 철여의로 죽여 없애려 하였던가? 이는 다름이 아니었다. 애처(후일의 신덕왕후)에 대한 편애(偏愛), 말자 방석에 대한 편애가 태조로 하여금 현명치 못한 행위를 감행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태종에게 개죽음을 하고만 정도전과 남은의 약전(略傳)을 간단히 써서 그 인물됨을 알아보기로 하자.

정도전義 약전
정도전은 봉화(奉化)사람으로 고려 공민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일찍이 목은(牧隱) 문하에서 수업하여 문학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우왕(禑王) 때에 설화(舌禍)에 걸려 회령(會寧)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특사를 받고 돌아와 삼각산 밑에 집을 짓도 살며 이 때 호를 삼봉(三峰)이라 자칭했다.
임신(壬申)에 이르러 이조 개국에 큰 공을 세웠으므로 봉화백(奉化伯)이란 작호를 받았고 동시에 한양(서울)으로 자택을 옮겼다.
태조는 어느 때 도전에게
“과인에게 오늘이 있게 된 것은 모두 경(卿)의 공이요.”
하며 도전을 찬하였다. 그러다가 방석, 방번의 난이 있을 때에 도전은 선두에서 일했으므로 정안대군 방원에게 붙잡혀 자기는 물론 아들 유영(遊泳)도 참살을 당하였다.
도전의 저서(著書)로 삼봉집(三峰集)이란 책이 전해지는데 이것은 심(心), 리(理), 기(氣)에 대하여 연구한 것 3편이었다. 이외에 경제문감(經濟文鑑), 경국전(經國典) 등이 세상에 전해졌다.
그의 슬하에는 네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 진(津)은 판사(判事)로 있었고 그의 아들 문형(文炯)은 문과에 급제하여 연산주 시절에 우의정(右議政)이 되었고 중종(中宗)이 반정하자 벼슬이 영부사(領府事)가 되었는데 시호(諡號)를 양경(良敬)이라 불렀다.


南誾의 略傳
남은(南誾)은 영의정(領議政) 남재(南在)의 아우로 사람됨이 호매(豪邁)하고 기계(奇計)를 좋아하였다. 우왕 때에 왜구가 삼척(三陟)을 쳐들어오자 남은은 자진하여 삼척으로 가서 군사를 모집하여 왜적을 도륙하였다. 그리고 태조를 따라 위화도(威化島)로 갔다가 회군책(回軍策)을 올렸다.
이 공으로 밀직부사(密直副使=고려때의 밀직부사란 마을의 두 번째 어른)가 되었으며 태조가 개국함에 이르러 일등공신으로 뽑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한때 태조는 여러 신하에게 대하여
“과인에게 남은과 조인옥(趙仁沃)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대업이 성취되지 못했을 것이다.”
고 말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무인년(戊寅年) 곧 태조 7년에 도전과 함께 세자 방석을 도우려 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방원에게 참살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후에 세종이
“남은에게 죄가 없지는 않으나 그래도 큰 공이 있는 사람이다.”
하여 그에게 강무(剛武)란 시호를 내리고 또 태조묘(太祖廟)에 배식(配食)케 하였다.
태조는 고려조에 대신하여 왕위에 오른 후부터는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그 걱정이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후예가 무슨 일을 일으켜 다시 고려를 세우려 할 것 같아서였다. 그리하여 태조는 즉위한지 3년쯤 되어서 고려 태조의 후예로 거물급(巨物級)에 속하는 사람들을 아무 죄 없이 무인도로 추방하려 했다.
이때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은 그 거물급 왕씨 왕강(王康), 왕승보(王承寶), 왕승귀(王承貴), 왕융들을 섬으로 추방하는 것에 대하여
“주상전하(主上殿下)! 상감께서 이 사람들을 지나치게 사랑하시고 지나치게 후히 대접하시지만 저들은 상감의 애호와 후대를 은혜로 생각하고 있지 않음을 살피셔야 하겠습니다. 그 중의 강은 지모(智謀)가 백사람 천사람에 뛰어나는 인물이고, 또 그 중에 승보, 승귀는 용기와 담력이 만인에 뛰어나는 인물입니다. 이들이 서울에 있게 되면 반드시 무슨 일을 저질러서 나라를 위태롭게 할 것입니다.”
하고 진언하였다.
“오늘날 왕조의 여족(餘族)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반드시 후환이 있게 될 것이다. 이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는 다 죽여 없애는 것이 득책일 것이다.”
