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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2월, 농사를 짓겠다며 표표히 필리핀으로 떠났던 박운서(67) 전 통상산업부 차관. 국내에 있었으면 조금은 편안하고 여유롭게 지냈을 터이지만 지난 2년 여 동안 그는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남쪽 민도로란 섬에서 원주민들과 부대끼며 농사와 교육 선교활동에 몰두해왔다.
무더위와 싸우며 일에만 매달린 탓인지 60㎏ 이상을 유지하던 몸무게가 55㎏이하로 줄어들자 건강 검진의 필요성을 느끼고 지난 23일 일시 귀국했다. 이틀에 걸친 정밀 진단 후 건강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1차 판정을 받고 28일 다시 현지로 떠났다. 출국 직전인 27일 저녁, 깡말랐지만 건강하게 검은 얼굴의 그는 환하게 웃으며 기자를 맞았다.
- 이제 현지 생활에 좀 익숙하신지요.
“한 마디로 편안해요. 주로 농사일하고 교회 짓는 일하고 지내고 있어요. 처음에는 어렵고 시행착오도 많았는데 딱 2년 되니까 이제는 농장도 대충 정리가 되서 자동으로 돌아가고요. 이제 본격적으로 마을마다 먕얀(mangyanㆍ필리핀 원주민)족을 위해 교회 짓는 일을 시작했어요.
두 개는 이미 완성해서 5월20일 헌당예배 드렸고, 8월5일 완공목표로 또 한 군데(하윌리)에서 짓고 있어요. 우리 농장은 전체 5만평인데, 그중 쌀 농사에 사용되는 땅이 4만5,000평 정도 되요. 첫 해에는 주로 경지 정리하고 투자를 많이 해서 적자가 났지요.
하지만 둘째 회계연도에 해당하는 작년 7월1일부터 올해 6월30일까지 3,500가마니(한 가마니= 45㎏) 생산했어요. 지금 교회재단과 농장사업을 구분해서 회계하고 있는데, 농장사업만 해서 경상이익률이 7% 정도 났어요. 배고픈 사람들에게 한 달에 한번 꼴로 밥을 먹이고 있어요.
1,500평 정도 되는 밭에서는 감자 고추 등 여러 작물을 테스트해 보고 있지요. 지금까지 보면 가지랑 호박이 잘 되는 땅인 것 같고 나머지는 아직 잘 안돼요. 염소 닭 돼지도 키워보고 했는데 열대지역에서의 문제가 있어서 수익성이 없더라고. 그래서 농장 안에 2헥타르 정도 하는 자연하천에다가 한 마리에 1페소 하는 띨라삐아(붕어) 3,000마리를 키우고 있어요.
필리핀에서는 띨라삐아가 주식 중 하나거든요. 쌀밥이 필수고 반찬을 한 가지씩 먹는데, 붕어, 닭, 돼지고기 등이 주된 반찬이에요. 6개월만 키우면 손바닥만큼 크는데, 다 큰 띨라삐아를 팔면 마리당 6페소 정도 받을 수 있대요.
그래서 쌀 농사하고 붕어농사만 하기로 결정했어요. 이제 키운 지 5개월 정도 됐는데, 새끼도 치고 많이 컸어요. 앞으로 5만 마리 규모로 길러보려고 해요.”
- 경작면적이 넓은데 아직 기계로 지을만한 여건은 안되는 모양입니다.
“땅이 크지요. 한번 주욱 둘러보는데만 2시간 걸려. 오전에 나인홀 돌고, 오후에 나인홀 돌아 하루에 18홀 도는 셈이여.(웃음) 그 섬이 필리핀 10대 쌀 주생산지 중 하나인데, 거기서는 2번째 큰 평야 한 가운데 농장을 샀어요.
물론 기계화도 생각해봤는데, 고용창출 위해 미루고 있어요. 처음에 농장에 물소 연 680마리를 동원해서 3개월에 걸쳐 경지를 정리했어요. 원래 같으면 트랙터가 들어가야 할 일을. 하루에 사람하고 물소하고 쓰면 300페소(약 6,000원) 정도 들어요.
