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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 운창 박성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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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5-07 09:22 조회5,2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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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세 휘 성양(性陽)1809(순조 9)~1890(고종 27)

東民-煥-世城-泰迪-弼鼎-師漢-盛源-宗祿-祖壽-齊日-性陽

자는 계선(季善), 호는 운창(芸窓). 서울출신. 제일(齊日)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연안이씨(延安李氏)로 운원(運源)의 딸이다. 이지수(李趾秀)의 문인이다.

천자(天姿)가 청명하고 용모가 단정하였다. 일찍이 외가에서 공부하다가 이지수 문하에 들어가 경의(經義)를 배웠다.

1866년에 양이(洋夷)가 강화도에 침범하자, 이를 물리쳐야 한다는 내용의 〈벽사명 闢邪銘〉을 지어 사람들을 깨우쳤다. 송근수(宋近洙)의 천거로 1880년(고종 17)에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고, 이어 사헌부지평․호조참의․동부승지․호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저편서로는 《운창문집(藝窓文集》 15권을 비롯하여 《이학통고 理學通攷》․《호락원류 湖洛源流》․《가례증해보유 家禮增解補遺》․《거상잡의 居喪雜儀》․《속통감 續通鑑》․《국조기이 國朝記異》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고종 17/09/08(계유) / 김낙현, 박성양, 이상수를 경연관, 서연관으로 임명하다 》

고종 17/09/11(병자) / 박성양(朴性陽)을 자의(諮議)로 임명하였다.(諮議; 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관직)

고종 17/09/11(병자) / 박성양을 타이르다 》 자의(諮議) 박성양(朴性陽)에게 타일러 말하기를,

예로부터 훌륭한 선비는 반드시 훌륭한 임금을 기다려서 일어나기 때문에 몸이 시골에 있어도 성인의 글을 항상 공부하면서 임금을 존경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일을 스스로 맡아 도(道)를 실천하고 학문을 전개하며 임금이 부르면 사양하지 않고 선뜻 나서는 것이 바로 본분이고 의지였던 것이다.

경은 이름있는 집안의 대대로 벼슬을 지낸 자로서 나라와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해왔으며 병으로 (草野)에 있으면서 공자(孔子)의 학문을 연구하고 정주학(程朱學)의 뜻에 통달하였다.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하여 진실로 곤궁한데도 해이해지지 않았으므로 당대 선비들의 으뜸으로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유독 자신만을 좋게 하려고 한 것이겠는가. 대궐에 나와서 임금을 돕는 계책을 말해 줄 것이다. 내가 몹시 사랑하는 것도 이 때문이고 경이 기다렸다가 나서는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세자(世子)의 슬기로운 자질이 날로 갖춰지고 사(師), 부(傅)의 상견례(相見禮)도 좋은 날을 받아놓았다. 경에게 자의(諮議)의 벼슬을 주었으니 경은 제때에 길을 떠나 빨리 와서 빛나게 바른 일과 바른 말로 세자(世子)를 도울 것이다. 이것이 또한 내가 좌불안석(坐不安席)하면서 목마르게 기다리는 까닭이다.

가을철도 깊어가니 경이 그리워진다. 흰 말을 타고 올라와서 이 저녁을 함께 지내기 바란다.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종 17/09/27(임진) / 이명응이 김낙현, 박성양, 이상수의 부주 서계를 가지고 보고하다 》

충청 감사(忠淸監司) 이명응(李明應)이 진선(進善) 김낙현(金洛鉉), 자의(諮議) 박성양(朴性陽), 서연관(書筵官) 이상수(李象秀)의 부주 서계(附奏書啓)를 가지고 보고하였다.