이런 결과로 나라에서는 사람을 마음대로 죽일 수 없으므로 헤엄에도 익숙하고 또 배도 잘 다루는 사람들을 뽑아서 그들에게 왕씨들을 꼬여내게 하였다. 그래서 이자들은 여러 왕씨에게
“상감마마께서 왕성(王姓)을 가진 어른을 모두 섬으로 옮겨가 사시게 하기 위하여 저희들을 출동시켰습니다. 별 생각 마시고 배를 타 주시면 적당한 섬으로 모시겠습니다.”
이런 권고에 왕씨들은 살 곳이 생긴 것으로 생각하고 기쁨에 넘쳐 앞을 다투어서 배를 탔다. 그러나 배가 중양(中洋)에도 채 못 이르러 선주에 있던 선인(船人)들은 배 밑을 뚫어 놓은 후 슬그머니 해저(海底)로 들어갔다. 그러자 해수가 배 안으로 들어와 당장 바다 속으로 침몰하게 되었다. 이때 왕씨와 사귐이 있던 어느 승(僧)이 해안(海岸)에서 바라보고 있다가 큰 소리를 내어 안타까이 부르짖었다.
“여러 왕씨 어른들! 배가 당장 바다 속으로 침몰하게 되었소. 당장 어복(漁服)에 장사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왕씨들은 당초부터 헤엄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으므로 그저 죽는 시간만 기다리면서 승의 부르짖음에 답하여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一聲柔櫓滄波外
어느덧 놋소리 나더니 배 창파 밖으로 왔네
縱有山僧奈爾阿
산승이 있은들 어찌하리!
승은 그들이 불쌍해 통곡을 하며 돌아 갔다.
그런데 왕씨가 바다에 침몰되었을 때 태조는 꿈을 꾸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칠장지복(七章之服=王侯의 禮服)을 입고 나타나
“네가 삼한(三韓)을 통합하였는데 그 공은 이 백성들에게 있다. 네가 만약 나의 자손을 도륙할 것 같으면 오래지 않아서 그 앙화를 받고야 말 것이니 너는 이를 명심해 두어라.”
태조는 이 말에 놀라 왕씨 처치의 생각을 고쳐 갖기로 하였다. 그리고 태종조(太宗朝)에 이르러서도 왕건의 후예로 민간에 숨어 있는 자가 있었다. 이때 이조의 대간(臺諫=사헌부, 사간원)은 태종께
“이자를 죽여 없애야 합니다.”
하고 극간하였지만 태종은 다음과 같은 교지(敎旨)를 내렸다.
“제왕으로 나서게 되는 것은 오로지 천명에 의한 것이다. 왕씨의 후예를 도륙한다는 것은 태조의 본의가 아니었다. 이 뜻을 받들어 왕씨의 후예로 생존해 있는 자를 안심하고 생업에 힘쓰게 하라.”
고려의 종실(宗室)인 왕휴의 서자(庶子)는 민간에 살고 있었다. 이를 듣게 된 지신사(知申事) 김여지(金汝知)는 사실을 밝히려고 문초하였는데 항간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태종은
“부왕(父王) 태조께서 개국하실 때에 왕씨가 살게 되지 못할 것이란 말은 태조께서 말씀한 것이 아니다. 실상은 한두 대신들이 만들어낸 말이다. 옛날부터 역성수명(易姓受命)한 제왕 중에는 전조의 후예를 봉하여 작호를 주기도 하고 혹은 고관을 주어 그의 어진 점을 길이 전하게 하였다. 다시 말하면 역성수명자로서 전조의 후예를 전부 도륙한 일이란 일찍이 업었다. 대간이 죽여 없애라는데 대해서 과인은 다시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옛날부터 제왕이 일성(一姓)으로 천지와 더불어 종시한 일은 없다. 오늘의 이씨(李氏)가 인정(仁政)으로서 백성에 임하면 백 왕씨(百王氏)가 있을지라도 걱정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악정으로서 임하면 왕씨가 아닐지라도 따로 수명자가 생겨 나라가 위태해질 것이 아니냐?”
하고 다음과 같은 하교(下敎)를 내렸다.
“금후 왕씨의 후예로서 자수를 하거나 또는 사람의 고발에 의해서 알려진 자가 있으면 그들의 말을 듣고 살기 편한 데에 거주케 하며 동시에 생업에 전념케 하라.”
