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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강공 박소 할아버지와 희재 이언적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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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3-02-09 17:03 조회6,140회 댓글0건

본문

우리나라에서는 기묘사화(훈구세력에 의해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가 화를 입은 사건) 이후 한동안 도학에 대한 논의를 꺼리는 분위기였다.

당시 인종께서 세자가 되신지 벌써 6, 7년이나 되었건만 세자시강원(세자에게 경, 사를 가르치고 도의를 선도하는 일을 맡아보는 관청)의 고위 관료들은 세자에게 경서를 강론하는 일이 급한 일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때 문강공(文康公 朴紹)은 전랑으로 계셨다. 회재(李彦迪) 선생은 문강공보다 5년 먼저 과거에 급제했으나 아직도 교서관(주로 책의 인쇄 및 반포를 담당하던 관청)의 한미한 직책에 머물러 있어 별로 아는 자가 없었다.

문강공께서는 선생을 힘껏 천거하여 세자시강원에 근무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두 분이 번갈아가며 궁료가 되어 비로서 정주(성리학자의 정자와 주자)의 가르침을 세자에게 강론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의 여론은 아직 세자의 나이가 어리니 경서를 강론하는 일이 급하지 않다는 것이었으나,

두 분께서는 마음을 합하고 곧음을 함께하여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비록 인종의 거룩한 지혜는 하늘이 내리신 것이라 하더라도 그 초년에 올바른 도리를 함양한 공부는 실로 두 분이 기초를 마련한 것이었다.

옛날의 제도에 정7품 이하 관료들의 승진과 인사는 전랑이 담당했으므로 문강공이 회재 선생을 이끌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군자란 세상일에 있어 먼저 할 바와 나중에 할 바를 알지만, 범속한 사람들은 군자가 무엇을 고심하는지 알지 못하는 법이다."

(위의 글은 '나의 아버지 박지원'에서 갖어온 글)




<조선왕조실록>

숙종 27권, 20년(1694 ) 11월 3일(정묘) 1번째기사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다. 이빈의 임용과 박소의 시호를 논하다

“박소(朴紹)는 중종조(中宗朝)의 명신(名臣)입니다. 조광조(趙

光祖)와 같은 때였는데, 김안국(金安國)이 일찍이 말하기를, ‘효

직(孝直)은【조광조의 자이다.】 높이 뛰어나고 언주(彦胄)는

【박소의 자이다.】 정밀(精密)하다.’고 했습니다.
박소가 이언

적(李彦迪)을 추천하여 함께 진출(進出)하여,
김안로(金安老)가
다시 진출하려고 도모하는 것을 배척하다가, 드디어 김안로의

당들에게 공격받아 제거되어 사간(司諫)으로 집에서 일생을 마

쳤습니다. 그의 아들 박응순(朴應順)이 국구(國舅)가 되었으므

로, 은덕(恩德)을 미루어 의정(議政)으로 증직(贈職)했고, 송시

열(宋時烈)이 일찍이 시호(諡號)를 청하려고 시장(諡狀)을 마련

하여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번에 마땅히 역명(易名)8382) 하도

록 윤허하소서.”



(朴紹)

1493(성종 24)∼1534(중종 29).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언주(彦胄), 호는 야천(冶川). 병문(秉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임종(林宗)이고, 아버지는 이조정랑 조년(兆年)이며, 어머니는 현감 윤자선(尹孜善)의 딸이다.

어린 나이로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 나아가 그의 문인들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그 때가 무오사화(戊午士禍) 뒤라서 사림의 사기가 침체되었으나 가야산에 들어가 공부에 열중하였다. 또한 박영(朴英)을 찾아가 학문에 힘쓴 결과 식견이 더욱 넓어져 당시 친구들이 모두 추앙하였다.

1518년(중종 13) 향공(鄕貢) 3과에 모두 장원하고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현량과에도 천거되었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1519년 식년 문과에 장원하였다. 이어 강석(講席 : 강의나 강론하는 자리)에 나가서는 행동이 조용하고 응대가 상세해 모두 옥당정자(玉堂正字)를 얻었다고 치하하였다.

또한 조광조(趙光祖)는 “그의 용모를 보니 남의 아래에 설 사람이 아니다. 어찌 정자로만 기대하겠는가. 대과에 장원할 것이다.”라고 인물됨을 평가하였다. 1522년 부수찬(副修撰)이 되었으며 그 뒤 정언(正言)·지평(持平)·사인(舍人)·필선(弼善)을 역임하고, 조광조 등 신진 사류와 함께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1529년 평안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고 사간에 임용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김안로(金安老) 등의 훈구파를 전한(典翰) 조종경(趙宗敬)과 함께 탄핵하려다가 일이 착수되기 전에 허항(許沆)이 김안로에게 고해 도리어 사성(司成)에 좌천되었다. 그 뒤에도 여러번 탄핵해 그들의 미움을 사서 1530년 파직당하고 고향인 합천에 내려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평생 성현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리고 용모를 보면서 서로 이야기하면 사람을 감화시키는 덕기가 있어 모두 명도(明道)의 기상이 있다고 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 나주의 반계서원(潘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언적(李彦迪)

