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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교양강좌 실시

페이지 정보

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5-25 11:27 조회4,556회 댓글0건

본문

2012년 5월 24일 대종중 회의실에서 많은 분의 종원님과 제훈 부도유사님이 참석한 가운데 판관공파의 찬수님께서 '문정공(휘 상충)의 생애와 후대의 평가'에 대하여 종원의 교양강좌을 마쳤습니다.

6월에는 찬욱님의 '유교, 과연 종교인가' 라는 강의를 6월 22일(금요일) 11시에 해주실 예정이며

7월에는 '평도공과 사위 어효첨'에 대하여 현 성균관 부원장이시고 전 강동문화원장을 지내신 어윤경님의 강의가 있을 예정입니다.

바쁘신 중에도 많은 종원님이 참석해주심 감사드리고

앞으로의 행사에도 많이 참석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강의 내용>



文正公 潘南先生의 生涯와

後代의 評價

目 次

1. 先生 年譜

2. 請却北元使疏 문제

1) 14세기 中葉 동아시아의 國際情勢

2) 金義 사건의 전말

3) 北元使 접대를 둘러 싼 論難

3. 請却北元使疏의 檢討

1) 請却北元使疏(一次)

2) 復上疏

3) 請却北元使疏의 檢討

4. 後代의 評價와 追崇

1) 先賢들의 評價

2) 國典의 襃獎

參考文獻

[添附] 1. 牧隱·潘南·圃隱 세 분의 師友關係에 대한 誤解

2. 開城 部坊圖

主 催: 潘南朴氏 大宗中

場 所; 潘南朴氏 大宗中

日 時; 2012年 5月 24日 (木曜日)

발표자; 전 民族文化推進會(현 古典飜譯院) 國譯室長, 문학박사, 判官公後 贊洙





1. 先生 年譜

忠肅王 復位 元年 임신(1332); 孔巖縣 馬山里에서 출생.[3男 2女의 長男]

恭愍王 2년 계사(1353); 22세, 李穡의 榜에서 乙科 제2人及第. 字 誠夫, 號 潘南.

이하 仝 3년 갑오(1354); 成均學諭, 三轉하여 博士에 오름.

7년 무술(1358); 尙書都事

10년 신축(1361); 宣德郞 大府寺丞

11년 임인(1362); 承奉郞 奉車署令

12년 계묘(1363); 典儀主簿로 옮겼다가 朝奉郞에 올라 典校寺丞이 됨.

7월에 知錦州事[錦山]로 나가 3년 만에 治積을 이룸.[稼亭集 간행.]

14년 을사(1365); 2월에 通直郞으로 三司判官에 보임.

16년 정미(1367); 12월에 禮儀正郞이 되어 祀典[국가 의례 사전]을 만들 고, 成均博士를 겸함.[전년에 成均館을 移建하고 名儒로 學官을 겸하게 했는데, 大司成 李穡을 필두로 선생을 비롯, 金九容·鄭夢周·朴宜中·李崇 仁 등이 선발되었다. 詞章 중심에서 心身性命의 學風으로 전환.]

18년 기유(1369); 1월에 朝列大夫에 陞品, 成均司藝에 보임.

20년 신해(1371); 中議大夫 太常少卿 寶文閣應敎에 보임.[兼直講]

21년 임자(1372); 奉常大夫 典理摠郞로 成均直講을 겸함.

22년 계축(1373); 7월에 大夫人 金氏의 상을 당함.[百日卽除, 3년 不食肉]

12월에 中顯大夫 典校令[從3]에 보임.[司藝~典校令 皆 兼 知製敎]

23년 갑인(1374); 봄, 廉興邦이 主官이 鄭夢周와 함께 同知貢擧로 선비를

뽑음.[이해 9월에 恭愍王 弑害되고 이어 金義 사건 발생.]

12월에 知王府印으로 人事行政 참여하여 賢材 추천.

禑王 1년 을묘(1375); 4월에 奉順大夫 判典校寺事[正3]로서 兼 右文官直提學.

正月, 선생이 鄭夢周·鄭道傳과 함께 判宗簿寺事 崔源에게 권유하여 明 에 가서 告哀하게 함.

5월頃(?) 두 차례 請却北元使疏를 올려 宗社를 위태롭게 한 宰相 [李仁任]을 처벌하여 국가를 累卵의 위기에서 구할 것을 주장함.

7월 5일, 李仁任의 誅殺을 요구한 臺諫[李詹·全伯英]의 말에 연루되 어 酷刑을 받고 유배 도중 靑郊驛 殞命. 享年 44歲. 子 平度公 6歲.

恭讓王 3년(1392); 12월에 兼典醫寺丞 房士良이 상소하여 관직을 추증하고 제사 지내 줄 것을 청했으나 시행되지 않음.

朝鮮 太宗 16년 ; 子 平度公이 榮達 領議政에 追增됨.

宣祖朝 ; 亡失했던 長湍의 선생 묘소를 찾아 墓域을 改築하고 神道碑를 세움. 肅宗 7년 신유(1681)에 領中樞府事 宋時烈이 經筵에서 아룀에 따라 文正으로 追諡하고 사당을 지어[五冠書院] 제사를 드리도록 함.

上仝 8년 임술(1682) 정월 조정에서 宣諡, 致祭하였다. 후손 70여 인이 모여 慶賀하고, 10세손 世采가 褒贈紀事碑를 지어 이 사실을 밝혔다.

