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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선조님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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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한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10-11 18:56 조회3,609회 댓글0건

본문

正祖. 朴宗岳을 加卜하다.

정조正祖15년(1791). 한 해를 각종 개혁 조치로 숨 가쁘게 보낸 정조에게

임자壬子 새해가 밝았다. 문체반정이 일어나게 되는 그해다.

1월 2일, 정조는 출사를 거부하고 있던 산림 이성보 李城輔를 경연관으로

임명하면서 널리 인재를 구하고자 하는 자신의 뜻을 전교한다.

그 말이 대단히 절박하다.

“옛사람은 경전을 다반茶盤으로 여기고 영의명의를 고기처럼 여겼는데, 지금 사람들은 예의를 버리고 이욕利慾을 멋대로 부려 우리 도는 외로워지고 이단은 날로 성해지는 것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 마치 불이 타오르는 듯 물이 범람하는 듯하다. 내 눈으로 독서하는 선비와 행실을 닦는 사람을 오랫동안 보지 못하였으니,

어찌 너무 높은데서만 구하여 그렇겠는가.

또 생각해 보건데 비록 수준을 낮추어 구하더라도 마치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처럼 찾기 어려우니, 이는 다름이 아니다. 부흥시키고 권면하는 방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니, 내가 매우 부끄럽다.”

자신이 펼치고자 하는 국정을 뒷받침할 인재가 태부족하다는 한탄이었다.

정조의 이런 한탄은 20여릴 후인 1월 21일, 공석 중이던 우의정을 임명하면서 나타났다. 원래는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후보자로, 정존겸鄭存謙. 홍낙성洪樂性. 이복원 李福源. 유언호兪彦鎬를 복상卜相했다.

그러자 정조는 충청도 관찰사 박종악朴宗岳을 추가로 포함시켰다.

이를 가복加卜이라고 한다. 이런 경우 십중팔구 국왕이 가복한 사람이 정승을 맡게 돼 있었다. 정조는 이날 채제공을 불러 자신이 박종악을 가복한 이유를 말한다.

“질박質朴함이 많고 문식文飾이 적은 자가 제일이며, 글을 읽은 후라야정치의 기본체제를 알 것이며, 남을 해치거나 이기려고 하지 않은 뒤라야 영욕과 이욕에 마음이 흔들리거나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 속담에 ‘지혜 있는 장수가 복 있는 장수만 못하다’하였으니, 이 또한 격언이다.

전례로 말하더라도 정승을 뽑을 때에 일직이 자급資級에 구애받지 않고 오직 적격자를 뽑았으니, 반드시 숭록崇祿(正一品)이나 숭정崇政(從一品)의 자급에서 뽑을 필요가 없고, 비록 자헌資憲(正二品)이나 정헌政憲(從二品)의 자급이라도 사람이 적합하면 구애될 필요가 없다. 내 뜻은 충청감사에게 있다.”

그러면 박종악이라는 분이 어떠한 인물인지를 알아야, 정조의 파격적인 우의정 발탁이 갖는 의미를 알 수가 있다.

박종악朴宗岳은. 1735년.영조11년에 서울 송현방松峴坊의정릉靑陵 옛집에서금계군錦溪君 오창공梧窓公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1766년(영조42)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에 사간원 정언이 되고, 홍문관에서 경력을 쌓은 다음,1775년(영조51), 승지를 거쳐 대사간에 오른다.

1777년(정조1)에 형님인 효헌공孝憲公 박종덕朴宗德이 홍국영의 권세에 맞서다가 파직되자, 연좌되어 경상도 기장현으로 유배되었다가 오래도록 기용되지 못 하였다. 1790년(정조14)도총관에 특임되어 관직에 복귀했고, 경기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또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 뒤 파주목사로 다시 기용된 다음,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 있다가, 이때 우의정右議政에 제수된 것이다.