잡초도 엄청나요. 책을 보다가 한국의 우렁이 농법 배웠는데, 거기는 우렁이 너무 많아요. 그런데 거기는 직파를 하니까 쌀을 먹겠다고 약을 뿌려서 우렁을 죽이는 거에요. 나는 직파를 안하고 이앙을 하니까 우렁이를 그냥 놔둬요. 두고 보니까 우렁이가 잡초를 먹는 대식가더구만요. 자연스럽게 잡초 관리가 되는 거에요.
직접 해보니 직파보다 이앙방식의 생산성이 10%이상 높았어요. 나중에 건기ㆍ우기별로 직파방식과 이앙방식의 생산성이 어떤지 따져보려고 해요. 원래 거기 1모작 기준으로 한 헥타르당 70~80가마니 정도 나왔는데, 지금은 120~130가마니 나오니까 생산성 팍 올라간 거에요. 보통 거기는 2.5 모작 정도 하는데, 내가 보니까 4모작도 충분히 가능할 거 같아요.”
- 원주민들에게 농사짓는 법은 물론 시장교육도 시키고 계시는군요.
“거기는 원래 일용직들을 쓰더라고. 성인의 40~50%가 실업자라 일당 받는 일용직이 일반적이에요. 근데 일당제로 해보니 시간만 떼우고 일당 받는 경우가 많더라고. 시간만 보내면 무조건 일당 150페소를 받아가니까 생산성이 떨어지는 거에요. 65명이 3헥타르에 모를 이앙하는데 사흘 걸리더라고.
그래서 성과급제로 바꿔본 거야. 그 다음에는 같은 일을 20명 투입해서 이틀 만에 끝냈어요. 난 시간 절약해서 좋고, 저 사람들은 하루에 일당보다 훨씬 많은 270~280페소 받아가서 좋고. 그런데 아직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라 그런지 옆 농가는 아직 안 따라와요.
지금 우리 농장에는 붙박이 일꾼 3명이 농지 관리, 비료 농약 등 구매, 영어 통역 등을 맡아요. 그밖에는 농사 지을 때마다 한 20명씩 현지인들 부르고. 농가 안에 상주하는 주민은 붙박이 일군 가족까지 총 18명 정도 되지요. 땅을 A, B, C, D, 4구역으로 나눠서 한 달마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며 추수할 수 있도록 했어요. 한바퀴 돌아가면 2달을 쉬게 하고.”
- 선교사업은 많이 진행되셨는지요.
“민도로섬 전체 인구가 100만 명 정도에요. 그 중 원주민인 망얀족이 30만 명 정도 되지요. 원주민은 필리핀 족이 15세기 들어오기 전부터 살던 사람들인데, 민도로섬 남쪽에 있는 봉화봉군 로하스군 불랄라까오군 말살라이군 등 4개군에 5만 명이 집중적으로 살아요. 한 500개 마을에 걸쳐서 살고 있지요. 그 중 제대로 된 종교가 없는 300개 마을에 교회를 지어 나가려고 합니다.”
- 민도로 섬을 특별하게 염두에 두신 이유가 있으신지요.
“노후에 양평인근에서 골프치고 농사지으면서 살려고 했지요. 그래서 그곳에 땅 500평 사놓고 30평짜리 집을 지을 계획이었어요. 그러다가 목사인 집사람이 동남아 골짜기 선교사 한 분을 몇 년 동안 돕고 있다면서 한번 가보자고 하더라고. 가봤더니, 아이구, 너무 열악해서 고생만 실컷 하다 왔지. 부부싸움도 했다니까.
다만 하나 걸렸던 건, 거기 애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이었어요. 불쌍하더라. 부모 잘못 만나서 먹지도 못하고, 학교도 구경도 못해. 주식은 바나나고. 여기서는 15, 16살 되면 결혼 다 하는데 애들은 10명씩 낳아요. 많은 애들을 굶겨야 되니까 땅 파서 파묻고 이런 걸 봤단 말이야. 돌아와서도 도울 방법이 있는가 한참 생각했지.
진짜 회사 관두고 새로 뭘 할까 생각하면서 양평 금식기도원에 집사람이랑 갔는데, 하나님 음성을 들었어. 내보고 자꾸 가라는 거여. 그래서 나는 “왜 납니까. 어떻게 갑니까. 나는 못 갑니다. 곧 퇴직금 탑니다. 3월 말이면 퇴직금 타면 몽땅 드리겠습니다”라며 통사정을 했지.