그리고 태종은 또 다시 말을 이어
“자고로 처음 왕업을 이룩한 자는 전조의 후예가 무슨 일을 저지를까 걱정하고 여러 가지로 의심을 품고 전조의 후예를 모두다 전제(剪除)하려 하였다. 그러나 과인은 그런 생각은 갖지 않고 있다. 천명에 의하여 한 나라의 임금이 된 과인은 이 강토 안에 있는 자를 모두다 과인의 적자(適子)로 보며 동시에 일시동인(一視同仁)하여 천의에 보답하려 한다. 이미 공양왕(恭讓王)으로 하여금 자기 마음대로 편안한 데서 살게 하여 처자와 비복(婢僕)이 여전히 한군데에 모여 단란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다만 그 족속이 섬으로 들어가 고생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이를 불문에 붙일 수 없다. 저 거제도(巨濟島)에 있는 자들을 육지로 나오게 하여 각 군 각 주에서 살게 하고 또 재간이 있는 자는 잘 선발하여 이를 나라에 알리라.”
그리하여 왕씨로서 거제도에 있던 자는 완산(完山)으로 상주(尙州)로 또는 영주(寧州)로 가 살게 되었고 또 왕강, 왕승보가 불러오게 되었다. 이런 것으로 생각하면 태조의 왕업이 정안대군 방원, 즉 태종에 의하여 대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忠臣列傳
杜門洞 사람들 1-40
고려의 멸망과 더불어 이성계가 왕위에 나아가 천하가 이성계에게 돌아가고 말자 우국지정(憂國之情)에 잠겨 지내던 고려 유신(高麗 遺臣)들은 이성계의 신하가 되는 것을 욕스러이 생각하고 산중으로 벽강궁촌으로 두문동(杜門洞)으로 혹은 섬으로 들어가 고절(孤節)을 지키다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여기에 언급된 사람들은 여조말의 수절한 충신임을 말하여 둔다.
1. 李 穡 (號는 牧隱)
이색(李穡)의 자(字)는 영숙(潁叔)으로 한산(韓山)사람이다. 찬성사(贊成事) 곡(穀)의 아들로 사람됨이 총명한데다 범인과 다른 점이 있어 글만 읽으면 그대로 낭송(朗誦)하였다. 원(元)나라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으로 다섯 해나 보내다가 어머니의 노환으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고려 공민왕 계사(癸巳)년에 대과(大科)에 등제하여 벼슬이 삼중대광 시중한산백(三重大匡侍中韓山伯)에 이르렀다. 공민왕 기사(己巳)에 장단으로 가 귀양살이를 했고 경오(庚午)년 5월에는 청주옥(淸州獄)으로 들어갔으며 임신(壬申)년에는 금양(衿陽)으로 끌려갔다가 여흥(驪興)으로 옮겨졌고 또 이조 개국 후에는 장흥벽사(長興碧沙)로 끌려갔다가 그해 겨울에 나왔다. 이와 같이 귀양살이와 옥중생활로 세월을 보내다가 풀린지 얼마 못되어 병자(丙子)에 이르러 청심루(淸心樓) 아래의 연자탄(燕子灘)에서 서거하고 말았다.
색이 불귀의 객이 되자 이조에서도 그에게 한산군이란 작호와 문정공(文靖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어느 때 길재(吉再)는 색에게
“어떻게 거취(去就)를 취하는 게 좋겠느냐?”
고 물은 일이 있었다. 이때 색은
“그것은 제각기 자기들의 뜻대로 할 것이다. 우리들은 대신의 지위에 있으니 나라와 한 가지로 흥하든 망하든 할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뜻대로 할 수 있으니까 그대의 자유에 맡긴다.”
라고 대답하였다 한다.
공양왕 때에 색은 소명(召命)에 의하여 적소(適所)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환경(還京)한 그가 이성계를 잠저(潛邸=임금 되기 전에 살던 집)에서 만나자 성계는 기쁨에 넘쳐 상좌에 그를 앉히고 꿇어앉아 권주(勸酒)를 하였다.
색은 한잔도 사양하지 않고 양껏 마시고 돌아갔다. 색은 가끔 성계와 만나고 성계는 언제나 중문까지 배웅하곤 했다. 그는 종학(種學)이란 아들과 종덕이란 두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다 문과에 급제하고 높은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나라가 성계에게로 돌아가자 그들은 여전히 한 마음을 갖고 버티다가 마침내 장독(杖毒)으로 죽고 말았다.
색은 한때는 여주 농막으로 내려가 한운(閑雲)과 야학(野鶴)을 벗 삼고 지냈다. 어느 날 문생(門生)이 찾아오자 그는 문생을 데리고 심산궁곡으로 끌고 들어갔다. 곡절을 모르는 문생은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색은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곳에 이르자 문생이 곁에 있는 것을 문제 삼지 않고 온 종일 계속하여 방성통곡(放聲痛哭)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실컷 울고 나더니
“인제야 막혔던 가슴 속이 뚫어진 것 같구나. 좀 살 것 같다.”
