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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잊혀진 천재 금대 이가환을 바라보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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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관우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11-10 12:14 조회4,5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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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요새 최대 관심 인물은 제목에서 시사하듯이 단연코 금대 이가환이다.

그런데 생각하여 보니 금대와의 인연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본래 숫자의 의미를 중시하는 편인데 이와 관련하여 하나의 사례를 들자면 1963년생인데 이 해가 무슨 해가 되는가 하면 금대의 종조부이면서 동시에 실학의 태두로 일컫어 지는 성호 이익의 서거 200주년이 되니, 이제와 생각하니 그런 대학자의 서거와 관련된 해에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제 서론은 이 정도로 하고 본격적으로 본론에 들어 가기로 하겠다.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지만 오래전에 당시 안산 첨성리에 모셔져 있던 성호의 묘소를 참배한 적이 있었다.

현재 묘소 근처에 성호기념관이 있는데 2002년에 개관되었다고 하는데 필자가 묘소를 참배할 무렵만 하더라도 기념관은 개관되어 있지 않았기에 그런 것을 보면 묘소를 참배한지 어느 덧 10년이 훌쩍 넘었다는 것이니 결코 짧은 세월은 아니라고 본다.

사실 묘소를 참배하게 된 하나의 계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경기도 연천에서 최초로 우두시술을 하여서 "우두박사"로 알려 지셨던 증조부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결국 성호까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증조부가 우두시술을 하게 된 내력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실학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실학의 태두라 할 수 있는 성호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결국 묘소 참배로 까지 발전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최초로 금대를 알게 되었으며 그가 대단히 유명한 학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로 성호의 종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이미 작고하셨지만 성호의 방계후손되는 분을 통하여 성호 가문의 내력과 금대에 대하여 말씀을 들은 이후 금대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으나 오늘날과 같이 이 정도의 지대한 관심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러한 묘소를 참배한 이후 세월은 다시 끊임없이 흘렀으며 그러다가 다시 금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한국천주교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광암 이벽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광암이 천주교 문제와 관련하여 금대와 토론을 벌이게 된 사실을 알고 금대에 대하여 잠시나마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당시 그가 유명한 학자로서 특히 수학과 천문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는 대목에 흥미를 느꼈던 것이다.

필자는 그동안 국제칼럼니스트와 독립유공자 컨설턴트로서 활동하였는데 최근에 그 타이틀을 역사칼럼니스트로 변경한 이후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인물이 바로 금대였으니 그 동기부여는 바로 그가 조선 최고의 수학자라는 대목이었으며 이러한 관심을 시작으로 드디어 금대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연구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른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서 지금으로부터 20년전 독립운동하시다가 행방불명되신 종조부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잊혀진 인물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금대도 이러한 잊혀진 인물들중의 한분이라고 생각된다.

필자가 지금에 와서 반성하는 것은 금대에 대하여 어느 정도 관심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잊혀진 증조부,종조부,재당숙의 행적을 추적할 때 처럼 열정적인 마음으로 연구하였던 것은 아니니 이런 조선의 천재에 대하여 그동안 소홀히 대해 왔던 것이 연구로자로서 송구스런 마음 금할 길이 없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만시지탄의 감은 있으나 이제라도 금대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겠다고 결심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요새 금대에 대한 행적을 추적하면서 느낀 것인데 과연 어떤 인물이었기에 천재적인 명성이 있었던 다산 정약용이나 학자적인 군주였던 정조대왕이 천재라고 극구 칭송하였는지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정조대왕과 관련된 부분을 언급하자면 필자가 조선왕조 역대 왕들중에서 가장 존경하는 왕이라 할 수 있는데 이번에 정조대왕이 금대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당시 남인의 영수였던 번암 채제공의 뒤를 이어서 장차 재상을 맡길려고 하였건만 그만 49세라는 젊은 보령에 승하를 함으로써 이러한 야심찬 계획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으니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사실 금대도 정조대왕이 좀더 오래 재위하였다면 신유사옥에 의하여 억울한 희생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며 재상의 반열에 올라서 그의 엄청난 지식을 당시 조선의 부국강병을 위하여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을 터인데 금대를 생각할수록 착잡한 심정을 감출수가 없다.

이제 조선의 천재였던 금대가 서거한지도 어느 덧 2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역사는 그의 천재성을 기억할 것이며, 필자 또한 금대를 사숙하는 후학으로서 앞으로 금대를 이 세상에 널리 알리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일 것을 다짐한다.

2012년 11월 10일(토) 역사칼럼니스트 문 암 박  관  우 올 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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