그러니까 하나님이 “내가 돈이 없어 가라느냐”며 계속 가라는 거라. 나는 하나님 명령 받고 간 거여. 가서도 못 견뎌 가지고 세 번이나 보따리 쌌는데, 그때마다 이상하게 못 돌아가는 계기가 생기더라고. 땅도 계약을 하게 만들고. 그래서 이렇게 된 거예요.
- 치안이 불안하지는 않는지요.
“계약한 이후에 현지인으로부터 납치협박 전화도 많이 받았어요. 나중에 내가 도움을 주러 온 사람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됐는데… 처음에는 자연 환경 자체가 장애였지. 함께 들어간 집사람을 열흘 만에 비행기에 태워보냈어요.
더위에, 벌레에 얼굴이 붓고 열이 오르는데, 죽는 줄 알았다니까. 그땐 살 집이 안 지어졌을 때니까. 응급차에 실어서 비행기 태워 서울 보냈지.
거기는 벌레 천국이여. 거짓말 좀 보태면 아침마다 불을 보고 달려들어 죽은 벌레가 한 대야는 돼요. 개미도 물면 얼마나 아픈지 몰라. 마누라를 한국에 보냈을 때 나도 보따리 쌌는데, 그때 물색하던 땅이 계약되는 바람에 보따리를 다시 풀었지. 농사 지어보지 않아 그동안 땅 주인을 3, 4개월 동안 한달에 1 만 페소(5,000원)씩 주고 집중적으로 배웠지.
여기 대졸 초임이 만 페소 정도예요. 농장 복판까지 트럭이 들어가서 나락 실어 갈 수 있는 농로도 만들고. 그러고 나서 우리집 짓기 시작한 거여. 난생 처음으로 집 지어 봤지요. 집 지은 지 6개월 만인 2006년 1월31일 이사했어요.”
- 현지 주민들의 평화정착을 위해서도 활동하시는 것으로 압니다.
“거기 망얀족과 한편인 사회주의 반정부단체(NPAㆍNew People’s Army)가 정부, 지주들과 대립하고 있어요. 특히 이들 4만 명이 있는 아지트 근처 띠나와간에 여의도의 세배 정도 되는 220만 평의 평야가 있는데, 그 땅을 두고 지주랑 NPA랑 무려 7년을 싸웠대요.
땅 주인이 필리핀정부에게 수십 년을 임대받아서 소 3,000마리, 염소 만 마리 정도 키웠는데, 망얀족들은 우리 조상 땅이다 이거지. 전쟁이 벌어진 거예요. 땅 주인 쪽에서는 목동이 죽고 망얀족들도 죽고. 내 가기 전날에도 망얀족 지도자 3명이 암살 당하는 사태가 발생했어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내가 주인을 만났지요. 주인은 아주 부자이어서 헬리콥터 2대, 테니스장, 수영장도 있고… 거기도 잘 사는 사람은 그렇게 잘 삽디다. 1년 동안 협상해서 그 사람의 모든 임대권한을 내가 샀어요. 목장 주인은 철수하고. 그때부터 720헥타르의 평화가 정착이 된 거지.
NPA에게 가장 큰 문제는,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은 불안에 떨고 있고, 그렇다고 띠나와간으로 데려오자니 애들을 학교에 보낼 수 없고. 그래서 내가 이곳에 학교도 짓고 집단 농업도 해보려고 해요. 망얀족이 게으른 게 문제긴 한데. 내 생각엔 이 땅에 소 만 마리, 염소 5만 마리, 말 수천 마리 키울 수 있고, 100헥타르 정도에는 쌀 농사가 가능하다고 봐요.
또 양쪽 옆으로 희한하게 강이 흘러요. 강 한쪽에 댐만 만들면 모래 채취도 엄청나게 할 수 있고, 하천부지도 엄청 나오고. 내가 볼 땐 한 만 명 정도는 먹여 살릴 수 있을 거 같애요.
다른 200핵타르는 목장하면 될 것 같애요. 철책 쳐져 있고 목동 집도 있고 목초지도 잘 조성되어 있고. 망고랑 코코넛도 키워볼까 해요. 필리핀 망고중에는 민도로 망고를 최고로 치거든요. 꿀벌도 가능하고요.
