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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명종과 남일공 그리고 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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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한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9-23 19:07 조회4,2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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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宗과 李滉, 그리고 南逸公 朴應男의 智慧.

임금 명종明宗이 아버지인 중종中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성균관 대사성 이황李滉은 사직서를 내고, 고향인 예안의 토계로 내려가 양진암을 지으면서 토계를 퇴계退溪로 고치고 자신의 아호로삼고서 학문 연구에 정진하면서 후학을 가르쳤다.

그 후 명종이 여러 차례 벼슬을 내리며 불렀으나 사퇴하고 응하지 않다가 임금의 간절한 부름을 이기지 못하고 올라와 1548년에 단양군수로 나갔다가, 곧 풍기군수로 옮겨 백운동서원을 고처 짓고 소수서원이라고 하고 사액을 받았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1945년 형인 이해李瀣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죽자, 벼슬에 뜻을 잃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후 여러 차례 벼슬을 내리며 불렀으나 올라오지 않았다.

이황을 불러올리지 못하여 심기가 편안하지 않던 명종은 1567년(명종22) 5월이 되자, 이번에는 한직인 판중추부사의 벼슬을 내리고 불러 올렸다.

이황은 고향에 앉아서 하지도 않은 벼슬만 자꾸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이황은 이번에도 벼슬을 받지 않았으며 임금의 부름에도 올라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크게 노한 명종은 엄명을 내렸다.

“즉각 금부도사를 경상도 예안 땅으로 보내어 저 오만한 선비 이황을 잡아 올려라. 바로 거행할 지어다.”

그러자 당시 바른말 잘하기로 정평이 난 대사헌 朴應男이 급히 들어왔다.

“전하, 하늘아래 오직 한 분이신 성상을 격노케 하여 환우까지 더하게 하였다하니 이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하온데 신이 생각하기에 이번 금부도사가 당도하면 이황은 더욱 굽히지 않고 출사를 거절 할 것입니다.

마음으로 굽히지 않는 자는 죽여도 이기지 못하옵니다. 잘못하시다가는 후세에 성상께서 시비 들으실 일이 일어나고 말 것입니다.

이황은 유림과 학계가 존경하는 현자이옵니다.

옛적 중국의 요임금 때에도 허유許由같은 고명한 선비는 임금이 구주九州의 장을 하라고 부르자 그 말을 들은 귀조차 더렵혀졌다 하여 기산箕山의 영수潁水에 씻었습니다. 이때 소보巢父가 송아지를 끌고 와 그 물을 먹이려 하자 허유는 소보더러 ‘네 송아지의 입이 더러워지겠다, 저 상류로 가서 물을 먹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진나라의 개자추介子推는 벼슬을 마다하고 숨는데, 임금이 성화같이 찾으러 다니자 숲속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숲에 불을 지르면 나오겠지 하고 숲에 불을 질렀으나 개자추는 끝내 나오지 않고 불에 타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사옵니다.

이황 역시 한번 안 나가겠다고 생각하고 숲에 숨으면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어명을 받들지 않을 사람이 아닌 가, 신은 짐작합니다.“

박응남의 말을 이해한 명종은 즉각 형방승지를 시켜 이황을 붙잡으러 보낸 금부도사를 급히 불러올리도록 하였다.

그런 임금에게 박응남은 다음 달인 6월에 중국에서 종계변무宗系辨誣문제로 칙사가 올 때, 이황에게 그 칙사를 접빈하는 일을 맡도록 함이 어떻겠느냐는 뜻을 말씀드렸다.

“일단 이황이 그 일을 맡는 것으로 하여 명나라에 통지하였다고 하면 이황도 아니 나올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 조정에서 관직생활을 하도록 설득하면 되지 않겠사옵니까?”

때마침 중국에서는 칙사가 나오게 되어 있었는데, 이 무렵 조선은 종계변무로 인해 큰 신경을 쓰고 있었다.

종계변무宗系辨誣란 왕실의 족보를 고쳐 바로잡는 일이었다.

명나라의 태조실록太祖實錄 대명회전大明會典등의 서적에는 이씨 왕조의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고려 말의 권신이었던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되어 있었다.

조선에서는 누차에 걸처 정정을 요구하며 끊임없이 명나라에 주청하였으나, 명나라는 저희 태조실록을 함부로 고칠수 없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이 개국한 지 170년이 되는 이때까지도 그 문제는 조선의 큰 현안으로 남아 있었다.