박성양(朴性陽)의 부주 서계(附奏書啓)에는 이르기를, 초야의 미천한 신이 외람되게 이 큰 은혜로운 지시를 받았으므로 마음의 격정을 누르지 못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감히 태연스럽게 지시를 받아서 스스로 참람한 죄를 범할 수 없어서 삼가 놀란 정신을 차려가지고 죽음을 무릅쓰고 하소연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고종 017 17/10/11(병오) / 박성양이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 》

자의(諮議) 박성양(朴性陽)이 상소를 올려 사직하자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지난 번에 비록 부주(附奏)를 보았다 하더라도 멀리 가버리려는 마음을 애써 돌려세울 것을 나는 기대했는데 지금 온 편지를 보니 또다시 사양하였으니 실망을 누를 수 없다. 나는 꼭 오게 하려는 마음이 있으나 성의가 부족하고 믿음이 보이지 못하였고 경은 반드시 사양할 의리가 없는데도 고상한 뜻을 더욱 굳게 가지니 그렇다면 어진 사람을 좋아한 시(詩)와 좋은 자리를 펴놓고 초빙하는 예법은 과연 오늘날에는 실현하기 어렵단 말인가.

대체로 선비의 글공부는 반드시 써먹을 데가 있어서 덕행과 정사를 4과(四科)에 병렬하여 놓았던 것이다. 경은 이 뜻을 필경 깊이 알고 익숙하게 연구하였을 것이다. 하물며 지금 세자(世子)의 서연(書筵)을 자주 열고 있는 만큼 모름지기 노숙하고 학식있는 사람이 덕성을 길러주어야 할 것이다. 경은 선뜻 마음을 돌려먹고 즉시 조정에 나와서 이 두터운 기대에 부합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종 17/12/15(무신) / 박성양이 사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 》

자의(諮議) 박성양(朴性陽)이 상소를 올려 사직하고 옷을 하사한 은전(恩典)을 철회할 것을 청하니 너그럽게 권면하는 비답(批答)을 내려 주었다.

《고종 18/08/23(임오) / 박성양을 타이르다 》 자의(諮議) 박성양(朴性陽)을 타일러 말하기를,

경를 불러 오는 것을 단 하루도 마음 속에서 잊어버린 적이 없다. 옛날의 어진이들을 손꼽아 보아도 역시 세상에 나가서 쓰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실로 임금을 돕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방도가 시골에 있을 때부터 정해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경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한 신하의 본의가 고상하게 벼슬하지 않는 사람과는 원래 다른 점이 있는 만큼 어찌하여 굳이 시골에 붙박혀 있으면서 포부를 펴서 자기 임금을 요순(堯舜)처럼 만들 것을 생각지 않는가.

하물며 지금 백성들의 뜻이 안정되지 않고 선비들의 추향(趨向)이 단정하지 못하므로 반드시 옳은 말을 하고 덕을 닦아서 유교를 부지하는 것이 눈앞의 급선무로 되었고 또 가을철에 경연(經筵)과 서연(書筵)도 장차 열어야 하겠으니 경은 빨리 마음을 고쳐먹고 조정에 나와서 나의 애타는 기대에 부합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종 18/11/09(정유) / 박성양이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 》

자의(諮議) 박성양(朴性陽)이 상소를 올려 사직하니 비답(批答)을 내렸다.

'이 해도 저물어가므로 경을 연모하는 마음이 날로 더해지는데 사임하는 편지가 이 때에 와서 줄곧 멀리 가려고만 하니 나의 말이 졸렬하고 예의가 부족해서 경으로 하여금 은퇴하려는 마음을 돌려세우게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대로 벼슬해 온 후손이며 노숙한 학문을 지니고서도 그저 혼자만 살고 혼자만 좋게 하려 하면서 자기 임금과 백성들을 도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공평하게 하는 방도가 자신을 수양하고 가정을 잘 꾸리는데 근본을 두었다는 말과도 어긋나지 않겠는가. 더구나 지금 서연(書筵)을 자주 열고 경이 참가하여 강론하는 것을 더욱 기대하고 있는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런 지극한 뜻을 체득하고 빨리 조정에 나올 것이다.'