근데 문제는 교육이예요. 닭 염소를 키우라고 사주면 키우는 게 아니라 먹어버려요. 무교회 마을에 교회를 지어서 교회부터 나오게 하고, 학교 겸 교회가 될 수 있게 하는 거지. 일년에 교회 2~3개씩 지어나가려고 해요.
아마가에 시험삼아 11월에 지었고, 금년 5월21일 아또이에 지었어요. 8월5일 오픈하는게 하윌리 지역 교회고. 우기가 끝나면 리구마라고 산속 망얀족 마을에 교회 지을 거예요.
근데 또 문제는 망얀족 사이에도 말이 안 통해서 전도가 어렵다는 거에요. 일례로 30만 망얀족은 7개 부족으로 이뤄져 있는데, 문자나 악기 문화를 가진 하누노 족이랑 아또이에 있는 부이드 족은 서로 대화가 안돼요. 그쪽 언어를 모두 할 수 있는 망얀족 출신 전도사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망얀족 바이블 스쿨을 2년 전에 지어서 이번에 첫 졸업생을 냈어요. 졸업한 6명 중 3명을 골라 교회를 지어주려고 합니다. 내년엔 집을 따로 지어 괜찮은 졸업생 4명을 모아 본격적으로 후계자를 양성할 생각이에요.
또 로하스 대학을 졸업한 망얀족을 활용하려구요. 지난 10년간 로하스 대학을 졸업한 3,000명 중 망얀족이 20명 정도 되는데, 거의 다 고향에 다시 돌아가 있어요. 또 현재 로하스 대학에 다니는 망얀족 12명을 위해 기숙사도 지워줬어요. 비록 다들 가난해서 그 중 6명만 등록을 했는데, 이들은 기숙사에 지내는 대신 일주일에 한번 성경을 공부하기로 약속했어요.
- 지난 2년여 이렇게 자리하기까지 가장 어려웠던 점 무엇인지요?
“솔직히 외로움이지. 방송(KBS 인간극장)에 나온 후에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긴 하는데 도움은 하나도 안돼요.(웃음) 매일 저녁에 집사람에게 전화해요. 하루도 안 빼고.
사실 일반전화는 안되고 가져간 휴대폰만 간신히 되는데, 그것도 터질 때도 있고 안 터질 때도 있고. 그래서 얼마 전부터 영어 성경을 본격적으로 직접 읽기 시작했어요. 외로움 달래려구요. 우리 부부는 거길 영적 유배지라고 부르기도 했어요.
그리고 거기 지역 문화도 문제였고요. 벽돌을 구워 오랬더니 슬쩍만 힘을 주니 부서지지 않나, 돌아서면 자꾸 물건이 없어지지 않나. 베트남에서 일하고 있던 아들이 딱 일년을 도와주고 갔는데 그 아이 없었으면 이렇게 빨리 못했어. 이제는 베이스캠프에 해당하는 농장은 한꺼번에 20명이 와도 수용할 정도로 완성됐어요.
10미터*6미터짜리 원두막에서는 매주 토요일 현지인 어린이 성경학교를 열고 있고. 난 빵 사주고 노래 가르치고, 농구도 같이 하고 한국 영화도 보여주고, 그러고 살아요. 원래 돼지새끼 오줌보를 가지고 농구하고 놀던 애들인데, 한국 농구공 주면 아주 좋아해요. 한국 볼펜 받으면 안쓰고 아껴놓고.”
- 음식은 입에 맞으시는지요.
“쌀이 끈기가 없습니다만 이제 많이 맞아요. 배추도 우리나라 것과 아주 똑같아서 배추김치도 담아먹고 하지요. 일하는 현지 아줌마들이 한국음식도 곧잘 합니다. 일상적인 자리는 많이 잡았다고 봐요”
-아직은 이르시겠습니다만 많은 보람도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나만 위해서 살다가 거기서 남을 위해 살고 있는데, 그 자체가 보람이죠. 거기서 고용창출을 해주고, 로하스군 내에서 가장 많이 자재 소비한 게 그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됐을 거라고 생각해요. 일례로 이번에 산속에 교회를 짓는데, 차가 못들어가서 한 1㎞ 정도 시멘트 100포대를 사람이 날라야 했어요.