그리고 2년 후, 정조의 측근인 김종수金鐘秀가 정치적 곤경에 처하자, 그를 신구伸救하다가 충주로 귀양 갔으나, 곧 풀려나와 중추부판사가 되고, 진하사進賀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오는 도중에 평안도 정주에서 병사하였다.

정조는 채제공에게 정승의 4가지 조건을 이야기 하였다.

“사람이 질박質朴하고, 학문을 알아야 하며, 남을 이기려고 하지 않아야하고, 복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 설명과 관계없이 채제공은 이미 정조가 박종악을 뽑아 올린 이유를 알고 있었다.

물론 박종악은 4가지 조건을 두루 갖춘 인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선비의 갖출 조건일 뿐이지 정치의 정점에 있는 정승의 조건일 수는 없다.

실은 1월2일 경연관 이성보에게 널리 인재를 구한다는 요지의 전교를 한 것도, 박종악을 우의정에 제수하려는 준비단계의 일환일 뿐이다.

元子(훗날의 純祖)를 낳은 유빈 박씨와의 관계.

정조의 정비正妃인 효의왕후 김씨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이어 홍국영의 여동생 원빈 홍씨가 후궁으로 들어왔지만 일찍 죽었고, 정조 4년 화빈 윤씨를 후궁으로 들여 그 역시 딸을 하나 낳았지만 어려서 죽었고 더 이상 자식을 낳지 못했다. 오히려 윤씨의 나인이었던 의빈 성씨가 정조의 눈에 들어 1782년(정조6) 아들을 낳으니 문효세자였다.

그러나 문효세자는 5세 때인 1786년(정조10)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듬해 왕대비의 재촉으로 노론 집안인 반남 박씨 박준원의 딸을 후궁으로 맞아들였고, 유비 박씨는 3년 후인 1790년(정조14) 6월 아들을 생산한다.

이 아이가 훗날의 순조이다.

묘하게도 박종악이 오랫동안 관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정조의 특명에 의해 전격적으로 복귀한 시점이 1790년 5월27일이다. 직책도 대단히 중요한 무관직인 정2품 도총관이다.

박종악이 유빈 박씨와 가까운 친척은 아니었지만, 외척강화라는 장기적인 포석차원에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점을 확인시켜주는 것은 나흘 후 다시

특지를 내려 수원부사 김사목을 전격적으로 이조판서에 임명한 것이다.

김사목(金思穆,1740영조16~1829순조29)은 형조판서를 지낸 김효대의 아들이다.

김효대는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 김씨의 친 조카로 외척이라고 할 수 있다.

김사목은 인원왕후의 집안인 관계로 과거가 아닌 음보蔭補에 의해 김해군수까지

지냈고, 영조48년(1772)에 문과에 급제해 동부승지를 지내고, 정조 7년에는 병조참판을 역임했다. 그리고 이때 수원부사로 있다가 전격 이조판서로 발탁됐다.

이후 김사목은 정조의 뜻에 부응이라도 하듯 순조 측위 후 병조와 예조판서를 지내고, 순조 8년(1808)에는 우의정, 1819년에는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그는 당쟁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근면,성실,청렴으로, 영조,정조,순조의 총애는 물론이고, 조정신하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정조가 외가나 할머니(왕대비) 집안 같은 가까운 외척을 다시 불러들일 수 없었던 것은, 집권 초 이들 집안을 뿌리 뽑듯 숙청을 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즉 부르려야 부를 만한 인물들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아들의 외가, 먼 왕실 외척부터 하나둘씩 조정으로 불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왕위에 오르고 20년이 될 즈음에야 必要惡과도 같은 王室外戚의 效用에 눈을 뜬 것이라고 할까?

이런 경향은 신하들과의 군력투쟁이 격심해지는데 비례해 강화돼 간다.

그것은 개혁의 후퇴로 볼 것인지, 현실권력의 속성에 대한 때늦은 통찰로 볼 것인지는 보는 사람 각자의 몫이다.

한편 그해 3월 5일, 정조는 여러 대신을 불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우의정 박종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의 집안이 나에게는 은인이다. 경이 새로 복상된 뒤로, 내가 비록 깊숙한

구중궁궐에 있으나 반발하는 논의도 대략 알고 있다.

