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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과 가묘에 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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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5-29 16:25 조회5,1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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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가을로 가묘에 시제(음력 2, 5, 8, 11월에 집안의 사당에 지내는 제사.)를 지내시며 우리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중봉 조헌 선생 같은 분은 집이 매우 가난하셨지만, 흰 밥과 나물 국만을 제사를 올리면서도 제사지내는 걸 거르지 않으셨다.
내가 항상 이를 사모했건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제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가례에 따라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거듭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아버지는 시제를 지내기 전에 반드시 먼저 중류제(경, 대부가 토지신에게 지내는 제사. '중류'는 토지신이다.)를 친히 주관하셨는데, 호장으로 하여금 아헌(제사 때 두 번째 술자을 올리는 일. 술을 올리는 절차를 헌작이라고 하는데 초헌, 아헌, 종헌 등 세 차례가 있다. 초헌은 반드시 주인이 행하며, 아헌은 그 다음의 어른이 맡게 되어 있었다.)을 맡게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제야 사사로운 제사지만, 중류는 이 고장의 토지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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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야천(박소) 선생의 묘가 합천군 화양동에 있었는데, 서울에서 너무 멀어 오랫동안 돌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안의에 부임하셔서 여러 차례 성묘하고 제사를 지냈다. 당시 재실(묘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어놓은 집)은 이머 허물어지고 제전마저 없어진 상태였다. 이에 아버지는 서울에 있는 여러 종친들에게 편지를 띄웠으며, 몸소 주관하여 재실을 세우고 제전을 마련하셨다. 일족으로서 도내에서 고을 원을 하고 있던 분들 역시 각각 돈을 내어 이 일을 도왔다. 재실과 제전을 산 아래에 거주하는 사람에게 맡길 경우 제전을 횡령하고 재실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등 이전과 같은 폐단이 있을 것 같아 합천군의 길청(지방 관아의 아전들이 일을 보던 곳)에 소속시켜 청명에 제사지내게 했다. 아버지는 재실에 걸 기문을 친히 지으셨다.

그 뒤, 재실에서 제사를 지낼 때 합천군 호장이 축문을 읽었다는 비방이 있었다. 아버지는 족형인 근재공 윤원에게 답장을 보내어 그런 소문이 사실이 아님을 해명하셨다. 기문과 편지는 모두 문집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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