전부 망얀족들만 고용했는데, 모두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어두울 때까지 일하더라구요. 난생 처음 자기 노동으로 돈을 번 거여. 아 그거 보니 일자리만 창출해주면 일 하겠다 싶었지요.
한번씩 우리 현지 일꾼들과 밥을 같이 먹을 때가 있는데, 스스로 즐거워서 찬양 부르고 해요. 이런 일들이 국내 언론을 통해서 조금씩 공개되니까 나중에 로하스 시장이 인사하러 왔더라구요.”
- 현지 주민들에 대한 시장교육도 중요한 일의 하나로 생각됩니다.
“No work No payment는 철두철미하게 지키고 있어요. 처음엔 불쌍하니까 막 줬어요. 그러나 작년 7월1일부터는 딱 선언을 했어요. No work No payment, No service No reward. 이 두 가지는 철칙이에요. 예를 들어 지나가는 망얀족이 들어오면 밥을 주는데, 그냥 주는 게 아니라 2미터 정도 잡초 뽑을 것을 요구해요.
우리 집에 오는 아주머니도 돌이라도 하나씩 들고 들어와요. 또 우리가 만든 농로를 이웃 농지 주인들이 처음엔 그냥 이용했는데, 헥타르당 모래자갈 한 트럭(400페소)씩 가져오라고 요구했더니, 이젠 으레히 모래자갈 가져와서 도로에 깔고 가요.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거에요.”
- 갖고계신 뜻을 소중히 여기시는 분들도 적지않을 것 같습니다.
“300개 마을에 학교 겸 교회를 지어야 하는데, 교회 하나에 500만~600만원 정도 들어요. 사택까지 같이 지으면 1,000만원 정도. 내 평생 100개는 더 지을 생각이에요. 또 하나 필요한 것은 악기이지요. 여기 사람들은 음악을 무척 좋아해요. 일할 때도 음악을 즐기고. 드럼, 전기 피아노 등 3만페소(60만원)면 한 세트를 살 수 있어요.
도움을 주실 분들은 모리아재단(0505-100-1000~1002)으로 연락하면 됩니다. 김종인 의원도 크게 도와줘서 많은 도움이 되고 있구요. 또 홈페이지(www.moself.or.kr) 들어가면 현지 사진과 활동내용도 볼 수 있어요. 날이 갈수록 보람이 느껴지네요.
모두가 저에게 친근감을 느끼는지 ‘박할아버지’(Elder Park)이라고 불러요. 그나저나 한 녀석이 내 등산가방을 탐내서 이번에 하나 사 가지고 들어가야겠어요.”
- 국내 문제로 좀 화제를 돌려보지요. 관료로 기업인으로 40년 남짓 우리 경제의 치열한 현장을 지키셨는데 요즘 우리 경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걱정하고 있어요. 나는 우리 경제가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성장이 멈춘 거 아니냐 생각해요. 지금 정부는 4%대 성장으로 만족하는 거 같은데. 우린 아직 중진국이여. 그럼 선진국이 되려면 적어도 6~7% 성장을 해야 해요. 현실적인 전략도 있을 거에요. 그걸 못하고 있는 게 아쉽소. 필리핀 동남아 경제 성장률 보면 엄청나게 드라이브를 걸어요.
필리핀도 1970년 1인당 국민소득 1,000불이었지. 그 이후부터 정체된 거에요. 지금은 1인당 1,500불이지요. 우리는 그 당시 비슷한 1,000불에서 1만불대에 올라왔지만 지금은 정체하고 있어요. 거의 10년 정도 정체된 거 같애. 필리핀이 싱가포르 말레시아 인도네시아에 따라잡혔고, 곧 베트남에도 따라잡힐 거에요.
우리나라도 이대로 간다면 필리핀처럼 말레이시아 태국한테 따라잡힐 수 있어요. 차관으로 있을 때 연해주 광개토대왕 프로젝트, 서해안 남해안 L프로젝트 (자유무역지대)를 밀어붙이지 못한 게 지금도 한이여. 그때 해버렸어야 하는데. 중국, 러시아 등 바깥하고 더불어 사는 정책이었는데. 우리 문제는 더불어 사는 방법을 몰랐다는 점.