2. 請却北元使疏 문제

1) 14세기 中葉 동아시아의 國際情勢

유목민족의 元나라는 문화선진국인 漢族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중국식 통치제도를 채택하고, 朱子學을 장려하며, 元에 대한 저항 정도에 따라 각 민족들을 차별대우하면서 1백년 가까이 중국대륙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14세기 중반이 되자 왕조 말기적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元朝 내부의 권력 다툼, 통제력의 弛緩, 재정의 문란 등으로 국정이 문란해진 데다 漢族의 줄기찬 반항운동으로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돌입하였다. 급기야는 고려까지 그 피해를 입게 되었으니 공민왕 10년 紅巾賊의 亂이 바로 그것이다. 여러 反蒙 운동 중에서 白蓮敎徒에서 일어난 朱元璋이 1368년 明을 건국하고 北伐을 단행하자, 元은 자기들의 본향인 몽고 초원으로 쫓겨 가 명맥을 유지하니 이것을 北元이라 한다.

한편,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 말기 南北朝時代로 돌입하자 중앙 통제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武士들은 제각기 독자 세력을 형성, 고려와 중국의 해안을 노략질하게 되니 이들이 이른바 倭寇라는 것이다. 그 폐해는 고려에 더욱 심하여 바닷가는 물론, 내륙지방까지 피해를 보고 심지어는 倭寇로 인해 수도인 開京에 계엄령이 내려지는 때도 있어 당시 高麗의 군사력은 왜구 격퇴에 寧日이 없는 어려운 시기였다.

이러한 전환기에, 元의 鮒馬國으로서 장기간 그의 절대적인 영향 하에 있던 高麗로서는 어떻게 외교정책을 전개하는 것이 실익이 될 것인가라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역사의 순리를 따르자면 신흥세력과의 우호가 우선이었지만, 元과의 질긴 인연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니, 지배 계층의 상당수는 元과의 직간접적인 인연 속에서 성장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元의 외손이면서 駙馬였던 恭愍王은 즉위 초년부터 元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더니, 明이 공민왕 18년(1369) 4월, 사신을 보내 천하가 평정되었음을 알려오자, 5월에는 과감하게 元의 至正 연호를 정지하고, 이듬해(1370) 7월부터 明의 洪武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8월에는 몽고식 衣冠服飾을 중국식으로 바꾸어 親明背元政策을 확고히 하였다. 이리하여 明과 高麗 사이에는 友好가 성립되고 新興士大夫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나 궁지에 몰린 北元 또한 高麗를 이용하고자 사신을 보내오기도 했으므로 공민왕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2) 金義 사건의 전말

그러던 중 공민왕 23년(1374) 4월 明은 禮部主事 林密과 孶牧大使 蔡斌을 보내 耽羅 牧馬 2천 필을 바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탐라의 牧胡가 이를 거부하였으므로 최영 등을 보내 탐라를 토벌하였다. 9월 2일(甲子) 채빈 등은 3백 필[恭愍王世家 金義傳에는 2백 필]의 말을 이끌고 귀환 길에 올랐다. 이때 金義[胡人으로 歸化者 본명은 也列哥]로 하여금 이들을 遼東의 定遼衛까지 호송하게 하고, 張子溫과 閔伯萱을 동행시켜 明에 通好를 사례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 20일 뒤인 22일(甲申) 恭愍王이 弑害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對明外交의 주역이었던 恭愍王의 急逝는 高麗의 外交政策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장차 明은 우호적이었던 공민왕의 죽음에 대해 죄를 물을 것이 분명한데, 어떤 자가 李仁任에게 ‘재상으로서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겁을 주었다. 遠慮深謀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 문제가 가져올 파장과 국사를 우선으로 생각하여 正道를 택했겠지만, 李仁任은 그렇지 못하였다. 마치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으로 국사는 뒷전으로 돌리고 자신이 임시 모면할 계책을 모색하게 되자 일이 헝클어지게 되었다. 즉 공민왕이 시해된 뒤, 李仁任은 贊成使 安師琦에게 蔡斌 일행을 餞別한다는 명목 하에 뒤따라가게 했는데, 그 후 金義는 遼東의 開州站에 이르러 蔡斌을 죽이고, 그 아들과 林密을 압송하여 3백필 貢馬를 몰아 北元으로 달아나니 동행하던 장자온 등은 되돌아왔다. 채빈은 본디 행패가 심한 자였는데 귀환할 때에도 이르는 곳마다 酒邪를 부리고 심지어 金義를 죽인다고까지 豪言하니 胡人인 金義로서는 개인적으로도 감정이 나빴겟지만, 安師琦에게서 모종의 암시를 받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김의의 사건을 듣자 이인임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이해 12월에 判密直 金湑를 北元에 보내 恭愍王의 訃音을 알렸다. 반면, 明과의 국교는 단절되어 恭愍王의 訃音을 전할 수도 없게 되었는데, 문제는 사람들이 明에 가기를 꺼린다는 것이었다. 이에 선생과 정몽주·정도전 등이 이인임에게,

“먼저 스스로 주저하여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게 해서는 안 된다.”

라고 설득하고, 判宗簿寺事 崔源에게 明에 사신 갈 것을 권유하니 崔源은,

“社稷이 편안해질 수 있다면 내 한 목숨 죽는 것을 아끼겠는가.”

하였으므로 이인임은 遷延하다가 마지못해 우왕 원년(1375) 정월에 崔源을 보내 告哀하였으나 예상대로 明은 崔源을 구금하였다.

한편, 北元은 金義의 사건을 고려에 대한 영향력 만회의 好期로 보고, 군사를 일으켜 瀋陽王 暠의 손자 脫脫不花를 고려의 왕으로 들여보낸다고 공언하였다. 이 소문은 김의가 北元으로 도망갈 때 따라 갔던 從者들이 귀국함으로써 확인되었다. 이들은 반역자의 手下임에도 불구하고 이인임과 안사기는 그들의 죄를 불문에 붙였을 뿐 아니라, 이들을 厚待하기까지 하자 의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이에 선생은 상소하여 안사기의 죄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청하였다.

