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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不遷之位에 관한 所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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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한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3-01-23 16:04 조회3,558회 댓글0건

본문

不遷之位에 대한 所懷.

오늘 대종중 홈페이지에 不遷位에 관한, 太緖대부님의 글이 실렸다.

언제인가 이 문제를 가지고, 태서 대부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서 그러지 않

아도 不遷位의 문제는 이야기하고 싶었던 문제였다.

나의 배움이나 지식으로는 이런 거창한 문제를 논한다는 자체가 어렵고 벅찬 문제

여서, 무엇을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 나가야 하는지를 모를
정도이지만, 그냥 평소에 생각하여 오던 생각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태서 대부님의 글 중에 불천위의 몇 가지 유형을 설명하셨는데, 그 중의 하나가 鄕

不遷位입니다.

그런데 우리 潘朴 大門中에는, 두 분이 유림의 소청으로 나라에 청원하여, 임금과

정부의 충분한 검중을 거쳐 사액을 받으신 후 서원에 모셔졌던 분이 계셨습니다.

즉 文正公 諱 尙衷 潘南先生과 文康公 諱 紹 선조님입니다.

이 두 분은 이미 當歲의 儒林의 열망에 의하여, 忠節과 節槪와 道義의 德望이 만인

의 표상이 되어, 祠堂을 짓고 영구히 俎荳之典과 香火를 받으시며 學文을 기리는

사액을 받는 서원에 모셔졌습니다.

이 두 분은 젊으신 나이에 일찍 세상을 뜨시는 바람에, 비록 학문으로 남기신 책자

는 없으나, 남기신 큰 족적은 후대의 귀감이 되어 만인의 표상이 되셨으니, 이로서
불멸의 이름을 얻으신 것입니다.

더구나 文正公 潘南先生은 儒林의 發願에 의함이 아니고, 肅宗임금 때에 먼저 조

정에서 논의가 되었고, 당세의 저명한 석학인 조정의 相臣들에 의하여 충분한 공

감과 찬성아래, 前朝의 忠臣임을 입증 받아 圃隱 鄭夢周와 같은 때에 賜額이 내려

진 五冠書院에 主享으로 모셔 졌습니다.

처음에 조정에 논의가 일어날 때에는 정몽주와 같은 서원에서 제향하기로 논의가

됐었으나, 도학과 절의가 같은 고려조의 충신이라 하여 따로 서원을 세우기로 결

정하고, 오관서원을 건립하였던 것입니다.

(이후 영조 대에 와서 현석공을 배향하게 되어, 문정공을 치제할 때에 같이 치제하

는 것이 어떠한가 하는 기사가 보이는 것을 보면, 조정의 치제가 여러 번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국가의 기록인 승정원일기만 살펴보아도, 두 분 선조님의 追念의 情을 살필 수 있

으니, 이로서 국가가 인정하는 불천위에 오르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평소에

해왔던 것입니다.

사실 봉건 국가의 공신이라는 것은 대다수가 권력쟁탈에서 승리한 집권세력의 포

상 나누기의 성격이 강하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 그 위태로움을 지켜내고 나라를

보전한 진정한 공신은 얼마나 되는지를 생각한다면, 국가가 위태로울 때 내 한 몸

을 던져 위난에서 국가를 지켜 나가고자하는 충성된 마음가짐이야 말로 귀감이 됨

이니, 어찌 국가가 자발적으로 드러내어 이러한 분을, 사액한 서원에 神主를 모시

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영구히 祭享을 그치지 않게 하고 유림의 표

상이 되게 하심은, 國不遷位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저의 생각입니다.

이에 영조 때, 승정원일기의 한 부분을 옮겨 적습니다.

        
                              英祖 16年 8月 2日.

❍ 前朝 文正公 朴尙衷 節義道德 與鄭圃隱無異. 辛禑時, 以欲事胡元, 上疏極諫,

辛禑杖流道死之人也.

其子孫. 有國朝王后, 而肅廟朝, 賜諡號矣. 其節義道德, 當與圃隱竝立, 而有異議.

故別作
五冠書院以享之, 而獨漏於癸酉致祭時, 今番宜有致祭之擧矣.

曰, 恭愍時人耶, 尹容曰, 恭愍時人, 而死於辛禑時矣. 回鑾時, 與鄭圃隱,
 
同爲致祭則似好矣.
且松都城外, 有崇節·····傳曰, 曾前亦有預爲下敎者.

今番所經處, 麗太祖陵, (세분 생략), 崇陽·花潭書院,致祭等事, 卽其地依癸酉年例,

遣官擧行.
祭文臨時預撰下送, 而聞五冠書院, 亦在松都云, 亦爲遣官致祭, (중략)一

體擧行, 分付該曹.


                 英祖 16年 8月 15日.

宋敎明,以禮曹言啓曰, 麗太祖陵·麗興府院君·益安大君·崇陽·花潭·五冠書院·

貞明公主·永安尉合葬墓·
先正臣成渾·先正臣李珥·慶恩府院君·故奉朝賀李台佐·

故相臣
洪致中墓·咸原府院君墓·致祭, 來九月初二日設行.

崇陽·花潭·五冠書院致祭, 同月初三日設行. 先正臣成渾·先正臣李珥墓致祭,

同月初四日設行.

而祭文令藝文館撰進, 祭官令吏曹差送, 祭物執事, 令京畿開城府定進排 而.......


위의 기사를 보면 우리 文正公에 대하여서는, 儒林에서 뿐만 아니라 나라에서도

祭官을 보내어 致祭를 드렸는데, 오늘날에 文籍에 남은 기록이 없다고 不遷位로

모시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논거가 있다면, 다시 한 번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제가 알기로는 여기에 거론된 분들은 대개가 그 문중에서는

불천지위로 모시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물론하고, 文康公 冶川 선조님도 마찬가지입니다. 華巖書院을 세우고 陜川 儒林에

서 사액을 받기 위하여 조정에 청원소를 올릴 때 수많은 陜川의 儒生들이 서명하

여 발의하기를, 몇 십 년을 두고 여러 차례 하였으니, 그만하면 鄕不遷之位가 아니

고 무엇입니까.?

제가 언제인가 <전국의 유명한 전통의 대종가>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남원 지방의 [고령박씨 박문수 종가] 편을 읽어보았더니, 宗家를 들어가

는 大門의 현판에 쓰인 글을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고려 현인 고령 박문

수 불천지위
라고 쓴 것 같았습니다.

그 분은 고려말엽의 인물로, 고려가 망하자 조선에 벼슬하지 않고 남원으로 숨어

산 高麗遺臣이라 합니다.

그러한 분도 불천지위로 모시는데, 하물며 우리 문정공 반남선생을 불천위로 뫼시

지 못하는 우리 반박의 입장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몇 번인가 피력한 적이 있

지만, 아직은 정식으로 거론된 사실이 없다가, 태서 대부님의 글이 올라 왔기에 저

의 소회를 여기에 적어봅니다.

태서 대부님의 말씀처럼 이 문제는 충분히 연구되고 검토되어, 우리가 자랑하는

선조님을 일년에 한번하는 행사처럼 지나가는 時祭로나 모시는 불효?는 면해야 하

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총총한 글을 두서없이 썼지만 대개만은 밝힌 듯합니다.

                                         2013年. 辛巳 1月 23日 平澤에서 漢 雨 頓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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