《고종 018 18/11/20(무신) / 송병선을 타이르다 》 자의(諮議) 박성양(朴性陽)에게 타일러 말하기를,

어진 사람을 구하고 훌륭한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급선무이고 포부를 드러내어 써먹는 것은 옛날의 명철한 사람들이 실행한 것이다. 경은 글을 읽어서 이치에 밝고 자신을 조심하여 행실이 독실하니 마땅히 스스로 중책을 맡아나서야 하겠는데 도리어 영영 시골에서 살 것을 맹세하기를 마치 은퇴한 선비가 자신만 보전하려는 것처럼 하고 세상에 나가서 쓰여서 애타게 도움을 받으려는 나의 기대에 맞추려고 하지 않고 있다. 비록 나의 정성과 대우가 박해서 믿음을 사지 못한 탓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어찌 지난 날부터 경에게 바라던 것이겠는가. 세자(世子)의 입학과 관례(冠禮)는 이미 내년 정월달에 길일을 정했으니 세자의 학문이 성취되고 예식이 성대히 진행되는 것은 경이 조정에 나오는 데에 달렸다. 그러니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며칠 내로 길을 떠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서연관(書筵官) 이상수(李象秀)에게 타일러 말하기를,

예식을 갖추어 부르고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는 성의가 아직도 부족해서인가. 예로부터 훌륭한 포부를 품고도 조정에 나와서 속에 쌓인 것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었지만 나는 경에 대하여 유감이 없을 수 없다. 수양을 쌓은 훌륭한 소문이 이미 나에게까지 들였으나 멀리 떠나가려는 마음을 돌려세우지 못하고 타고 온 백마를 마당에 매어두지 못하였으니 자나깨나 만나고 싶은 생각을 어찌 하루인들 마음속에서 잊겠는가. 지금 동지(冬至)가 지나고 해가 길어져가므로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을 자주 열고 있다. 또 하물며 세자(世子)의 입학과 관례(冠禮)를 차례차례 내년 정월달에 거행할 것이니 경은 결연히 마음을 돌려 보좌하는 방도를 다하고 경사스런 예식을 함께 거행하지 않겠는가. 마음을 터놓고 타이르면서 경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겠다.'라고 하였다.

고종 19/01/04(신묘) / 송병선․김낙현․박성양․이상수 등을 돈소하다 》

찬선(贊善) 송병선(宋秉璿), 진선(進善) 김낙현(金洛鉉), 자의(諮議) 박성양(朴性陽), 서연관(書筵官) 이상수(李象秀)를 돈소(敦召)하였다. 세자(世子)의 관례(冠禮)가 시일이 임박하였기 때문이었다.

---계속----

고종 27권, 27년(1890 경인 / 청 광서(光緖) 16년) 10월 18일(갑인) 1번째기사

경연관 박성양이 졸하다

경연관(經筵官) 박성양(朴性陽)이 졸(卒)하였다.

전교하기를,

박 산림(山林)은 나이 많고 학문이 깊으며 지조가 굳은 사람으로서 내가 경연(經筵)에 오도록 자주 명령을 내려 간곡히 불렀는데, 갑자기 죽었다는 보고를 들으니 슬픔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장사 지내기 전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상사(喪事)에 쓸 물자를 본 도로 하여금 되도록 후하게 실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순종03/08/25 죽은 도헌(都憲) 박성양(朴性陽)은 덕을 수양하는 숨은 선비로서 세상 사람들의 스승으로 되었으며,

순종03/08/26(양력) / 이간 등 57명에게 시호를 주고 이총 등 3명의 시호를 고쳐주다 》

박성양(朴性陽)에게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를,

박영교(朴泳敎)에게 충목공(忠穆公)이라는 시호를,

박원양(朴元陽)에게 정간공(貞簡公)이라는 시호를,

박제인(朴齊寅)에게 정익공(靖翼公)이라는 시호를,

山林

산림지사(山林之士)·산림숙덕지사(山林宿德之士)·산림독서지사(山林讀書之士)의 약칭으로, 임하지인(林下之人)·임하독서지인(林下讀書之人) 등으로도 불려졌다.

과거를 거치지 않고 향촌에 은거해 있으면서 유림(儒林)의 추앙을 받았다. 정계를 떠나 있어도 정치에 무관심하였던 것은 아니며, 정계에 진출해 있으면서도 항상 산림에 본거지를 가지고 있는 조선 후기 특유의 존재였다.

또한, 국가로부터 징소를 받아 관직의 제수를 비롯해 온갖 특별한 대우를 향유했던 부류였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와 무관하였던 단순한 일민(逸民)이나 국가의 징소를 받지 못한 여타의 재야학자들과도 구별되는 것이다.