“김의가 사신을 죽인 죄는 마땅히 심문해야 할 것인데, 재상이 매우 후대하니 이는 안사기가 김의를 사주하여 사신을 죽인 것입니다. 그 형적이 이미 드러났으니 이제 그 죄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社稷의 화가 이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太后는 이 소를 오랫동안 가지고 있다가 都堂에 내리고, 또 巡衛司로 하여금 안사기를 하옥시키려 하자 안사기는 도망하여 남의 집에 숨었다가 면할 수 없음을 알고 가지고 있던 칼로 제 목을 찔렀는데, 그 머리를 베어 저자 거리에 매달았다. 이때 태후는 또 이인임에게‘

“나는 재상이 金義를 北元에 보냈다는 소문을 들은 지 오래되었는데 경만 모르고 있었는가?”

라고 힐책하니, 이인임은 贊成事 康舜龍·知密直 趙希古·同知密直 成大庸 등이 한 짓이라 핑계대고 이들을 귀양 보냈다. 그러면서 또 이인임은 北元의 마음을 돌려 脫脫不花가 고려왕이 되려는 야욕을 저지해야 한다는 명분하에, 宗親·耆舊·文武百官과 會盟하고 連名으로 北元의 中書省에 보내는 글을 지었는데, 내용은,

“선왕 伯顔帖木兒[공민왕의 몽고식 이름]의 遺旨로 이제 친아들 禑에게 왕위를 세습케 하였는데, 이제 심왕의 손자 脫脫不花가 왕위를 탐내고 있으니 금지해주기를 바란다.”

는 것이었다. 선생과 임박·정도전 등 신진 유학자들은 어떤 명분으로든 元과의 통호는 반대하여,

“선왕께서 이미 계책을 세워 明을 섬겼는데, 이제 와서 다시 元을 섬기는 것은 부당하다.”

고 하며 서명하지 않았다. 이인임 등은 서명하지 않는 것은 지금 임금[禑王]을 인정하지 않고 脫脫不花를 돕는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우면서 자신의 계획대로 이 連名書를 北元에 보냈다. 이를 명분으로 北元은 5월에 드디어 사신을 보내왔는데,

“전왕은 우리를 배반하고 明에 歸附했으니 너희 나라에서 왕을 시해한 죄를 용서하고 신왕[禑王]의 즉위를 인정한다.”

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고려 조정은 또 다시 요동을 치게 되었으니, 공민왕의 친명정책을 주도하던 친명 儒學派가 퇴장하고, 武將 중심의 親元 보수파가 주도권을 잡게 된 것이다.

3) 北元使 접대를 둘러 싼 論難

북원 사신이 오자 이인임·慶復興·池奫 등은 맞아들이려 하고, 三司左尹 金九容·典理摠郞 李崇仁·鄭道傳·權近 등은 都堂에 글을 올려,

“만일 북원의 사신을 맞는다면 온 나라 臣民이 모두 亂賊의 죄에 빠지게 될 것이다. 뒷날 무슨 명목으로 현릉(玄陵 공민왕)을 지하에서 뵙겠는가?”

하며 강력히 반대했으나 인임 등이 물리쳐 받아들이지 않고 정도전으로 하여금 북원 사신을 맞이하게 하였다. 정도전은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사신을 목 베어 올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포박하여 明으로 압송해 보내겠소.”

하며, 극력 반대했는데, 언사가 불손하였고, 또 太后에게 가서,

“북원 사신을 맞이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라고 아뢰었으므로 경복흥과 이인임이 노하여 정도전을 귀양 보냈다. 이어 大司成 鄭夢周도 글을 올려 북원 사신 영접의 부당성을 논했는데 그 요지는,

“고려가 천하의 義主인 明을 섬긴 지 6년이나 되었는데, 갑자기 金義가 明使를 살해하고 북으로 달아남으로써 事端이 일어났습니다. 궁지에 몰린 北元과 通好하여 화를 자초할 것이 아니라 원의 사신을 잡아 두고 그 조서를 거두며, 金義 반역사건의 관련자인 吳季男·張子溫과 김의의 從者들을 포박하여 명나라 서울로 보낸다면 우리의 애매한 죄는 변명하지 않아도 저절로 밝혀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定遼衛와 약속하여 기회를 보아 북으로 쳐들어간다고 소리치면, 元氏의 남은 무리들은 저절로 도망가 국가의 무궁한 복이 될 것입니다.”

라는 것이었다. 당시 判典校寺事 겸 右文館直提學으로 있던 선생 또한 매우 간절하고도 문제의 핵심을 지적한 강경한 소를 잇따라 올렸다. 즉, 이전 諸公들의 上疏는 明과의 通好는 역사의 순리이며, 先王의 정책을 계승하는 것은 臣子의 도리이니, 北元 사신을 물리치라는 것이 주류였고, 마지막 정몽주의 상소도 金義와 직접 관련된 자들을 잡아 明으로 보내자는 데 그친 반면, 선생의 상소는 이 사단이 일어나게 된 책임자를 가려 처벌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이상과 같은 儒臣들의 줄기찬 반대로 집권자들도 어쩔 수 없이 贊成事 黃裳·左副代言 成石璘을 보내 江界에 머물고 있던 북원 사신을 위로하여 돌려보내게 하니, 이로써 北元使 영접 문제는 일단락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인임의 보복이 곧이어 시작되었으니, 이는 간관 李詹과 全伯英의 상소로 촉발되었다. 즉, 6월에 右獻納 李詹과 左正言 全伯英이 상소하기를,