하고 문생과 함께 다시 돌아왔다. 색이 이렇게 방성통곡하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고 두 아들이 이조에 항복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일이 있은 후 곧 임신(壬申)년부터 을해년에 이르기까지 색은 한산(韓山)으로 여주(驪州)로, 오대산(五臺山)으로 드나들면서 여생을 보냈다. 태조는 그를 옛날 친구로 또는 옛날의 스승으로 대접하고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하였다. 병자년(丙子年) 5월, 색은 여주로 내려가 피서(避暑)할 것을 간청하고 배에 오른 지 얼마 안되어 돌연 폭사(暴死)하고 말았다. 나중에 태조가 이 소식을 듣자 놀래고 의심한 끝에 당시의 안찰사(按察使)를 죽여 없애고 분을 풀었다.
<<附記=고려 말년의 수절 제신 가운데 제일인자로 손꼽는 포은 정몽주(圃隱鄭夢周)는 이미 기술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2. 吉 再 (號는 冶隱)
길재(吉再)의 자(字)는 재부(再父), 해평사람이다. 아버지 원진(元進)이 지금주사(知錦州事)로 있다가 보성대판(寶城大判)이 되자 어머니 김씨가 따라가게 되었는데 수입이 적은 탓으로 길재를 데리고 가지 못했다. 그때 나이는 8세, 어머니를 생각하고 어느 때나 울고 지내던 중 남계(南溪)란 곳에서 놀게 된 일이 있었다. 이때 그는 석별(石鱉)을 발견하고
“자라야! 자라야! 너는 어머니와 헤어졌니. 나도 역시 어머니와 헤어졌단다. 내 너를 삶아 먹고 싶지만 네 신세가 나와 다름없어 너를 놓아 준다.”
노래를 지어 부르며 자라를 도로 물 속에 놓아 주었다. 이 노래가 이웃에 전해지자 이웃 사람들은 그를 안고 눈물을 머금었다 한다.
계해년(癸亥年)에 이르러 사마(司馬=진사)가 되고 병인년(丙寅年)에는 대과(大科)에 급제하였으며 기사년(己巳年)에 문하주서(門下注書=의정부 주서로 정7품 벼슬)가 되었다가 공양왕이 임금이 되자 벼슬을 내놓고 선주(善州=선산)로 돌아와 그 어머니 봉양에 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출천의 효자로 칭송하였다.
이조 태종이 잠저(潛邸)에 기거하면서 서당에 들어와 독서할 때에 길재는 서당 근처에 살고 있었으므로 서로 상종하게 되어 그 교의가 남달리 두터웠다. 방원이 세자로 있을 때 서연관(書筵官)을 상대로 이름이 드러나 있지 않은 선비들을 들어 말하게 되자 세자는
“길재는 강직한 사람이다. 내가 일찍이 길재와 동학하였는데 못 본지가 오래다.”
하고 말했다. 길재와 동관인(同寬人) 정자(正字=정9품벼슬) 전가식(田可植)은 길재의 효행에 대하여 상세하게 얘기하니 방원은 가식의 말을 듣고 감격해 마지않았다.
어느 날 그의 아버지 원진이 서울로 가 벼슬살이를 할 때 노(盧)란 성을 가진 여인 하나를 얻어 제2부인을 삼고 지냈다. 이를 알게 된 길재의 생모(生母)는 어느 때나 원진을 보기만 하면 그 일에 대해 큰 소리를 내므로 집안이 불안했다. 길재는 이를 방관만 할 수 없어
“어머님! 아내로서 남편에 대한 도의, 아들로서 어버이에 대한 도의에 설사 불의한 일이 있을 지라도 불의한 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인륜의 변은 성인이라는 사람에게도 있는 것이오니 이를 살피시고 어머님은 어머님으로서의 도의만 지키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의 어머니도 이 말을 듣고 감동하여 다시 입을 연 일이 없었다. 그리고 또 어느 때 자기 어머니에게
“어머님! 아버님을 좀 가 뵈야 하겠습니다. 아버님이 계신데도 불구하고 안가 뵈옵는 것은 자식된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하고 서울(당시의 서울은 개성)로 올라갔다. 그는 서울 서모(庶母) 집에 있을 동안 무슨 거친 말을 듣게 되면 어느 때나 더욱 공손히 더욱 대하였다. 노씨 부인은 친어머니가 아니었지만 그의 마음씨에 감동하여 그를 친아들같이 사랑하였다.
