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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항 판돈령공 시제일정 알림이다 박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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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강춘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11-08 10:02 조회5,100회 댓글0건

본문

박태항 판돈령공 시제일정 알립니다

 

1. 일   시 : 2012.11.23일
2. 장   소 :경기도 여주읍 연라리 산41번지(묘전제)
3. 시   제: 박태항(朴泰恒)할아버님 시제 봉행
4. 참석자: 박태항(朴泰恒)할아버님 후손 및 관심 있는 분

5. 연락처: 010-5216-3715(박춘서)

**박태항(朴泰恒)가계 및 이력**  부(父) 박세해(朴世楷)   조부(祖父) 박호(朴濠)   증조부(曾祖父) 박동열(朴東說)   외조부(外祖父) 임위(林偉)   처부(妻父) 유빈(柳彬)   숙(叔) 박세모(朴世模)   자(子) 박필간(朴弼幹)

  전력(前歷) 통덕랑(通德郞)   관직(官職) 판돈녕부사(判敦寧府)

 

한국 정신문화 연구원 자료[1] 박태항(朴泰恒) 조선시대[1647-1737(인조25-영조13)]의 문신. 자는 사심(士心). 본관은 반남(潘南)임.박태항(朴泰恒) 1647(인조 25)∼1737(영조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심(士心). 세해(世楷)의 아들이다.

1687년(숙종 13) 통덕랑(通德郎)으로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1693년 사서(司書)가 되고, 필선(弼善)·보덕(輔德)·문학 등을 거쳐 1701년 헌납으로 있을 때에는 궁가(宮家) 절수(折受)의 폐단과 양남(兩南)의 급재(給災)에 관한 소를 올려 대책을 세우게 하였다.

1703년 동래부사(東萊府使)로 나가 대마도(對馬島)와 교역하는 데 조정에 품의(#품02議)하지 않고 전결(專決)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된 바도 있다.

이듬해 다시 승지로 기용, 충청도관찰사를 지내고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귀국, 승지·대사간·강원도관찰사·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720년(경종 즉위년) 예조참판으로 승진, 소론의 입장에서 세제(世弟:뒤의 영조)책봉을 주장하는 노론을 적극 탄핵하였고, 이듬해 경기도관찰사·형조판서·우참찬·공조판서·대사헌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영조가 즉위하자 삭탈관직되었다가 1727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기용되어 형조판서·좌참찬·좌찬성·예조판서·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본관은?반남(潘南). 자는 사심(士心). 동열(東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濠)이고, 아버지는 세해(世楷)이며, 어머니는 임위(林偉)의 딸이다.

1687년(숙종 13) 통덕랑(通德?)으로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1693년에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고,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필선(弼善)·보덕(輔德)·문학 등을 거쳐 1701년 사간원헌납(司諫院憲納)으로 있을 때에는 궁중의 절수(折受 : 공공토지를 떼어서 차지함)의 폐단과 양남(兩南 : 영남과 호남)의 급재(給災 : 재해에 따른 구제책으로서의 물자지급)에 관한 소를 올려 대책을 세우게 하였다.

1703년 동래부사(東萊府使)로 나가 대마도(對馬島)와 교역하는 데 조정에 품의(?議)하지 않고 전결(專決)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된 바도 있다. 이듬해 다시 승지로 기용, 충청도관찰사를 지내고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귀국, 승지·대사간·강원도관찰사·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720년(경종 즉위년) 예조참판으로 승진, 소론의 입장에서 세제(世弟 : 뒤의 영조)책봉을 주장하는 노론을 적극 탄핵하였고, 이듬해 경기도관찰사·형조판서·우참찬·공조판서·대사헌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영조가 즉위하자 삭탈관직되었다가 1727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기용되어 형조판서·좌참찬·좌찬성·예조판서·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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