“시중 이인임이 몰래 김의와 공모하여 明나라 사신을 죽이고도 다행히 죄를 면하였으니, 이 점을 사람들이 이를 갈고 마음 아파합니다. 吳季男은 제 마음대로 定遼衛 사람을 죽였고, 張子溫은 金義가 사신을 죽인 일을 정료위에 고하지 않았으니 죄를 마땅히 국문하여야 하는데, 인임이 내버려 두고 묻지 않았으니 첫 번째 죄요, 근자에 찬성사 池奫이 외직으로 西北面을 맡아 지킬 적에 김의의 편지를 얻고도 전하께 상달하지 않고 비밀히 인임에게 전하였으며, 전하께서 여러 번 찾은 뒤에야 아뢰고 핑계하기를, '백성들의 마음을 의혹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하였으니 두 번째 죄요, 오랑캐의 국서가 왔을 때에 지윤이 그 편지를 등사하여 중요한 말은 삭제하고 전하께 바치며 그 원본은 인임에게 주었는데, 인임이 즉시 아뢰지 않았으니 세 번째 죄요, 백관과 함께 맹세하여 오로지 전하를 섬기는 뜻을 보이면서도 오랑캐와 통하여 瀋王에게 공을 세워 훗날의 화를 면하려 하였으니, 반복하여 간사한 것이 네 번째 죄입니다. 두 사람이 입술과 이빨[齒] 같이 결탁하고 변란을 선동하여 장래의 화를 헤아릴 수 없으니 인임과 지윤의 목을 베고, 또 계남과 자온의 죄를 다스려서 기강을 진작시키소서.”

하였다. 글이 올라가니, 이첨을 知春州事로, 전백영을 知榮州事로 폄직하여 내보냈는데, 7월에 上護軍 禹仁烈과 親從護軍 韓理가 인임의 뜻에 아부하여 말했다.

“諫官이 재상을 論劾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간관이 옳다면 재상이 죄가 있는 것이고, 재상에게 죄가 없다면 간관이 잘못이니 명백히 辨別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에 이첨과 전백영을 옥에 가두고, 崔瑩과 지윤을 시켜 국문하자 진술하는 말이 정당문학 田祿生과 선생에게 관련되었는데, 지윤과 최영이 매우 참혹하게 녹생과 선생을 국문하였다. 인임이, ‘이 무리들을 죽일 것까지는 없다.’고 하여 귀양보냈지만 두 분은 모두 杖毒으로 유배 길에서 운명했는데, 선생이 숨을 거둔 곳은 개성 都城 밖 동남쪽 靑郊驛이었다. 이와 동시에 이첨ㆍ전백영ㆍ方旬ㆍ閔中行ㆍ朴尙眞은 곤장을 처 귀양보내고, 또 鄭夢周ㆍ金九容ㆍ李崇仁ㆍ林孝先ㆍ廉廷秀ㆍ廉興邦ㆍ朴形ㆍ鄭思道ㆍ李成林ㆍ尹虎ㆍ崔乙義ㆍ趙文信 등도 자기(이인임)를 해하려고 모의하였다 하여 모두 귀양 보냈다. 이때 대부분의 친명파 儒臣들이 화를 입었는데 선생의 동생인 判書公도 함께 화를 당한 것이다. 역사가들은 전녹생과 선생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田祿生(1318-1175)은 文武兼全의 인재로 出將入相의 宰臣이요, 尙衷은 강개하고 큰 뜻이 있고, 널리 배워서 글을 잘 지었으며, 겸하여 星命學에 통달하였고, 그 행실과 벼슬에 있어서 반드시 도리대로 하여 의롭지 못한 부귀는 하찮게 여겼다.”

3. 請却北元使疏의 檢討

이인임을 직접 탄핵한 臺諫은 유배로 그친 반면, 그 말에 연루된 선생과 전녹생은 목숨을 잃었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의아해 하는바, 이첨과 전백영은 언관의 직분을 다하기 위하여 집정자의 誅罰을 요구했지만, 그 배후에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친 이는 전녹생과 선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의문을 풀어 줄 자료는《東文選》에 실린 이른바 ‘請却北元使疏’ 두 편 밖에 없다. 이 상소문의 검토를 통해 사실을 推斷해 보기로 하자.

1) 請却北元使疏(一次)