길재가 선산으로 돌아와 있는 동안에도 세월은 여전히 흐르고 흘러 그의 어머니 나이 육십에 귀가 달리게 되었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문안하는 것을 궐한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어머니의 이부자리를 친히 펴고 걷고 하며 지냈다. 아내나 혹은 딸자식이 자기 어머니의 이부자리에 손을 대려 하면 만류하면서
“너희들은 손댈 것 없다. 어머님이 이젠 아주 늙으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내가 하겠다.”
하고 타일렀다.
그가 이와 같은 효자였으므로 그의 아내 신씨(申氏)도 그를 배워 늙은 시어머니를 알뜰하게 공경했다. 방원이 그의 효행에 감동하여 정종께 이를 알려 봉상박사(奉常博士)를 제수케 하였다. 길재는 대궐로 나아가지 않고 사은(謝恩)한 후 다시 방원에게 다음과 같은 요령의 글을 올려 징소(徵召)엔 불응하였다.
<일찍이 저하(邸下)를 모시고 반궁(伴宮=성균관 혹은 문묘)에서 두 번이나 글을 읽은 일이 있사온 바 이것이 인연이 되어 오늘날 부르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감사하고 황공합니다. 그러하오나 등과 후 두 번이나 신조(辛朝)로 나아가 벼슬살이를 하다가 왕씨가 복위(復位)하자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옛날을 생각하시고 불러 주시니 감사함을 형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하오나 올라가 배알(拜謁)은 하겠지만 벼슬살이만은 신의 원하는바 아니 오니 이를 살펴주옵소서.>
이글에 대하여 방원은
<그대의 말은 강상불역지도(綱常不易之道)로 생각하오. 따라서 그대의 뜻을 뺏을 수는 없지만 그대를 부른 사람은 나이고 그대에게 벼슬을 내릴 사람은 상감마마인즉 상감마마께 이를 아뢰는 것이 좋은 것 같소.>
하는 내용의 대답을 보냈다.
이 대답에 접한 길재는 정종께 다음과 같은 내용의 상소(上疏)를 하였다.
<신은 본래 한미(寒微)한 가문의 소생으로 신조(辛朝)에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어 문하주서(門下注書)로 있었습니다. 신은 듣건대 계집은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합니다. 그리하여 신은 향리로 돌아와 늙은 어미나 잘 봉양하면서 여년(餘年)을 보내려 하는 것이올시다. 상감마마께서는 이를 굽어 살피시고 신으로 하여금 여생을 향리에서 보내게 하소서.>
정종은 이 말을 듣고 그의 절의에 감동하여 특별히 우대를 하고 그 가문의 명예를 보전케 하였다.
그 후 태종임금이 자리를 세종(世宗)에게 내주고 자신은 상왕(上王)이 되었을 때 세종에게
“길재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의사이다. 듣건대 길재에게 아들이 있다 하니 마땅히 불러서 적당한 직에 있게 하고 동시에 그 집에 충신문(忠臣門)을 세워 주게 하라.”
는 하교(下敎)를 내렸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 사순(師舜)이 불려 들어가 종묘부승(宗廟副丞)이 되었다. 또 질재가 육십칠 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는 미두(米豆)와 장군(葬軍)을 내렸고 나아가서는 그에게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란 명예직을 주었다. 그리고 구정 남재(龜亭南在)는 다음과 같은 시를 바쳐서 그의 절의를 찬하였다.
高麗五百獨先生
(고려 오백년에 사람은 선생 뿐이니,)
一代功名豈足榮
(일대의 공명도 그에겐 영화롭지 못하다.)
凜凜淸風吹六合
(맑은 바람은 늠름히 상하사방에 불고,)
朝鮮億載永嘉聲
(그의 높은 이름은 억만년에 이르도록 전해지리.)
3. 徐 甄 (號는 未詳)
서진(徐甄)은 이천(利川) 사람으로 초명(初名)은 분이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경인(庚寅)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장령(掌令)에 이르렀으나 김진양(金震陽)당에 연좌되어 금천(衿川)으로 물러와 살았다. 그는 이때 다음과 같은 시를 읊어 자기의 심경을 피력하였다.
千載神都隔渺茫
(천년이나 되는 성스런 도읍지 바랄볼 수도 없네.)
忠良濟濟佐明王
(이름 높은 충량들이 임금을 보좌했건만)
統三爲一功安在
(삼국을 통합하여 하나로 만든 그 공이 어디 있노)
却恨前朝業不長
(오히려, 한만 되네, 전조의 왕업 길지 못해서.)