노사간 더불어 사는 법을 몰랐고, 여야가 더불어 사는 방법 몰랐다는 것이 아쉬워요. 이제부터라도 바깥하고 더불어 사는 방법을 생각해야 해요. 일본은 그래도 다른 나라 도와주고 해외투자도 많이 하고 그래. 우리는 솔직히 옹졸하게 쇄국주의한다고 봐요. 남 도울 땐 돕고, 가난한 나라도 돕고 하면 그게 경제개발의 동인이 되는 거여.”
- 성장이 정체된 원인은 무엇때문으로 보시는지요.
“우리가 윈윈은 아니더라도 최소 제로섬 게임은 해야 되는데, 마이너스 게임을 계속하고 있어요. 원인은 뭘까? 분배 우선 정책도 한 원인이 되겠지. 분배 위주 정책으로 전환할 때, 4대 보험부터 하는 게 아니라 고용창출에 초점을 먼저 맞췄어야 했는데.
정부가 실패로 드러난 유럽식 사회주의를 하려고 하다가 똑같이 실패한 거에요. 감정을 앞세워 고용 창출하는 기업을 죄악시 했잖아요. 누가 그걸 하려고 해요? 사람을 신나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게 문제에요.”
- 후배 공무원들에게 한말씀 해주시지요.
“공무원 인사 등에서 공정하게 하고,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고 사욕 버리고 열심히 逑求?사람을 평가해주는 게 이어져야 하는데, 전두환 때 모두 의욕을 잃은 것 같아요. 소신껏 하는 공무원 많이 놓치고, 우수한 인재를 붙들어놓지 못했어요. PK 되면 PK 출신 뽑고, DJ 정권 되면 또 바뀌고. 우수한 인력들이 남아있지 않아요. 지금은 용기 있는 공무원이 없어.
용기는 있어야지. 공무원은 정권의 공복이 아니고 국민의 공복이니까. 국민 이익 위해 가야지요. 교육정책도 위에서 뭐라고 하면 쏙 들어가 버리고, 경제개발의 주체들을 전부 눈치 보도록 만들어 놓은 거죠. 그래서 안 되는 거에요. 성장의 동력을 끊어놓는 일이에요.
노사분규도 마찬가지. 귀족 노동자들만 배불리고… 봉급이 얼마나 높아? 용기 있게 과감하게 법은 법대로 지켜나가는 공무원들이 필요해요.
나는 옛날부터 개방은 빠를수록 좋다고 하다가 욕 많이 먹었지만. 이제 보면 사회적 비용만 늘어나지 않았어요? 그나마 제조업계의 개방이 좀 일찍 이뤄져서 제조업이 그나마 버티고 있는 거여. 개방과 동시에 보완책을 마련해 나가면서 충분히 이룰 수 있는 문제여.
FTA한 거는 지금도 늦었다고 생각해요. 세계는 하나가 되고, 유럽도 정치까지 연합할 거라고 내가 이미 예언했던 거요. 유럽도 남미도 그렇게 되고, 우리는 한중일 연합해야 한다고 차관 시절부터 주장해서 미친 놈 소리도 많이 들었고.
하지만 나는 우루과이 라운드 뛰어다니면서 그때부터 간파했어요. 세계는 점점 작아진다(WORLD IS GETTING SMALLER SMALLER)는 사실을. 2020년 가면 유럽 블록, 미국 블록이 자리를 잡을 테니, 아시아에서도 블록해야 한번 붙어볼 만 할 거에요. 지금 국내 산업간 불균형 성장이 문제인데, 국가간 보완성장 해가면 되거든.
다른 건 넘겨줘도 철강 석유화학 조선 등은 우리가 거머쥘 수 있는 거거든. 제조는 중국에 넘기고, 개발과 마케팅은 우리가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 노 대통령의 임기가 6개월여 남았는데 여전히 뉴스의 중심입니다.
