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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잘못알려진 청송심씨네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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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태서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7-02-01 09:59 조회5,2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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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무씨가 운영하는 반남박씨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글이 올라 왔기에 잘못알려진 청송심씨 가문의 역사사실을 수정하고자 합니다. Name 박천용 Subject 청송심씨와-_- 반남박씨랑, 원수 진거있나요-_-;; 청송심씨분이 -_-과거는 잊지못한다네요;; 저보고 원수래여;; 박승 [2007/02/01] :: 청송심씨들은 아직도 기렇게 말하더군요! 가해진인 반남박씨는 다 잊었는데.... --------------------------------------------------------------------------- 청송심씨가 반남박씨를 원수라고 하는 이유는 조선조 초 1418년 태종이 선위(왕위를 물려줌)하여 세종이 즉위하자 영의정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갔을 때, 심온의 아우 도총제 심정()이 상왕(上王)의 군국(軍國) 대사(大事) 처리에 불만을 말하는 것을 병조판서 박습(朴習)이 밀고하여 옥사(獄事)가 일어나 그 수괴(首魁)로 지목되어 귀국 도중 의주(義州)에서 체포된 뒤 수원(水原)에서 사사(賜死)된 이유가 반남박씨의 선조 평도공 박은 할아버지 때문이라는 이유에서 이다 그러나 전혀 근거 없는 일로 평도공께서 태종과 아주 가까운 사이이기에 평도공에게 뒤집어 씨운것이다 청송심씨의 심온이 자기가 억울하게 죽게된것을 태종때문이라고 하면 심씨 일가가 모두 죽게되니까 평도공에게 한 풀이를 하는것이다. 심온은 그당시 정세로 보아 죽을 수밖에 없는 정황이 었으나 그러한 시대의 흐름을 모르고 있던것이다. 태종은 의정부에 집중된 신권(臣權)의 권력을 분산시킴으로써 왕권강화를 꾀한 것이다. 태종의 강력한 왕권은 바로 이러한 제도개혁을 통해 담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종의 국정 운영은 자기의 친척이나 외척이 또는 공신들이 세력을 형성하는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첫 번째 조치로 太宗 4년에 일어난 李居易(이거이)와 李佇(이저) 부자의 獄事(옥사)는 잠재적인 위협세력에 대한 太宗의 선제공격이었다. 이거이의 아들 李伯剛(이백강)은 1399년 방원(芳遠)의 맏딸 정순공주(貞順公主)와 혼인하여 청평위(淸平尉)가 되었다. 이들 이거이는 두 차례의 왕자 난에 아들 이저와 함께 가담해 父子가 나란히 정사 및 좌명 1등공신에 책봉된 인물로 이방원의 사돈 집안이었으나 잠재적 위협세력 이기에 모두 제거했다 두 번째 사건 외척(外戚)을 내치다 태종(太宗) 7년 7월에 영의정부사 李和(이화) 등이 문득 태종의 처남인 민씨 형제의 처벌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나섰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빚어진 것일까. 상소의 내용에 그 단서가 있다. 『태종의 처남인 민무구와 민무질 등은 지난해에 전하께서 장차 내선(內禪)코자 할 때, 온 나라 臣民(신민)이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있는데도 이들은 스스로 다행하게 여겨 기뻐하는 빛을 얼굴에 나타냈습니다. 전하께서 輿望(여망)을 좇아 복위하자 온 나라 신민이 기쁘게 여기는 데도 이들은 도리어 이를 슬프게 여겼습니다. 이는 대략 어린 세자를 끼고 威福(위복)을 마음대로 하고자 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불충한 자취를 드러낸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을 이유로 처남 사형제를 모두 죽이고 가족을 노비로 보내 앞으로 다음세대의 왕을 끼고 세력을 부리는것을 막았다. 세 번째 태종 8년에 들어와 太宗의 사위인 조대림의 모반무고 사건이 터져 나왔다. 이들을 모두 제거하고 네 번째 이숙번 숙청 태종은 민씨 형제를 제거하면서 양녕과 교결한 혐의를 받고 있던 이숙번을 일거에 내쳤다. 이숙번은 太祖 2년에 등과한 뒤 하륜의 소개로 왕자의 난 때 적극 가담해 대공을 세운 인물이다. 어린 나이에 승승장구하며 무관의 고위직을 두루 거친 그는 매우 방자했다. 태종은 공신임을 내세워 방자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숙번을 왕권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 가능성이 가장 큰 인물로 지목하고 있었다. 태종 16년(1415) 6월 태종은 갑자기 이숙번에게 연안의 농장에 거주토록 명을 내렸다. 다섯 번째 태종이 우려한 바대로 상왕(왕의 아버지)인 그가 군사대권을 쥐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후일을 도모코자 하는 무리가 나타났다. 태종의 의중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덫에 걸린 인물이 바로 병조참판 강상인이었다. 당시 강상인은 비록 작은 사안이기는 했으나, 군사에 관한 일을 세종에게만 보고했다. 태종은 이를 군사에 관한 일은 자신이 처결하겠다고 했던 선언에 대한 심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이 사건에는 세종의 장인이자 영의정이던 심온까지 연루됐다. 