이런 내용의 시가 항간에 떠돌게 되자 당시의 대신이며 대간은 태종께 나아가서 진을 국문하고 치죄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 태종은 이 말을 듣고 새삼스레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게 다 무슨 말이요? 고려의 신하였던 사람이 그 임금을 잊지 않고 시를 읊어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인정인 것이요. 우리 이씨의 운이 천지와 더불어 무궁할 것을 누가 장담하겠소? 그것쯤은 불문에 붙이는 것이 현명할 것이요. 이젠 이 문제를 입 밖에 내지 마시오.”
그러나 대신과 대간은 또다시 입을 열어 간청하였다. 허나 태종은 여전히 불응하면서
“진이 고려의 신하이므로 북면(北面)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임금을 그렇게 추모(追慕)하니 진은 정말 이제(夷齊)에 비할 사람이다. 상을 주면 주지 벌은 못 주겠다.”
대신이며 대간의 입을 다물게 하였다.
선조조(宣祖朝)에 이르러 선조는 허균(許筠)의 보고를 듣고는 진의 무덤에 제를 지내게 하고 동시에 대사간(大司諫)이란 직을 내렸고 또 윤근수(尹根壽)의 말에 의하여 그의 묘를 충신묘(忠臣墓)라 봉하였으며 나아가서는 진을 금천 충현서원(衿川忠賢書院)에 합사(合祀)케 하였다.
4. 元 天 錫 (號는 耘谷)
원천석(元天錫)은 원주 사람으로 자(字)를 자정(子正)이라 불렀다. 문장이 섬부(贍富)하고 식견이 해박했다. 고려 말년에 이르러 나라꼴이 말 못할 정도에 놓여지자 이를 차마 볼 수없어 치악산(雉岳山)으로 들어가 숨어 살면서 친히 농사에 종사하고 어버이 봉양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는 도중 어느 유서에서 과거에 참가해야 할 기록을 발견하고 부득이 참가하게 되었는데 일거에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벼슬은 하기 싫어 도로 향리로 돌아와 이색과 가까이 하면서 시주(詩酒)로 세상을 보내기로 하였다.
태종은 미시(微時)에 그의 문하에서 학을 구하였던 관계로 천석의 위인을 잘 알아 몇번이나 그를 불렀으나 한 번도 태종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어느 때 태종이 강원 지방을 순유(巡遊)하게 되자 천석의 기거하는 집을 찾아갔으나 천석은 피신하고서 태종을 맞이하러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태종은 부득이 계석상(溪石上)으로 내려와 옛날의 종을 불러 먹을 것을 주고 돌아 올 때 천석의 아들 동(洞)에게 기천감무(基川監務)란 직을 내렸다. 그리하여 후인들은 그 계석을 이름 지어 태종대(太宗臺)라 불렀는데 이대는 치악산 각림사(覺林寺) 근방에 있다.
태종이 상왕(上王)으로 있을 때 천석을 부르자 그는 보통 출입하는 옷을 입고 배알하러 들어갔다. 그가 궁중으로 들어가자 태종은 여러 왕자 왕손을 불러냈다. 이때 태종은
“이 애가 나의 손자인데 어떠하오?”
하고 하문하였다. 천석은 바로 세조를 가리키면서
“그러나 형제간에 우애가 있도록 잘 지도하셔야겠나이다.”
천석은 일찍이 야사(野史)를 저술하여 나무상자 속에 넣고 이에 자물쇠까지 채워서 깊이 감추어 두었는데 죽을 암시하여 집안사람들을 불러 놓고 타일렀다.
“저 책상자를 가묘(家廟) 안에 꼭 비장(秘藏)하되 어느 때나 잘 지켜야 한다.”
이 상자 표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귀가 쓰여 있었다.
我子孫, 不如我則, 不可開見
<내 자손이 나만 못하면 열어보지 말아야 한다.>
그 후 그의 증손대에 이르러 시제(時祭)가 있을 때 종족이 일당에 모이게 되었다. 이 때 모인 종족들은
“아무리 선조의 유언이 있을지라도 세월이 가고 또 가서 이젠 오래 되었으니 열어보아도 무방한 것 같다.”
하고 결국 책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 속에 있는 야사의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거의 모두가 은휘하지 않고 사실대로 쓰인 고려 말년의 사실이다. 따라서 내용이 국사와는 다른 점이 많을 것이다.>
이를 보게 된 종족들은
“이것은 우리를 원씨 종족을 멸족함에 알맞은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볼 것은 다 보았으니 이제 불에 태워버리자.”
불 속에 넣고 말았다.
천석은 고려 말년에 있어서 곧은 말하기로 가장 유명했고, 또는 우국(憂國)하는 사람으로도 가장 유명했다. 그의 분묘는 오늘의 원주 치동서 십리가 떨어진 석경촌(石鏡村)에 있어 행인 과객으로 하여금 고개를 숙이게 한다.
