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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광해군은 반드시 재평가 되어야 한다[2008-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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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관우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10-10 09:44 조회3,7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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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27대 임금중에서 불명예스럽게도 군주의 칭호를 받지 못하고 군으로 격하된 불행한 군주가 있으니 제10대 임금인 연산군과 제15대 임금인 광해군이다.

필자는 특히 광해군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치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윤리적인 문제로 인하여 왕위에서 쫓겨난 것을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마침 오늘 KBS에서 광해군을 재조명하는 프로를 시청하면서 파란만장한 광해군의 삶을 소개하려고 한다.

광해군은 1575년 당시 선조와 공빈김씨 사이에서 임해군에 이어서 차남으로 탄생하며, 휘는 혼(琿) 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선조와 함께 피난길에 오르기 전에 왕세자로 책봉된 이후 임진왜란으로 악화된 민심을 수습하는데 심혈을 기울이며, 왕세로서 군사들을 총지휘하여 당당히 왜적에 항거하면서 장차 국왕으로서의 월한 리더쉽을 보여주게 된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불행의 전조가 싹트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시작된 왕가의 불행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원래 선조는 정통성 문제에 있어서 늘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구체적으로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은 바로 중종의 아들이었지만, 정비가 아닌 창빈 안씨의 소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조는 자신의 아들중에서 정실의 소생이 나오기를 바랐건만, 정작 왕비인 의인왕후가 자손을 두지 못하고 1600년에 안타까운 임종을 하게 된다.

생전에 광해군을 마치 자신의 친아들처럼 아꼈다고 하며, 그렇게 정숙하고 품위있는 국모였다고 전하는데, 안타깝게도 소생을 두지 못한채로 임종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의인왕후에 이어서 계비로 간택된 왕후가 바로 김제남의 딸인 인목왕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목왕후가 선조가 승하하기 2년전인 1606년 왕자를 소생하니 이가 바로 9살의 어린 나이로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죽음을 맞이한 영창대군인 것이다.

이러한 영창대군의 탄생이 하나의 도화선이 되어 선조를 비롯하여 소북파의 대신들이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하기 위한 움직임이 가시화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뜻밖에도 1608년 선조가 승하를 하면서 광해군이 33세의 보령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광해군은 즉위한 것을 계기로 임진왜란부터 자신을 지지하여 준 세력인 대북파의 강력한 후원을 받게 되면서 조정은 대북파가 장악을 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영창대군을 옹립하는 역모사건이 일어나게 되어 광해군은 처음에는 윤허하지 않았지만 대북파의 강력한 주청으로 인하여 결국은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위리안치하게 되며 결국 영창대군은 1614년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인목왕후는 서인으로 강등되어 서궁으로 유폐되고, 친정 아버지인 김제남도 죽음을 당하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사건이 인조반정이 일어나게 된 하나의 명분을 제공하여 주었던 것이다.

필자가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광해군의 입장에서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의 존재가 늘 부담스러웠다고는 하지만 당시 좀더 포용력 있는 방법을 택하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필자가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윤리적인 문제때문에 광해군이 재위기간 동안 펼친 여러가지 치적이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비록 15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에 재위를 하였지만, 민생안정을 위하여 대동법을 실시하고 양전을 설치하는 한편, 임진왜란으로 질서가 무너진 한성부를 회복하고 창덕궁의 중건을 비롯하여 경덕궁(경희궁), 인경궁을 준공하는 등 여러가지 치적을 남겼다.

아울러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바로 뛰어난 외교술에 있는 것인데, 똑같은 후금이라는 나라인데,광해군때는 침략을 안하고 인조때 침략하여 나라를 초토화시키고 결국은 한 나라의 국왕이 청나라 황제에게 삼배를 올린 이 치욕적인 순간을 어찌 설명할 것인가!

필자는 당시 후금을 치기 위해서 명나라가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였을 때 광해군이 비밀리에 강홉립 장군에게 밀지를 내리어 명나라의 입장도 생각하면서 후금에게 항복하는 방법을 취한 것은 매우 현실적인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의 의리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에서 대단히 합리적인 외교력을 발휘하였다고 믿고 있으며, 이는 오늘날 북핵문제를 외교력으로 푸는데 있어서도 하나의 참고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명분도 중요하지만 실리도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보는데, 당시 친명정책을 대부분 지지하던 신하들로서는 이러한 광해군의 정책을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며, 영창대군의 죽음과 관련된 윤리적인 문제에다가 결국은 이러한 문제까지 빌미를 제공하여 여러면에서 개혁군주로서 전혀 손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조반정에 의하여 왕위에서 쫓겨나는 침담한 일을 겪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통탄할 노릇인가!

광해군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주가 되어 제주도로 위리안치되어 한 많은 18년의 세월을 보내고 결국 1641년 보령 67세로 비운의 승하를 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비록 광해군이 윤리적인 문제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백성들을 위하여러가지 정책을 실시하고, 특히 당시 복잡한 국제정세속에서 슬기롭게 대처함으써 후금의 침략을 막은 탁월한 외교력은 반드시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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