“변변찮은 신이 侍從으로 있은 지 몇 해가 되었습니다. 시종관으로서 말씀을 할 수 있음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제도입니다. 요즈음 정사로 할 말이 많았지만 감히 말하지 못했던 것은, 어찌 諫官이 아니어서 남의 직임을 침해할까 저어하고, 또 명예를 탐한다는 소문이 있을까 우려해서가 아니었겠습니까. 이제 크게 言路가 열리어 재상과 모든 벼슬아치들이 말씀할 階梯를 얻지 못하는 자가 없으니, 이는 대개 백성에게 편리한 계책을 듣고자 함이었습니다.-우왕 원년 2월, 백관들로 하여금 백성들의 생활에 도움이 될 좋은 방책을 건의하라는 명을 내린 일이 있어 이렇게 말한 것이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백성에게 편리한 계책이야 많겠지마는, 나라의 대세가 불안하다면 비록 백성들에게 편리하고자 하더라도 그렇게 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나라의 형세는 바로, 이른바 ‘쌓인 나무 아래에다 불을 놓고는 그 위에 누워서 불이 아직 타오르지 않음을 보고 편안하다’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식견이 있는 선비라면 누군들 마음 아프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先王[공민왕]께서 막 돌아가시어 장례도 치르기 전에, 明나라의 사신이 아직 국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북쪽 나라를 섬기려는 의론을 일으켜 사람들을 현혹시킨 자는 누구이며,-이는 이인임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定遼衛에서 보낸 사을 제 멋대로 죽인 자는 누구이며, 거짓말을 퍼뜨려 사신을 맞이하려는 정료위 군사로 하여금 도망가게 하고서 구하지 아니한 자는 또 누구이며,-이는 오계남을 지칭한 것이다.- 선왕의 명령에 따라 사신을 護送한 이는 비단 金義뿐이 아닌데, 대신으로서 선왕의 명령을 받들어 安州에 이르러서 스스로 돌아온 자는 또 어떤 사람이며,-이는 張子溫과 閔伯萱을 가리킨 것이다.- 서북의 군사로 하여금 정료위를 치려는 자는 또 어떤 사람입니까.-池奫이 당시 서북면도원수로 있었다.- 김의의 上書를 찢어서 그 말을 막고는 이른바 제멋대로 사람을 죽인 자와-이는 누구인지 불분명- 叛賊 母黨의 죄를 불문에 붙인 것은 무슨 까닭이며,-憲府에서 건의해서 김의의 모와 처는 죽음을 면하였다.- 김의가 叛한 지 한 달이 넘었어도 조정에 보고하지 않음은 무슨 까닭이었습니까. 崔源이 사신 간 것이 과연 모두 대신의 뜻에서 나온 것입니까. 이제 또 들으니, 북방 사신이 김의와 더불어 叛한 자와 함께 돌아왔다고 하는데, 叛賊이 스스로 돌아온 것은 이미 죄가 있음에도 본국에서는 묻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김의가 반할 때 반드시 그렇게 하도록 시킨 자가 있을 것이니, 이것은 곧 위급한 일로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는 하나의 큰 기미입니다. 사세가 이러하니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자라도 그 이해와 시비의 소재를 잘 알 것인데도, 지금 말하는 자들은 조금도 여기에 대해 언급을 않으니, 이것은 禍患을 매우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치로 말한다면 순리를 따르면 길할 것이요, 역리를 따르면 흉할 것이며, 형세로 말한다면 南은 강하고 北은 약하니 이것은 사람마다 다 같이 아는 바이건마는, 대저 순리를 버리고 역리를 좇음은 천하의 불의이며, 강한 자를 배반하고 약한 자를 친함은 오늘의 그릇된 계교입니다. 신하로서 事大外交를 한 선왕의 뜻을 배반하고 심지어는 天子의 사신을 죽이고 그 말을 빼앗았으니, 그 죄악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두 신하가 불충한 마음을 품고 나라를 팔아서 私利를 도모하고는 그 죄악으로 인한 재앙을 국가에 돌려, 반드시 종묘사직이 망하게 하고, 생민이 도탄에 빠지게 하였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사세가 이 경지에 이르렀으니, 전하께서는 두세 대신의 충성스럽고 곧은 자와 함께 일찍이 분간을 지어 처리하지 않는다면 장차 종묘사직을 어찌할 것이며, 장차 민생들을 어찌할 것입니까.

또 이로운 데로 좇아가고 해로운 것을 회피하며,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함은 人之常情이니, 신이 어찌 風病이 든 자이겠습니까. 이제 스스로 예측할 수 없는 誅罰을 무릅쓰고 감히 말씀 드리는 것은 충성의 義憤이 극도에 달하여 해로움을 밟는 것도 고려하지 않거든, 하물며 명예에 가까운 일을 하겠으며, 남의 직책을 침해하는 일을 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신의 말씀을 잘 살펴 처리하시어 종묘사직이 편안하게 하시고 민생들이 영원히 힘입도록 해 주신다면, 신의 한 몸이야 만 번 죽는다 하더라도 한이 없겠습니다.”

2) 復上疏(二次)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겨 죄와 책망을 면한다면 괜찮은 일입니다. 지금은 면하지 못할 만한 큰 죄가 네 가지가 있다는 것을, 어리석은 신도 오히려 알고 있는데, 하물며 대신으로서 모를 리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한번 힐책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의리를 돌아보지 않게 되면 무릇 환난을 피할 만한 것이라면 못할 짓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에 가린 바가 있게 되면 비록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슬기가 있다 하더라도 도리어 어리석은 자의 소견만 못할 것입니다. 신은 청컨대, 그 죄를 따져 면하는 방도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정성을 다해 순종하여 明나라를 섬긴 것은 선왕의 뜻이었는데, 선왕께서 돌아가시던 날에 드디어 북녘 나라를 섬길 의론을 일으켰으니, 신하가 되어 君父의 뜻을 위반하고 전하로 하여금 明나라에 죄를 얻게 하였으니, 이것이 그 첫째 죄목입니다. 吳季南이 북방을 지켰을 때, 제멋대로 定遼衛 사람을 죽이고 말을 만들어 그 군사를 놀라게 하였는데, 곧 그 죄를 덮고는 악을 편들어 災禍를 불러 국가를 위태롭게 하였으니, 그 두 번째 죄목입니다. 金義는 사신을 죽이고 貢 바치는 말을 빼앗아 반란을 일으켰으니, 천하에 커다란 악이어서 사람마다 죽이기를 원하는 바이거늘, 이제 김의와 함께 叛했던 자가 왔는데도 곧 불문에 붙이어 그 죄가 국가에까지 미치게 하여, 비록 종묘사직이 멸망되고 백성을 죽여도 구제할 줄을 모르니, 그 죄의 세 번째입니다. 김의가 반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조정에 보고하기를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또 崔源이 떠날 때에 감히 임금의 명령을 어기면서 국경을 나가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럭저럭 여러 달을 지내어 明나라로 하여금 더욱 의심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네 번째 죄입니다. 이러한 네 가지의 죄 중에서 한 가지만 있다 하더라도 족히 멸망을 당할 것인데, 하물며 이러한 네 가지의 죄가 갖추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같이 그 화를 당하고자 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전하께서 능히 대신 중의 충성스럽고 곧은 이와 더불어 의론하여 분간한다면 그 죄는 반드시 돌아갈 곳이 있을 것입니다. 그 죄인을 찾아 가두고는 대신으로 하여금 表文을 받들어 천자에게 올려서 그의 죄를 살펴 처리하기를 기다린다면 총명한 천자로서 어찌 분간하지 못할 바가 있겠습니까. 종묘사직과 민생의 편안하고 위태로움이 이 한 번의 처사에 달렸사오니, 한번 이 기회를 잃어버린다면 후회한들 미칠 바 있겠습니까.”