5. 李 崇 仁 (號는 陶隱)
이숭인(李崇仁)의 자(字)는 자안(子安)으로 경산부(京山府) 사람이다. 고려 공민왕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 이르렀다. 일찍이 정도전이 숭인과 함께 이색에게로 나아가 학문을 배웠는데 재주는 비등하였으나 그 인격에 있어서는 다른 점이 있었다.
이성계가 왕업을 성취함에 있어 도전은 성계의 중신이 되었다. 이때 도전은 자기의 사람인 황거정(黃居正)을 숭인이 귀양 가 있는 적소로 보내 숭인을 곤장으로 때려죽이게 하였다.
숭인은 당초부터 정몽주 당의 한 사람이었는데 무슨 일로 영남으로 추방되어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거정은 도전의 명령을 받고 영남으로 가서는 하루 동안에 숭인에게 곤장을 수백 대나 가하고도 그를 결박하여 말에 태우고 수백 리나 떨어져 있는 곳으로 달리게 하였다. 이 때문에 전신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마침내 처참히 죽고 말았다.
6. 金 震 陽 (號는 草屋子)
김진양(金震陽)의 자(字)는 자정(子靜)이다. 공민왕조에 이르러 벼슬이 산기상시(散騎常時)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는 당시의 간관(諫官)과 더불어 조준 및 정도전을 규탄한 일이 있었다. 포은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는 곤장을 백도나 얻어맞고 먼 곳으로 귀양 가 있다가 적소에서 죽고 말았다.
7. 조 견 (號는 松山)
조견은 평양 사람으로 자(字)는 종견(從犬)이다. 조준(趙浚)의 아우로 고려시대에 지신 안렴사(知申按廉使)로 있었다. 그는 형 준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한다는 말을 듣고 형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했다.
“형님,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임을 모르십니까? 우리 집안은 마땅히 나라와 존망을 함께 할 집안이올시다.
이 말을 들은 준은 견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알고 견을 영남으로 파견하여 안찰에 종사케 하였다.
그러나 견이 돌아오기도 전에 고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이 소문을 듣고 견은 돌아올 생각이 나지 않아 소리를 높여 통곡하면서 두류산(頭流山)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때 상감은 견에게 호조전서(戶曺典書)란 벼슬을 내리고 그를 불렀다.
그러나 견은
“나는 서산(西山)의 고사리를 먹고 살지언정 성인(聖人)의 백성은 되고 싶지 않소.”
대답한 후 뒤이어 이름을 견( =본래의 이름은 윤(胤))이라 고치고 자를 종견(從犬)이라 개칭했다. 나라가 망했는데 죽지 않았기 때문에 개에 비해 이렇게 지은 것이다.
이와 같이 이름을 고친 후 견은 두류산에서 청계산(淸溪山)으로 들어갔다. 매일같이 최고봉으로 올라가 고려 서울을 내려다보면서 통곡하곤 했다. 그리하여 당시의 사람들은 그 산의 최고봉을 망경(望京)이라 불렀다. 당시의 임금 이태조는 절의에 감동하여 그를 만나보기를 원하였다.
태조의 원이 간절했으므로 조견은 나와 태조를 만났으나 태조에게 고개만 숙이고 대배(大拜)는 하지 않았으며 또 말도 입에서 나오는 대로 했다. 태조는 그의 언동을 문제 삼지 않고 용서하였다. 왕은 이와 같은 일이 있은 후 어디서나 살기 좋은 곳을 택하여 거주할 것을 특별히 허락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집도 지어 줄 것을 명했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나라에서 지어준 집에는 들어가 살지 않고 양주 송산(楊州松山)으로 들어가 여기서 여생을 보냈다. 그가 아호(雅號)를 송산(松山)이라 지은 것은 송산에서 살게 된 때부터였다.
견이 청계산으로 들어가 은신하고 있을 때 당시 형 준은 태조의 좌명공신이 되어 있었으므로 자기 아우에게 무슨 재앙이 미칠까 걱정하고 개국공신권(開國功臣券)에 아우의 성명을 기입하고 이것을 가지고 있게 하였다. 그러나 견은 한사코 이를 받지 않고 이름을 고치고 만 것이다. 그리고 태조가 어느 때 친히 청계산으로 거동하여 그에게 큰 벼슬을 준 일이 있었으나 굳이 사퇴하고 말았다. 그는 죽을 임시에 아들과 손자를 불러
“나는 이제 죽을 것이다. 나의 묘표(墓表)에는 고려시대의 관직만 쓰고 이조의 것은 절대로 쓰지 말라. 그리고 너희들은 신조(新朝)인 이조로 나아가 벼슬을 하지 마라.”