이때로부터 4년 전인 1563년(명종18)에도 임금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이를 소청하였고 명나라는 대명회전에 있는 기록을 고치는 것을 겨우 허락하여 오기誤記된 이태조 조상들의 성휘姓諱를 수정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아직도 명나라 태조실록에는 이성계의 아버지가 이인임으로 되어 있었다. 종주국 명나라의 실록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작은 일이 아니었다.

명나라 조정은 그것이 오기인줄 번연히 알면서도 조선의 약점을 잡아놓는 구실로써 그대로 놓아두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 오는 칙사에게도 퇴계 이황과 같은 거유巨儒가 접빈하여 설득해 내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문제는 1584년(선조17)에 가서야 완결이 되어, 거기에 공이 있는 사람들을 크게 포상하고, 이른바 광국공신光國功臣19명이 책록冊錄되는 큰 경사로 삼을 정도였다.

과연 박응남의 말처럼, 이 같은 어명에는 퇴계 이황도 아니 나올 수가 없어, 1567년(명종22) 6월 초순 비로소 고향을 떠나 한양 길에 올랐다.

1567년(명종22)음력 6월9일, 더위가 최고에 달 한 여름에 명종은 병으로 자리에 누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퇴계 이황이 입궁도 하기 전이었다.

궁중은 술렁거렸다.

6월25일, 올라온 다음날로 입궐한 예순 일곱 살의 이황은, 명종의 특례로써 영의정 이준경의 예우를 받으면서 빈청에서 임금의 알현을 기다렸다.

이준경은 퇴계보다 두 살 위로 예순아홉 살이었다.

그들 앞으로 승전내시가 특별히 제조상궁을 데리고 함께 빈청으로 나와 상감마마의 환우로 인하여 그 누구도 인견할 수 없음을 전하였다.

명종의 상태는 이황을 만나지 못할 정도로 위중하였다.

이황은 이준경에게 우선 만일을 대비하여 임금의 고명을 받들도록 하고,

그 자리에는 혼자 입시하지 말고 조정의 중추들을 거느리고 함께 들어가

고명을 받아야 일이 잘못됨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영의정 이준경이 좌의정이명과 함께 들어가 문안하자, “내 기운이 마찬가지이니 문안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심상尋常하게 보아 물러 나왔다.

이튼 날 새벽에 명종이 훙한 것을 보면 반드시 징후가 있었을 것인데, 대신들은 군부君父의 병을 한두 의관의 손에 맡긴 채, 조금도 조심하지 않고서 경솔하게 물러나와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좌승지 박응남이 영상 이준경에게 편지를 보내 “성상의 옥체가 미령함은 국가의 비상인데, 당국한 대신이 빈청을 비움은 재상의 도리가 아니다”, 하고 질책하자 다시 빈청으로 들어와 대기하고 있었다.

중전으로부터 급히 대전으로 들어오라는 전교가 정원政院으로 내려오자,

이준경과 좌승지 박응남, 동부승지 박소립이, 양심당養心堂 침소로 들어가니 명종은 이미 운명하기 직전이었다.

이준경이 명종에게 전교가 있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은 이미 의식이 없었다.

이에 후사로 누굴 세울지를 고명을 내려달라고 거듭 청하여도 대답이 없자,

중전이 “이미 전에 덕흥군의 셋째 아들 이균李鈞을 후사로 삼으셨으니 그 일은 경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준경이 청하기를 “국사가 이미 정하여 졌으니 신들은 아뢸 말이 없습니다. 지금 정하신 일은 상께서 이미 정하신 것이고, 신들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큰일은 양사兩司의 장관들이 모두 알아야 하니, 양사의 장관들을 입참하기를 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였다.

이는 박응남이 사관을 시켜서 이준경에게 “이러한 대사를 양사의 장관들이 모르게 하여서는 않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처럼 아뢴 것이다.

그러자 중전이 “서간으로 전하면 되지 수고롭게 입시할 필요는 없다.”고 하여서 모두 물러나왔다.

이준경은 빈청으로 돌아가고 승지들은 경회루 남문에 모여 있다가 조금 후에 임금 명종이 승하 하였다는 전갈을 받았다.

2012年 9月 日. 평택 박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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