3) 請却北元使疏의 檢討

이상 두 편의 상소가 후세 先賢들이 선생을 稱歎하게 된 근거 자료이다. 그런데 이들 疏文은 제목이 ‘請却北元使疏’라고 되어 있으면서도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북원 사신 물리치라는 말은 한 마디도 없다. 이 때문에 定齋公[朴泰輔] 같은 분은 이 소가 北使 영접을 반대할 때 지은 것이 아니라 별개의 소인데, 역사 기록자가 잘못하여 여기에 수록하였고, 그 시기는 安師琦를 처벌하라고 할 때일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북원 사신 물리치라는 제3의 소가 있엇을 것인데 기록에서 빠트린 것이라고 추단하고 있다. 그리고 제목도 北元使臣 물리치라는 것이 아니고 다른 제목의 상소인데 북원 사신 물리치라는 논란에 싸잡혀 들어갔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소가 들어가 있는《高麗史》에서의 위치를 일단 긍정하는 토대 위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定齋公은 ‘북원 사신 물리치라는 소’에 그 말이 한 마디도 들어 있지 않다고 하여 그 제목에 의심을 두었는데, 이건 당연한 이야기다.《東文選》에 실린 많은 문장의 題目들은 문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高麗史》列傳 등에서 상소문을 뽑아 적절한 이름을 붙인 것이기 때문에 처음 제목 아닌 것이 많다. 그러다 보니, 鄭圃隱의 상소는 ‘請勿迎元使疏’가 되고, 선생의 소는 ‘請却北元使疏’로 되었던 것인데, 이는 선생 本傳의 ‘尙衷又上疏請却之曰’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 올릴 때의 소의 명칭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북원 사신 물리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라는 보다 강경한 제목이었을 것이다.

둘째, 이 소를 올린 시기를, 定齋公은 안사기를 처벌할 때의 소로 추정하나 이는 옳지 않다. 날짜는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高麗史》에서 이 소의 위치는 일단 북원 사신이 국경 근처에 머물고 있던 5월 경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첫 번째 소에,

“이제 또 들으니, 북방 사신이 김의와 더불어 叛한 자와 함께 돌아왔다고 하는데, 叛賊이 스스로 돌아온 것은 이미 죄가 있음에도 본국에서는 묻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서가 아니겠습니까.······”

라 했는데, ‘이제 들으니’의 이제는 선생이 국경 부근에 북원 사신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한 말이다. 여기서 말한 ‘북원 사신과 함께 온 金義의 從者’라는 자들은, 安師琦가 厚待한 從者, 말 그대로 ‘從者’들로서 스스로 죄가 없다고 생각해서 몇 달 전 제발로 먼저 고국에 돌아온 자들과는 달리, 金義의 반역에 적극 가담했으므로 스스로 귀국할 수가 없어 기회를 엿보다가 北元 사신을 따라 들어온 자들이었다.

그리고 이즈음 선생과 북원 사신 배척을 주장하던 左代言 林樸의 귀양 사건이 발생하는데, 대사헌 李寶林이 이인임의 뜻에 아부하여, 林樸이 전일 중서성에 올린 連名書에 서명하지 않았다고 논박하여 평민으로 폐해 귀양을 가게된 것이다. 선생은 귀양 가는 임박에게 준 餞別詩가 있으니[贈 代言林樸] ‘간신이 나라 팔 줄 어이 알았으랴, 역당이 편히 잠자도록 앉아서 볼 것인가.[那料奸人能賣國 坐令逆黨得安眠]’라고 한 것이다. 이 두 구절에서 나라를 팔아먹은 간신의 죄를 끝까지 밝히겠다는 선생의 凜然한 氣節을 엿볼 수 있음과 동시에, 강경한 소를 올리기 전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으니 이 사건 뒤 선생의 소가 올라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러 사람들이 북원 사신 물리치라는 주장은 하고 있으나 근본 문제는 두려워서 건드리지 못하고 지엽적인 문제만을 가지고 논란하는 데 대한 불만에서 선생은 소를 올린 것이고, 그 요지는 다음 인용문에서도 엿볼 수 있다.

