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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곽공 박동열 순안어사를 위한 시서(詩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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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8-02 15:13 조회6,0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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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중 역사  자료를 정리하던중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남곽공의  자료를  발견하였기에  선조님의 연구에  도움이 될것 같아  올립니다.
남곽공 연구에 힘쓰시는    희서씨  춘서씨  명서씨  찬이씨에게 좋은 자료가 될것 같습니다.

간이집 제3권(최립)

함경도 순안어사(咸鏡道巡按御史)로 떠나는 정랑(正郞) 박열지(朴說之)를 전송하며 지어 준 시서(詩序)

내가 일찍이 중국의 경사(京師)로 사신의 명을 받들고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우리 일행의 도정(道程)이 요동(遼東) 땅 전역 일대를 관통해서 거쳐 가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일대에 순무어사(巡撫御史)와 순안어사(巡按御史)가 각각 독자적인 아문(衙門)을 설치해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 아문 앞에는 창을 든 병사들이 도열해 서 있었으며, 장관(將官)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사령(使令)들이 갖가지 일을 주선하는 등 매우 성대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고 어사가 한 번 출행(出行)할 때에는 수행하는 의장대와 기마병이 매우 많았는데, 두 어사의 등위(等位)와 권위(權威)는 대략 비슷하였다.내가 생각하기에 어사의 아문을 이처럼 특별히 두 개나 설치한 것은 요동 지역이 워낙 광활하기 때문에 하나는 광녕성(廣寧省)에 두고 하나는 요동성(遼東省)에 두어 변방의 관리들을 규찰(糾察)하는 데에 편리하도록 하기 위함인 듯하였다. 따라서 그 명칭에서 비록 차이를 보이고는 있었지만, 사실은 일체(一體)라는 느낌이 들었다.그러다가 또 이와 관련된 부수적인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얻어 들은 바에 의하면, 요동(遼東)은 산동 포정사사(山東布政使司)에 속해 있었는데 그 참의(參議) 한 사람이 광녕(廣寧)을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으니 바로 하나의 포정사(布政使)였고, 진수 총병관(鎭守摠兵官)이 역시 광녕에 본부(本部)를 설치하고 있었는데 그 부관(副官)이 또 요동을 진수(鎭守)하고 있었다. 요컨대 포정(布政)은 민사(民事)를 주관하고 진수는 병사(兵事)를 주관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 하나의 방면(方面)을 담당하고 있는 관원에 비교해서 말한다면, 포정은 관찰사(觀察使)와 비슷하였고 진수는 바로 절도사(節度使)와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포정사의 체통(體統)으로 말하면 우리나라의 관찰사와는 결코 같지 않았으며, 그 엄한 기강(紀綱) 역시 우리나라의 경우 변방을 지키는 관아에서나 겨우 찾아볼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그런데 또 일찍이 본 바에 의하면, 순안어사가 순시하러 나갈 때에는 포정과 참의가 지경(地境) 위에까지 배행(陪行)하였는데, 이는 마치 우리나라의 주현(州縣)을 관할하는 관리가 사신의 명을 받든 이에게 행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이를 통해서 또한 알 수가 있었다.그리고 순무어사(巡撫御史)의 경우는, 온 가족을 대동하고 임소(任所)에 가서는 민사(民事)와 병사(兵事)를 막론하고 모두 통할(統轄)하면서 관할 구역 안을 제압하고 있었으니, 이는 우리나라의 경우 관찰사로서 부윤(府尹)을 겸한 자와 서로 비슷하다고 하겠다. 반면에 순안어사의 경우는, 단독으로 수레를 타고 가서 오로지 규찰(糾察)하고 적발(摘發)하는 일을 전담하였으니, 이는 바로 우리나라에서 특별히 파견하는 어사의 경우와 동일하다고 하겠다. 요동 지역이 이런 방식으로 운영되는 것을 보면, 중국 전역도 대개는 이와 같으리라는 것을 족히 알 수가 있다.그러나 우리나라의 지방은 별로 광활하지도 않을뿐더러 물력(物力) 또한 너무도 부족하기 때문에 순안어사의 아문을 별도로 설치할 수가 없다. 게다가 주전(廚傳 숙식(宿食)과 거마(車馬) 등의 대접)하는 일과 관련하여 주현(州縣) 전체에 그저 폐해만 끼치고 있는 실정이고 보면, 한번 중국처럼 아문을 상설(常設)해 보고 싶어도 어려운 점이 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그렇긴 하지만 우리나라가 왜구(倭寇)의 침입을 받은 이래로 중앙이고 지방이고 온통 기강이 흐트러진 나머지 장리(將吏)가 법을 두려워하는 일이 없어 관찰사의 위풍(威風)이 미치지 않는 점이 있고 보면, 순안어사를 파견하는 일을 또 어떻게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북방으로 말하면 서울과 현격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인 데다가, 그곳에서 벼슬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더라도 거의 모두가 무부(武夫)로서 자기 몸만 살찌우고 백성들을 병들게 하는 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규찰하고 적발하는 일을 어찌 급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지금 우리 박 정랑(朴正郞) 선생이 순안어사로 함경도에 가게 되었는데, 나는 선생이 원래 한 시대를 바로잡을 뜻을 갖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터이다. 따라서 선생이 우선 모범적으로 상의 유지(有旨)에 걸맞게 직책을 제대로 수행한다면, 앞으로도 순안어사의 아문을 상설할 필요가 없이 그저 때때로 어사를 파견하기만 해도 영구히 일로(一路)를 단속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령 타도(他道)의 경우라 할지라도 이 일을 행할 만한 적임자를 가린 뒤에 선생이 이미 행한 이 길을 본받아 행한다면 어찌 주현(州縣)의 폐단을 맑게 바로잡을 수가 없겠는가.우리 선생은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그곳에 가서 부디 열심히 직책을 수행하기를 바라면서, 다음과 같이 시 한 수를 적는 바이다.