이르고 절명하였다.
8. 金 濟 兄弟
김제(金濟)의 호는 백암(白巖)으로 선산 사람이다. 고려 말년에 김제는 평해(平海) 군수로 있었는데 고려가 망하자 배를 타고 외로운 섬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조 정종(定宗) 때에 해상에 단을 만들어 놓고 초혼제(招魂祭)를 거행하는데 그의 아우 주(做)와 함께 일원(一院)에다 수용(收容)하고 제를 올렸으며 나라에서는 고죽(孤竹)이라 쓴 액(額)을 하사하였다.
그의 아우 주(做)의 자는 택부(澤夫)이고 호는 농암(籠巖)이었다. 고려 공민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공양왕 사년에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서 고려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복(朝服)이며 쌍화(雙靴)를 벗어서 종에게 주어 자기 아내에게 전하게 하고 동시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보냈다.
<총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이라오. 내가 귀국할지라도 몸 둘 곳이 없겠으므로 이것들만 대신 보내는 것이요.>
9. 禹 玄 寶 (號는 養浩堂)
우현보(禹玄寶)의 자(字)는 원공(原功)으로 단양(丹陽)사람이다. 공민왕조에 급제하여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고 우왕 십이 년에는 조민수(曺敏修), 장바온(張子溫), 하윤(河崙)과 함께 원(元)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창(昌) 이년에 김행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우왕을 여흥에서 맞고 비밀히 정몽주와 더불어 음모를 하였다. 이때 여러 사람이 현보를 체포하여 형에 붙일 것을 청하였으나 창(昌)이 듣지 않아 면관만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판삼사사(判三司事)란 벼슬을 하였다. 그런데 공양왕조에 이르러서 또 무슨 일에 관련되어 붙잡히게 되었다. 그랬다가 특사로 석방되자 당시의 대간들은
“그건 안 됩니다.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하고 왕에게 글을 올렸다. 그러나 왕은 현보의 손자 성범(成範)이 부마(駙馬)였으므로 철원으로 추방하고만 말았고 또 그의 아들 홍수(洪壽)와 홍부(洪富)는 멀리 귀양을 보냈다. 그래도 얼마 후 쉽사리 용서를 받고 다시 복관(復官)되었다.
정몽주가 죽음을 당할 즈음에 그는 또 계림(鷄林)으로 귀양을 갔고 다음 해에 고려 왕조는 끝나고 말았다. 정몽주가 살해를 당하자 당시의 사람들은 모두 다 겁을 집어먹고 그의 피살 장소에 가지를 못하였다. 이때 현보만이 천마산(天摩山)중 하나와 같이 수의와 관곽을 만들어 가지고 가서 길지(吉地)를 택하여 안장케 하였다.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현보를 <장한 사람>이라고 칭송하였다.
그가 죽자 이조에서는 그에게 단양백(丹陽伯)이란 작호 이외에 의정부 영의정이란 벼슬과 충정공이란 시호를 내림과 동시에 숭양서원(崇陽書院=정몽주를 모신 곳)에 배향케 하였다.
10. 曺 信 忠 (號는 未詳)
조신충(曺信忠)은 창녕(昌寧) 사람이다. 우왕 구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하윤, 이숭인, 이색과 더불어 의좋게 지냈다. 우(禑)와 창(昌)이 서로 전후하여 폐립케 되자 그는 모든 것을 내버리고 영천군(永川郡) 창수면(滄水面)으로 가 살기 시작했다. 고려가 멸망한 후 하윤이 영의정으로 있게 되자 하윤은 신충을 장재(將才)가 있는 사람으라고 나라에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태조는 즉위 후 오년되는 해에 그에게 강계도 병마사겸판희천군사(江界道兵馬使兼判熙川郡事)란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한 번 서울에 왔다가 얼마 안 되어 시골로 물러가 버렸다. 이것은 이색과 더불어 거취를 함께 하기 위함이었다. 신충의 아들 상치(尙治)는 재사였다. 그가 정시(庭試)에 장원급제를 하자 이를 안 태종은 상치를 보고
“네가 왕씨의 충신 조신충의 아들이지?”
하고는 당석에서 상치에게 정언(正言=사간원의 한 벼슬)이란 벼슬을 내렸다.
11. 李 皐 (號는 忘川)
이고(李皐)는 여흥 사람이다. 공민왕 갑인(甲寅)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가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으로 승진되었다. 고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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