“叛賊이 스스로 돌아온 것은 이미 죄가 있음에도 본국에서는 묻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金義가 반할 때 반드시 그렇게 하도록 시킨 자가 있을 것이니, 이것은 곧 위급한 일로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는 하나의 큰 기미입니다. 사세가 이러하니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자라도 그 이해와 시비의 소재를 잘 알 것인데도, 지금 말하는 자들은 조금도 여기에 대해 언급을 않으니, 이것은 禍患을 매우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사건의 경위를 훤히 알아 그 근원이 李仁任이 비밀리에 北元을 도운 데서 생성된 것인데, 당시 정몽주 등의 상소는 사신 물리치는 문제만 언급하여 그 뒤에 있는 병통의 근원은 지적하지 않으므로 선생은 ‘어째서<혹은 누구>냐’ 라고 일곱 번이나 물었고, 두 번째 상소에서는 ‘죄목을 열거한 것(數罪)’이 넷인데, 그 죄인이 이름은 밝히지는 않았지만 바로 이인임을 지적하여 처벌하라는 것이다.

선생의 이 상소를 접한 이인임은 반격할 기회를 모색하다가 李詹 등의 상소가 있자 이를 일망타진하는 계기로 삼은 것이다.

4. 後代의 評價와 追崇

1) 先賢들의 評價

고려시대에 忠臣烈士가 무수히 많지만, 특히 朝鮮에 와서 가장 숭앙을 받은 이는 圃隱·潘南 양 선생이다. 포은이 高麗 왕조와 운명을 같이한 大節이 있기는 하지만, 고려와 운명을 함께한 충신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유독 포은을 앞세우는 이유는 조선이 性理學을 정치지도이념으로 채택한 국가이기 때문인데, 포은은 성리학에 造詣가 깊어 ‘東方理學의 祖’로 추앙되었고, 선생 또한 공민왕 후반기, 목은·포은과 함께 성균관에서 諸生을 敎誨하면서 心身性命의 學의 이치를 연구하여 儒家를 宗主로 삼음으로써 儒風과 학술을 일신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국가를 위해 夷狄을 배척하다가 幽明을 달리하였다. 무엇보다 請却北元使疏가《東文選》에 실려 후세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그 글을 읽고 그 氣節을 흠모하게 된 때문이었다. 같이 화를 당한 埜隱 田祿生은 선생보다 지위가 높은 선배로 文武兼全한 宰相이었지만, 道學을 唱導한 실적이 없고, 상소문 같은 근거 자료가 없어 후세에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이를 그 후손들은 여한으로 여긴 것이다.

退溪선생은 嘯皐선생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학식이 낮고 견문이 없어 우리 역사 속에서 元나라 섬기기를 반대한 潘南公의 상소를 보고는 마음이 매우 격동했는데, 효성 있는 그대 형제들의 선조가 되는 줄은 몰랐다.”

하였고, 牛溪선생의 글에는 두 분을 이렇게 평했다.

“정몽주는 호매하기가 비할 데가 없는데다 충효의 큰 절개가 있었고, 학문을 좋아하여 나태하지 않았으며, 성리학을 깊이 연구해서 얻은 바가 있었다. 큰일에 처하여 크게 의심스러운 부분을 결단하니 당대에 王佐의 재주라고 일컬어졌고, 節義로써 죽음을 맞이했다. 朴尙衷은 성품이 강개해서 큰 절개가 있었는데, 처신과 벼슬살이에서 반드시 올바른 도로 행동하였고, 의롭지 못하면서 부귀한 이를 멸시하였다.”

2) 國典의 襃獎

선생에 대한 崇慕의 念은 조선 후기 性理學 이념의 深化와 더불어 高揚되는데, 肅宗朝에 와서는 드디어 국가의 恩典을 받게 되었다. 즉, 肅宗 7년(1681) 봄에 領中樞府事 宋時烈이 經筵에 입시하여 아뢰기를,

“근래에 정몽주의 사당을 수리하고 그 후손을 錄用하게 되니 사람들이 감동하여 발돋움 하고서 기대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정몽주와 동시대 사람으로 박상충이란 이가 있었으니, 정의감이 넘치고 충성심이 깊은, 참으로 한 시대의 명신이었으나 불행히도 간신의 모함을 받아 곤장을 맞고 유배 도중 죽었는데, 이 사람이 우리 동방에 끼친 공로는 매우 큽니다. 隱微한 것[佛敎]에서 나와 높은 경지로 옮겨 가고, 오랑캐를 배격하고 周[明]를 높임으로써 지금 우리 동방으로 하여금 禮儀의 가르침이 있도록 알게 한 것은 바로 박상충 및 정몽주의 공입니다. 조용히 생각해 보건대 정몽주에게 한 것과 같은 형식으로 推獎함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이 때 檢討官으로 시립하고 있던 定齋公(泰輔)은 부연 설명하기를,

“상충은 신의 선조로서 경륜과 학술이 정몽주와 이름을 나란히 했습니다. 일찍이 상소하여 明나라를 배반하고 元나라와 통한 이인임의 죄를 논박하다가 화를 입었습니다. 肅宗이 이를 받아들여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하니, 대신들의 일치된 의견은 이러했다.

“상충은 고려 말기, 교화가 민멸되고 佛氏만 숭상하던 때에 당시의 여러 어진 이들과 學宮[成均館]에서 강론하여 程朱의 성리학을 唱導하여 밝혔으니 그 공이 정몽주에 버금갑니다. 전후로 글을 올려 北元을 섬기자는 자들과 힘껏 쟁론하여 이치가 분명해지고 의리가 바로잡아졌으며, 春秋大義의 本旨를 깊이 터득하여 우리 동방으로 하여금 오랑캐가 되는 것을 면하도록 함으로써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도록 하였으니, 그 공 또한 정몽주와 더불어 같다고 하겠습니다. 상충은 정몽주와 더불어 같은 시대에 도를 같이하여 뜻이 같고 행적이 나란했는데도 홀로 襃獎이 더해지지 못한 것은 진실로 儀典 절차를 빠뜨린 것이 됩니다.”

