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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사옥의 역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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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관우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11-03 16:51 조회4,3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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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00년동안 4대사화를 비롯하여 기라성 같은 선비들이 숙청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가환과 관련된 칼럼을 쓰면서 잠시 언급한 바 있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신유사옥의 의미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신유사옥은 1801년에 일어난 참화라 할 수 있는데 그 규모로 볼 때 사실상 사화에 버금가는 엄청난 사건이었다고 보고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신유박해나 신유사옥으로 불려지고 있는데 여기서 종교적인 의미인 박해라 하게 된 배경은 바로 이 사건의 관련자중에 천주교도가 많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정조대왕이 승하한 이듬해인 1801년 어린 보령에 즉위한 순조를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게 된 정순왕후의 지시로 오가작통법을 실시하면서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되는데 바로 이 오가작통법이라는 것이 천주교도를 탄압하기 위한 법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유사옥으로 인하여 당대 최고의 학자로 일컫어 졌던 이가환을 비롯하여 권철신이 옥사를 당하였으며, 이승훈,정약종을 포함한 6인은 참수를 당하였으며 정약용,정약전 형제는 유배를 가게 되는 등 그 피해는 이루헤아릴 수가 없었으며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하여 천주교도 100명 이상이 처형을 당하고 수백명이 유배를 갔다는 것이니 이 정도의 규모라 하면 가히 사화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본다.

사실 사화라는 의미에는 종교적 의미보다는 정치적 의미가 강하다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노론 벽파가 남인이 중심이 된 시파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가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으니 여기서 천주교도 색출은 노론에게 남인계 학자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하나의 명분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느 덧 대참사라 할 수 있는 신유사옥이 일어난 지도 200년의 역사가 흘렀건만 당시의 순간이 참으로 안타까웠던 점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당시 조선의 동량이라 할 수 있었던 뛰어난 선비들이 처형당하거나 유배를 당하면서 정조대왕 시대이후 가능성이 보였던 조선이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잃었다는 점이다.

필자는 바로 이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니 당대의 천재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가환은 옥사하고 정약용같은 대학자도 18년동안 유배를 당하였으니 참으로 국가적인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신유사옥을 일으킴으로써 노론은 당시 눈의 가시같은 남인계 학자들을 대부분 숙청하는 효과를 얻었는지 모르겠으나 정조대왕 시대에 양성된 탁월한 인재들이 이 사건으로 인하여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참화를 입으면서 조선이 다시한번 일어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놓친거 같아서 이미 200년이 지난 역사이지만 참으로 통탄스럽게 생각하며 이 자리를 빌어서 당시에 참화를 입은 모든 분들의 영혼을 애절한 마음으로 추모한다.


2012년 11월 3일(토) 역사칼럼니스트 문 암 박
우 올 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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