국가가 동남쪽을 근심하고 있는 터에 / 國家憂東南
지금 어사가 북방으로 가는지라 / 御史今赴北
뭐가 그리 급하냐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 人謂此何急
천하척(天下脊)이 중한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 / 不知重在脊
모두가 깜짝 놀란 임진년의 난리 때도 / 壬辰事可駭
철령에서 적을 먼저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 鐵嶺先納賊
그러니 그대의 도 어찌 무력(武力)을 취하리요 / 子道豈折衝
부디 덕을 베풀어서 백성을 단합시키시라 / 凝民務宣德

[주D-001]천하척(天下脊) : 높은 산악 지대로 되어 있는 북방의 험한 요새지를 말한다. 《사기(史記)》 장의열전(張儀列傳)의 “밝은 임금이 엄숙하게 기강을 바로잡고 지혜로운 장수가 무위(武威)로써 제압하면, 비록 군대를 내보내지 않더라도 험준한 북쪽의 상산(常山)을 석권하여 천하의 등뼈가 되는 지역을 반드시 꺾어놓게 될 것이다.[必折天下之脊]”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簡易集]최립 시문집

조선 중기의 문신 최립(崔岦:1539~1612)의 시문집.

9권 9책. 목판본. 자손들이 가난하여 그가 남긴 문집을 출판하지 못했다. 조정에서 이런 사실을 알고 1631년(인조 9)에 교서관(校書官)에서 간행했다. 문장과 관련된 저자의 견해가 많이 실려 있다. 권8의 〈삼일포 三日浦〉는 강원도지방의 명승지를 둘러보고 지은 시로서 대표작으로 꼽힌다. 권5의 〈괴원문록 槐院文錄〉에는 중국과 왕래한 문서인 〈정축서 丁丑書〉·〈신사서 辛巳書〉 등 임진왜란을 전후로 한 시기의 외교문서가 실려 있다. 이외에 왜구의 침입을 보고하는 장계(狀啓) 등도 있다. 저자의 문학세계와 임진왜란을 전후로 한 국제관계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 최립

최립(崔岦)에 대하여
1539년(중종 34)∼1612년(광해군 4). 조선 중기의 문인.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입지(立之), 호는 간이(簡易)동고(東皐).

진사 최자양(崔自陽)의 아들로 빈한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타고난 재질을 발휘하여 1555년(명종 10) 17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어 여러 외직을 지낸 뒤 1577년(선조 10) 주청사(奏請使)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1년
재령군수로 기민(飢民)을 구제하는 데 힘써 표리(表裏)를 하사받았고, 그해 다시 주청사질정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4년
호군(護軍)으로 이문정시(吏文庭試)에 장원, 1592년 공주목사, 이듬해 전주부윤을 거쳐 승문원제조를 지내고, 그해 다시 주청사질정관, 1594년 주청부사(奏請副使)가 되어 각각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판결사(判決事), 1606년 동지중추부사, 이듬해 강릉부사를 지내고 형조참판에 이르러 사직하고 평양에 은거하였다. 그는 당대 일류의 문장가로 인정을 받아 중국과의 외교문서를 많이 작성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중 명나라와의 관계가 빈번하여지자 문장으로 보국(保國)하였다. 그리고 중국에 갔을 때 중국문단에 군림하고 있던 왕세정(王世貞)을 만나 문장을 논하였고, 그곳 학자들로부터 명문장가라는 격찬을 받았다.

초(草)‧목(木)‧화(花)‧석(石)의 40여 종을 소재로 한 시부(詩賦)가 유명하며, 역학(易學)에도 심오하여 《주역본의구결부설(周易本義口訣附說)》 등 2권의 저서가 있다. 그의 문(文)과
차천로(車天輅)의 시, 한호(韓濩)의 서(書)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일컬었다. 그는 시보다 문으로 이름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에서도 소식(蘇軾)과 황산곡(黃山谷)을 배워 풍격이 호횡(豪橫)하며, 질치심후(質致深厚)하고 성향(聲響)이 굳세어 금석에서 나오는 소리 같다는 평을 들었다.

문장은 일시를 풍미하였다. 당대 명나라에서 유행하던 왕세정 일파의 문장에 경도하여 고아간결(古雅簡潔)하며, 법도에 맞는 글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의고문체(擬古文體)에 뛰어났기 때문에 문장이 평이한 산문을 멀리하고 선진문(先秦文)을 모방하여 억지로 꾸미려는 경향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글씨에도 뛰어나 송설체(宋雪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문집으로 《간이집》이 있고, 시학서(詩學書)로 《십가근체시(十家近體詩)》《한사열전초(漢史列傳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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