이리하여 시호를 文正이라 추증하고, 선생의 고택이 있던 마을인 五冠里에 사당을 세워 제사를 드리니 이것이 五冠書院이다. 선생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이러하다.

“천품이 고요하고 말이 적었으며 자질이 뛰어났다. 강개한 포부가 있어 生業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性理學에 조예가 깊었고 天文學을 自得하여 星命學에도 정통하였다. 집에서는 효도하고 우애가 있었으며, 임금을 섬김에는 충성과 의리로 하였다. 관직을 맡았을 때는 부지런하고 삼가 조금도 마음에 거리낌이 없어, 의롭지 않고서 부귀하게 된 이를 멸시하였다. 高麗의 운이 끝나려 할 때 그 존망의 기틀이 북원을 섬기자는 논의에 있다는 것을 훤히 알고서 분발하여 자신의 안위를 돌아보지 않고 앞장서서 그 근원을 격파하려 하다가 화를 당하였다.”

參考文獻

史書;《高麗史》·《高麗史節要》·《燃藜室記述》·《東史綱目》

文集;《三峰集》·《陽村集》·《定齋集》

論著; ➀ 朴贊洙,《高麗時代 敎育制度史 硏究》, 2001. 景印文化社

➁ 金塘澤, <高麗 禑王元年(1375) 元과의 외교관계 再開를 둘러싼 정치세력 간 의 갈등> 震檀學報83

➂ 김순자, <고려말 대중국 관계의 변화와 신흥유신의 사대론> 《역사와 현실》15

[添附] 1. 牧隱·潘南·圃隱 세 분의 師友關係에 대한 誤解

세상에서는 반남선생이 목은의 門下生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陽村 權近이《三峰集》 서문을 지으면서 후배인 鄭夢周와 목은의 직접 제자인 鄭道傳ㆍ李崇仁의 뒤에다 선생을 배열하고, 20세 연하인 자기까지 ‘升堂한 분들’이란 隊列에 포함시킨 때문이다. 이것이《三峰集》과《陽村集》에 모두 수록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짐으로써《燃藜室記述》書院條에는 五冠書院을 설명하면서 ‘朴尙衷은 牧隱의 門下生이다.’라고까지 수록하기까지에 이른 것이다.[《燃藜室記述》別集 제4 書院條] 그 관련 序文은 다음과 같다.

“우리 좌주(座主) 목은(牧隱 李穡, 1328-1396) 선생이 일찍 가훈(家訓)을 받들어 벽옹(辟廱 元의 國子監)에 입학함으로써 정대정미(正大精微)한 학문을 이루었으며, 돌아오자 유림들이 모두 존숭하였으니, 이를테면 포은(圃隱) 정공(鄭公 鄭夢周, 1337-1392)ㆍ도은 이공(陶隱李公 李崇仁, 1349-1392)ㆍ삼봉 정공(三峰鄭公 鄭道傳, 1342-1398)ㆍ반양 박공(潘陽朴公 朴尙衷, 1332-1375)ㆍ무송 윤공(茂松尹公 尹紹宗, 1345-1393) 등이 모두 다 승당(升堂)한 분들이었다.······근(近 權近, 1352-1409)은 비록 재주 없는 몸이지만 다행히 종유(從遊)의 반열에 참여하여 여론(餘論)을 들은 바 있고······[吾座主牧隱先生早承家訓 得齒辟廱 以極正大精微之學 旣還 儒士皆宗之。若圃隱鄭公·陶隱李公·三峯鄭公·潘陽朴公 尙衷·茂松尹公紹宗 皆其升堂者也······近雖不才 幸得與從遊之列 以聞餘論。······]

다 알다시피 선생은 목은보다 4살 아래로 同榜及第者이다. 물론 목은은 급제 후 원나라 제과에서 제2갑 제2로 급제하여 座主 歐陽玄으로부터 칭찬을 들어 천하에 명성을 떨쳤지만, 선생과는 손위 처남이요 동년배였지 師弟 관계는 아닌데, 이렇게 후세에 인식된 것은 ‘升堂한 자이다’라고 한 한 구절 때문이다. 목은을 ‘入室’의 지위에 올려놓고 목은의 문하생들까지 포함한 인물들은 ‘升堂’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선생도 싸잡혀 門下生으로 인식하게 만든 결과이다. 그러나 ‘승당’이란 말은 문하생이란 뉘앙스도 있기는 하지만, 본래의 뜻은 ‘상당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란 뜻으로《論語》<先進>의 “子曰 ‘由之鼓瑟 亥爲於丘之門’ 門人不敬子路 子曰 ‘由也升堂矣 未入於室也’”에서 나온 것이다. 자로가 거칠게 비파 타는 것이 못마땅하여 공자가 한 말씀하자 그 말을 들은 문인들이 자로를 경시하는 태도를 보이자. ‘由는 상당한 경지에 오른 인물이니 너희들이 얕보아서는 안 된다.’라는 경계의 뜻으로 한 말이다.

고려 왕조와 운명을 함께 한 포은의 忠義大節은 조선조에 더욱 들어와 더욱 빛을 발하여 忠節의 표상이 된 반면, 선생은 포은보다 5년 年長이고 급제는 7년 앞섰음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망하기 17년 전에 고인이 되어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까마득히 잊혀졌다. 게다가 양촌이《三峰集》서문을 쓰면서 선생을 목은 제자인 三峰 뒤에 거론함으로써 목은의 제자로 인식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식은 조선 후기에까지 계승되어 李肯翊의《燃藜室記述》에까지 수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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