심온은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오던 중 압록강을 넘자마자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자진(자살)했다. 강상인은 가장 혹심한 車裂刑(거열형)에 처해졌고, 이에 연루된 인물은 모두 참수되었다. 이는 세종이 즉위한 후 외척인 심씨 일문이 발호하는 것을 막기 위한 예방조처이기도 했다 심씨네는 비록 세종의 왕비 처가였을 뿐만 아니라 태조의 둘째 사위인 심종이 세종대왕의 처 삼촌으로 심종은 태종의 동모제(同母弟= 태종의여동생) 경선 궁주(慶善宮主)에게 장가들어 청원군(靑原君)에 봉(封)해졌으나, 이차 왕자의난때 방원의 적인 회안군(懷安君) 이방간(李芳幹)과 가까운 사이로 방간이 유배가 있을때도 방간과 교류가 있어 유배가 있는 방간에게서 선물을 받고 사통(私通)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쫓겨나 귀양갔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으로 죽었고, 이런경력이 있는 집안이라 태종이 항상 경계의 대상이 된 가문이다 위의 여러 가지 정황의로 볼때 심씨네는 태종으로부터 견제를 받을 가능성이 많은 집안이 었다가 강상인 사건에 연루되어 심온이 죽게 된다. 이는 후대의 역사학자들도 모두 인정하는 태종의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에 의한 사건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사건들로 태종의 왕권 강화 정책이 세종 즉위 후 정치 ·경제 ·문화면에 훌륭한 치적을 쌓아 수준 높은 민족문화의 창달과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당시의 왕의 정책방향을 모르고 죽음에 이른, 심씨네의 자기의 잘못을 우리 박씨가문에 돌리는것은 어리석은 해석이다. 절대로 박씨네가 청송심씨네의 원수가 될 이유가 없는데, 조선조 역사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안효공 심온의 억울한(?) 죽음만을 해석하는 역사를 이해 못하는 심씨네가 안타까울 뿐이다 조선조 역사에서 열 정승이 한 왕비를 당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왕비의 위세가 대단하다는 말이다 안효공이 영의정이 된것은 세종대왕 왕비의 덕 이고 안효공 아들 심회가 세종의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동생으로 영의정에 올랐다. 우리나라에 상신 중에 대부분이 과거급제를 한분이 상신이 되는데 심회라는 분은 과거급제를 안하고도 소헌왕후 덕분에 음사로 상신이 되었으니, 왕비의 위세가 대단함을 알수있다. 역사에는 만약이 없으나, 안효공이 살아 있었다면 청송심씨의 위세가 얼마나 떨쳣을까. 그 위세가 있었다면, 세종대왕이 훌륭한 정사를 보았을까 의심이 된다. -------------------------------------------------------------------------- 조선일보 2006년 2월 18일에서 [이덕일 사랑] 태종과 외척들 국왕이나 왕세자의 장인을 ‘국구(國舅)’라고 하는데, 동반(東班) 정1품에 제수되는 척리(戚里)이다. 왕의 외척(外戚)을 척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한(漢)나라 때 장안(長安·서안)의 척리라는 마을에 임금의 인척(姻戚)들이 살았던 데서 기인한다. 조선의 척리는 품계는 높아도 정사(政事)에는 참여할 수 없었는데, 이런 원칙을 만든 임금이 태종이었다. 태종이 부인인 원경왕후 민씨의 친동기 넷을 사형시킨 사건은 유명하다. 민무구·무질은 어린 세자(양녕대군)를 끼고 권력을 잡으려 했다는 ‘협유집권(挾幼執權)’ 혐의로 처형했고, 무휼과 무회도 그 연장선상에서 제거한 것이다. 태종은 상왕 시절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도 제거했다. 영의정 심온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갈 때 전별하는 거마(車馬)가 장안을 뒤덮었다는 보고를 듣고 자신의 사후 세종의 왕권 강화를 위해 제거한 것이다. 심온의 동생인 총제(總制) 심정이 상왕 경호 문제를 언급한 것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심온까지 연루시킨 것이다. 이 비정한 외척 제거에 대해 이익(李瀷)이 ‘성호사설’인사문에서 “민(閔)씨·심(沈)씨 두 집안이 함께 흉화(凶禍)를 당하게 되었으니, 대개 먼 장래를 생각함이 매우 깊었던 것이다”라고 긍정했듯이 역사의 평가는 냉혹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한문제(漢文帝)가 처남 두광국(竇廣國)을 쓰지 않고, 외숙인 장군(將軍) 박소(薄昭)를 죽인 것을 들어 높이 평가한다.그런데 외척의 정사 금지는 꼭 임금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태종 때 양녕대군의 장인 김한로(金漢老)의 처남(妻男)이었던 대호군(大護軍) 전맹겸(全孟謙)이 저자 사람의 생선을 빼앗자 경제 문제를 담당하는 경시서(京市署)는 즉각 고발했고 사헌부도 그를 논박했다. 태종이 양녕대군의 부인 숙빈(淑嬪)을 생각해 용서했으나 두 기관은 재차 고발했고, 태종은 할 수 없이 태(笞) 40대를 때렸다. 대통령 사돈의 음주운전 사고를 뒤덮기에 급급했다는 비난을 받는 현재의 경찰과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본받아야 할 엄격한 근무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입력 : 2006.02.17 18:51 48' 참고; 자유게시판 197 번 "평도공 박은과 청송심씨 안효공 심온과 관계" 를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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