산림이라는 용어는 16세기말 성혼(成渾)·정인홍(鄭仁弘) 등이 정치와 긴밀한 연결을 가지면서 하나의 역사적인 용어로 정착되었다.

조선 후기에 과거를 거친 관료보다 과거를 거치지 않고 향촌에 은둔해 있던 학자가 더 존중되는 분위기가 형성된 데는, 사화(士禍)를 거치면서 사환(仕宦)에 매력을 잃고 향촌에서 침잠성리(沈潛性理)한 일부 사림(士林)들의 성향 변화가 큰 영향을 주었다.

이와 함께 직접적인 은둔의 계기로 작용한 것은 당시 과거 제도의 말폐, 정치적 질서의 문란, 청나라에 대한 굴욕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산림의 정계 진출이 인조대부터 본격화되면서, 정부에서는 특별히 산림직을 신설해 우대하였다. 산림직은 마땅한 인물이 없으면, 자리를 비워둘망정 산림이 아닌 인물은 임명될 수 없는 관직으로, 산림의 특이성을 잘 대변해준다.

1623년(인조 1)에 설치된 성균관의 사업(司業, 종4품), 1646년(인조 24)에 설치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찬선(贊善, 정3품 당상관)·익선(翊善, 종5품 : 뒤에 進善으로 개칭)·자의(諮議, 종7품), 그리고 1658년(효종 9)에 설치된 성균관의 좨주(祭酒, 정3품 당상관)가 그것이다.

이 산림직은 실직을 가진 자가 임명될 때는 겸직이 되고, 그렇지 못한 자가 임명될 때는 실직으로 되었다. 관계의 승전(昇轉)에도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으며, 징소 과정에서도 식물(食物)이나 가교(駕轎)·말[馬]이 지급되는 등 상규를 벗어난 예우를 받았다.

유교 사회의 상징적인 존재로서의 산림은 특히 17세기에 큰 기능을 행사하였다. 당시의 대표적인 산림으로는 김장생(金長生)·장현광(張顯光)·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윤선거(尹宣擧)·권시(權諰)·허목(許穆)·윤휴(尹鑴)·박세채(朴世采)·윤증(尹拯)·이현일(李玄逸)·권상하(權尙夏) 등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유림을 대표하면서 국왕에게는 정국의 안정과 유지를 위한 명분과 실리를 제공하였다. 즉, 인조·효종연간에는 숭명사상(崇明思想)과 북벌론(北伐論)을 적극 지지하면서 정권의 당위성을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각 당의 영수(領袖)로 활약하면서 강한 학연(學緣)을 바탕으로 당의 정당성을 부여해주고, 그 당이 집권하였을 때는 그 집권의 정당성을 제공해주었다. 이러한 산림의 구실이 가장 두드러지게 정치적 표면에 나타난 것이 예송(禮訟)이다.

이들은 거의 모두 예학(禮學)의 거두로서 예론을 하나의 당론으로 제공해주었을 뿐 아니라, 당을 대표해서 직접 선두에서 싸웠던 것이다. 수적으로 보면 집권 기간이 가장 길었던 서인 노론계의 김장생·송시열의 학통에서 가장 많이 배출되었다.

산림은 또한 학덕을 겸비하였기에 교육적인 측면에서의 구실도 컸다. 경연(經筵)·서연(書筵)에서의 강의를 비롯해 성균관 유생의 훈도 및 향촌에서의 문도 배양에 큰 일익을 담당하였다. 또한, 의례적(儀禮的)인 측면이나 유교적 정치 요강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영조대 이후 실질적인 기능은 쇠퇴하고 오로지 유교사회의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정부에서는 의례적인 대우를 극진해 국가가 유자(儒者)를 존중해준다는 명분을 세웠다.

세도정치하에서는 그 정도가 더욱 악화되어 산림은 많이 등용되지도 않았고, 불과 몇 사람만이 산림으로 지목되어 외척(外戚)의 사인(私人)으로 전락해갔다. 안동김씨(安東金氏)와 깊은 연결을 가졌던 홍직필(洪直弼)이나 여흥민씨(驪興閔氏)와 연결을 가졌던 임헌회(任憲晦) 등이 그 예이다.



반남박씨   산림

박세채. 박필주. 박윤원. 박성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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