1491(성종 22)∼1553(명종 8).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경상북도 경주 출신. 본관은 여주(驪州). 초명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였다.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회재라는 호는 회암(晦菴: 주희의 호)의 학문을 따른다는 견해를 보여준 것이다. 할아버지는 참군 수회(壽會)이고, 아버지는 생원 번(蕃)이며, 어머니는 경주 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鷄川君)소(昭)의 딸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李滉)에게 전해주었다.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사헌부장령·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사간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537년김안로 일당이 몰락하자 종부시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응교·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때 조정에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이조·예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545년(명종 즉위년)좌찬성이 되었다. 이때 윤원형(尹元衡)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선비들을 심문하는 추관(推官)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명종 2)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긴 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화가 거듭되는 사림의 시련기에 살았던 선비로서, 을사사화 때는 좌찬성·판의금부사의 중요한 직책으로 사림과 권력층 간신 사이에서 억울한 사림의 희생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사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후에 이이(李珥)는 그가 을사사화에 곧은 말로 항거하며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하였으나, 오히려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1517년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토론되었던 성리학의 기본쟁점인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에 뛰어들었고,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를 바탕으로 두 학자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여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그가 벌인 태극의 개념에 관한 논쟁은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개념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논쟁에서 이기론(理氣論)의 주리론적 견해로서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은 이황(李滉)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가 되었다.

그는 만년에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구인록(求仁錄)』(1550)·『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1549)·『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1553)·『봉선잡의(奉先雜儀)』(1550) 등의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

『구인록』(4권)은 유교 경전의 핵심 개념인 인(仁)에 대한 그의 집중적인 관심을 보여준다. 그는 유교의 여러 경전과 송대 도학자들의 설을 통해 인의 본체와 실현 방법에 관한 유학의 근본정신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대학장구보유』(1권)와 『속대학혹문』(1권)은 주희의 『대학장구』와 『대학혹문』의 범위를 넘어서려는 그의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보여준다. 그는 주희가 『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계를 개편했고, 특히 주희가 역점을 두었던 격물치지보망장(格物致知補亡章)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대학장구』의 경1장에 들어 있는 두 구절을 격물치지장으로 옮겼으며, 이런 개편에 대해서 주희가 다시 나오더라도 이것을 따를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주희의 한 글자 한 구절을 금과옥조로 삼아 존숭하는 후기 도학자들의 학문 태도에 비해 훨씬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학문 정신을 보여준다.

『중용구경연의』(29권)는 미완성 저술로 주희의 『중용장구』와 『중용혹문』의 체계를 벗어나 천하국가를 통치하는 방법인 9경(九經: 수신(修身)·존현(尊賢)·친친(親親)·경대신(敬大臣)·체군신(體群臣)·자서민(子庶民)·내백공(來百工)·유원인(柔遠人)·회제후(懷諸侯))을 중심으로 『중용』의 정신을 밝히려는 독창적인 저술이다. 이는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가 『대학』 체계를 통치 원리의 구체적 실현 방법에 응용했던 것에 상응하며, 후에 이현일(李玄逸)이 『홍범연의(洪範衍義)』를 저술한 것에 선행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주희가 『대학』과 『중용』을 표출시킨 의도를 계승하면서도 『대학』과 『중용』의 정신을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양면으로 파악함으로써 도학의 통치 원리를 선명하게 제시하는 창의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봉선잡의』(2권)는 도학의 실천적 규범인 예서를 제시한 것으로서 조선 후기 예학파의 선구가 되고 있다. 주희의 『가례(家禮)』가 조선조 사회에 미친 영향을 주목한다면, 이언적의 예학 저술은 그의 학문적 관심이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왕에게 올렸던 상소문인 「일강십목소」와 「진수팔규(進修八規)」는 군주 사회의 통치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하늘의 도리에 순응하고 백성의 마음을 바로잡으며 나라의 근본을 배양해야 한다는 왕도정치의 기본 이념을 추구했으며, 도학적 경세론의 압축된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일강십목소」에서는 ‘임금의 마음씀[人主之心術]’을 근본강령으로 규정하고, 가정 법도의 엄숙, 국가 근본의 배양, 조정 기강의 정대, 인재 취사의 신중, 하늘 도리에 순응, 언로를 넓힘, 사치 욕심의 경계, 군자의 길을 닦음, 일의 기미를 살핌을 도모하도록 요구하였다. 또한 1517년 저술한 「오잠(五箴)」에서도 하늘을 두려워함[畏天], 마음을 배양함[養心], 공경하는 마음[敬心], 허물을 고침[改過], 의지를 독실하게 함[篤志]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그는 하늘[天道·天心]과 백성[人心]에 순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養心·敬心]에 힘쓸 것을 중요시하는 도학적 수양론을 경세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종사되었고,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에서)



1530년 11월 희재선생이 사간이 되셨을 때는

문강공께서 사간에서 물러나시고 후임으로 오셨으나

이듬해 1531년 1월 김안로 일당들에 의하여 사간을 물러남

김안로의 일당인 허항은

문강공 조모인 양천 허씨 할머니의 친정동생 許淙의 손자로서

문강공의 진외가(陳外家=아버지의 외가) 6촌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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