복상의 결과가 나오자 사람마다 모두 흡족히 여기지 않은 듯하나, 경은 모름지기

터럭만큼이라도 동요하지 말고 오직 국사國事만을 잘 보살피기를 생각하고,

또한 옛날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않는 의리를 생각하라.”

이후, 순조의 외할아버지 박준원朴準源은 판서에까지 오르고, 순조 초에는 병권을 장악한다. 순조의 외삼촌, 즉 유비 박씨의 형제들은 화려한 관직생활을 보낸다.

박종경朴宗慶은 이조,병조 판서를 거쳐 좌참찬에까지 오르고,

박종래朴宗來는 이조,형조,호조 등 5판서 직만 돌아가면서 스무 차례 역임했으며,

박종보朴宗輔도 호조판서를 지낸다.

앞의 박종악도 멀기는 하지만, 같은 반남 박씨로 야천공冶川公의 자손이다.

올곧은 선비의 기상. (南溪先生)

1.南溪先生의 上疏.

숙종임금이 한참 장옥정의 미색에 취해 있을 때, 뜻 있는 선비들은 숙종의 여총女寵에 깊은 우려를 갖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역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여총이 어떻게 나라를 좀먹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의정 남구만南九萬 또한 숙종의 여총이 종사를 해칠 것이라고 생각 하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라도 숙종에게 ‘여총지화’를 깨닫게 할 사람이 누구인가를 곰곰이 생각한 끝에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1632~1695)를 떠 올렸다.

이때, 남계선생의 나이가 56세인데, 그는 파주의 남계에서 칩거하고 계셨다.

남구만은 파주의 남계로 박세채를 찾아 갔다.

두 사람은 며칠 동안 기거를 함께 하면서 조정의 앞날을 걱정하였고, 혼정을

거듭하는 숙종의 과실過失을 구체적으로 거론을 하였다.

숙종의 성총性聰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회빈 장씨를 내치는 일이 최선임을, 그들이 모를 까닭이 없었다. 영의정 남구만은 자신의 무능함을 자탄하면서, 남계선생에게 그 일을 직언해 줄 것을 간곡히 청했다.

남계선생은 자신의 직언이 자기희생을 전재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남구만의 간청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도성으로 돌아온 남구만은, 숙종의 재가를 얻어 남계선생을 이조판서에 제수하였다. 남계선생은 숙종에게 사은숙배를 올리기 위해서 창덕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숙종의 탑전에 이르러 숙배를 올리면서 한통의 차자箚子를 올렸다.

놀랍게도 그 차자는 취임과 동시에 임금의 잘못된 행실을 타박하는 내용이었다.

“삼대三代(夏.商.周)의 임금 중에, 그 정사를 닦을 수 있었던 이로 제가齊家를 근본으로 하지 아니한 이가 없습니다. 제가란 대개 남자는 밖에서 그 위치를 바르게 하고, 여자는 안에서 그 위치를 바르게 하여, 집안을 정제하는 것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또 처는 위에서 남편과 동등하고, 첩은 아래에서 명령에 복종케 하여 적서嫡庶의 분을 명확하게 정하는 것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만일 그러하지 못하고, 또 예경禮經의 교훈에 어긋나면, 마침내는 집안이나 나라의 근심이 끊임없이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신하들이 임금에게 경계의 말을 올릴 때에는 언제나 이것을 우선으로 하는 것입니다.”

남계선생은 이조판서로 취임하는 첫날, 서릿발 같은 선비의 기개를 보이면서

삭탈관직을 자초하였다. 참으로 아름답고 굳건한 선비의 기상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올곧은 선비가 취했던 덕목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확연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덕목인 것이다.

선비란 무엇인가? 강자에게는 강하고 약자에게는 자애로우며, 공명하고 정대한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몸소 몸을 던져 실천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이 엄연한 사실이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규범이며,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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