“대통령은 사인도 아니고 공인이요. 헌재를 제소하는 건 머리가 자기 팔다리를 제소하는 꼴이에요. 민족도, 언론도, 재벌도, 노동자도, 가난한 자도 모두 내 백성이요 라는 차원에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모두가 같이 더불어 살면서 발전하게 만드는 중간 키를 잡고 항로를 잡아야 되는데.. 그러지 못한 거 같아요.
아무튼 성장이 정체되고 있는 건 분명해요. 다른 나라에 따라잡히고 후진국으로 전락할까봐 겁나요. 싱가폴 홍콩 등은 2만불, 2만5,000불로 갔는데, 우리만 정체하고 있어요. 그걸 걱정해야 됩니다. 부의 분배 불균형은 더 심해졌어. 나는 부동산 이래서는 안 된다고 봐요.
작은 나라니까 우리 토지문제는 사회주의 방식으로 가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국유화 시켜야 해요. 잘 사는 작은 나라들은 국유화 비율 높아요. 물론 공유 개념은 시장 경제가 아니지 않느냐고 반론을 펼칠 수도 있어요.
그러나 땅 문제라는 것이 지금 부의 상속화, 소득 불균형 심화, 경제행위가 아닌 사행행위 조장 등 다양한 부작용을 낳고 있어요. 그걸 못하게 해야지. 건설경기 부양하면 경제 성장한다는 식의 정책은 더 이상 안돼요.
- 국유화의 구체적인 방법이 있을까요?
정부가 천천히 사들여야지. 장기채권 등으로. 그래서 30년, 50년 임대해 주는 방법으로 해야지. 그린벨트 묶인 것부터 해서. 부동산에 한한 한 소유의 개념을 이땅에서 없애고 사용의 개념으로 가야 해요. 나는 차관 시절부터 통일돼도 북한의 국유화제도만큼은 붙들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작은 나라는 그렇게 살아가야 해요. 토지는 대체제가 없고, 공급은 한정돼 있어요. 나라가 성장하려면 공장도 지어야 되고 인프라도 마련해야되는데, 예를 들어 판교-구리 1킬로에 도로 까는데 100억원이 들어갔대요. 말이 안돼요. 서울시가 임대주택 짓는 거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강남 강북 사람 뭔 죄에요. 또 부동산 때문에 (경기부양) 정책 효과 못보는 거 아닌가요?”
- 조기 퇴직해 제2인생을 생각하는 분들에게 한말씀 해 주시지요.
“지금 50대인 우리는 개발시대 연배죠. 개발에 직접 참여해서 열심히 일했던 사람들입니다. 지금까지는 자기 이익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으면, 퇴직 후에는 남을 위해 사는 방법을 생각해보는 것도 참 보람 있겠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나는 늙은 내가 생산적인 활동 할 수 있다는 데에 감사해요.
우리 노하우로 생산성 올라가게 만들고, 열심히 일하게 만들고, 필리핀 정부도 돌보지 않는 원주민 망얀족을 자립시킬 수 있다는 생각 하니까 뿌듯하기도 하구요. 노후에도 소비적인 생활만이 아니라 얼마든지 생산적인 활동을 할 수 있어요.
낙향해서 고향 발전에 기여하거나 우리보다 못한 주변 사람 도와줄 수도 있는 거고. 전문지식 갖고 있는 사람은 지식을 기여할 수 있고. 더불어 사는 방법을 실천해보는 것도 좋아요. 실제 해보니 보람 있더라 이거예요.
망얀족 6살짜리가 돈을 벌려고 시멘트를 이고 가는 것을 보고 “넌 하지 마라”고 했더니 화를 내더군요. 한 장이라도 더 하려고 모래 통을 목에다 걸고, 머리에다 걸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나는 여기가 가능성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곳은 나의 또 다른 인생 무대입니다”
▦박운서, 누구인가.
박운서(67). 한때 ‘타이거 박’이라 불릴 정도로 호랑이 같은 추진력과 기백을 자랑했던 전직 관료이자 기업인. 68년 행정고시를 통과해 89년 대통령비서실 경제비서관을 거쳐 94~95년 제1대 통상산업부 차관을 역임한 정통 경제통이다.
공직 퇴임 후 96년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사장, ㈜LG상사 대표이사 부회장, 데이콤 회장 등을 맡아가며 ‘죽어가는 기업도 살려내는’ 사업 수완으로 명성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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