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자수
  • 오늘210
  • 어제1,165
  • 최대1,363
  • 전체 308,409

자유게시판

박태보 - 오언율시(한시산책)

페이지 정보

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3-03-27 09:44 조회8,542회 댓글0건

본문

아래글은 올해 노강서원 춘향제에서
당하집사로 제향 진행을 맡아 주셨던 서경대학 이상명 박사님께서 보내주신 글입니다


안녕하세요?

지난 22(금)일 노강서원에서 당하집례를 했던 이상명입니다.

좋은 날 좋은 경험을 하고 왔습니다.

대종회에서 지극정성을 다 하고 계시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왔습니다.

부족하지만, 자료를 보냅니다.

건강하시고 날마다 좋은 일만 가득하세요!!!!!!!!!!!!!!!!





노강서원
[鷺江書院]

1695(숙종 21)년에 문열공(文烈公) 박태보(朴泰輔)선생을 추모하는 뜻에서 건립하였다.

주 소 : 경기 의정부시 장암동 산 146-1

종 목 : 시•도 기념물 41
 
지정일 : 1977. 10. 13

테 마 : 유적건조물, 교육문화, 교육기관, 서원

시 대 : 조선시대


의정부에 기념물이 21개가 있습니다.


조선 숙종 때
, 문신인 박태보(16541689)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박태보(朴泰輔, 1654~ 1689)선생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定齋),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박태보선생은 호남 암행어사, 파주 목사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고, 숙종비의 인현왕후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 가는 도중에 죽게 되었습니다. 학문에도 깊고 성품도 강직한 분으로 알려졌으며 죽은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숙종 21(1695)에 세운 이 서원은 숙종 27(1701)에 국가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노강’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원래는 서울 노량진에 세웠으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고, 1968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폐쇄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경내 건물로는 사당, 동재·서재, 고직사 등과 출입문이 있으며 교육장소로 사용되는 강당은 따로 두지 않았다.

사당은 박태보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건물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으며, 각 칸에는 4짝으로 이루어진 문을 달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의 익공 양식을 사용하였는데 가운데 칸에 용머리를 첨가하였다.

동·서재는 온돌방으로 꾸며 유생들이 공부하면서 기거하는 건물이다.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현재 해마다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박태보 - 오언율시(한시산책)

오늘은 조선 숙종 때의 인물인 박태보 선생의 한시를 소개합니다.

재능이 뛰어나고 가문도 훌륭해서 장래가 촉망되던 분인데, 숙종의 두 번째 왕비인 인현왕후를 둘러싼 정쟁의 소용돌이에서, 왕의 잘못을 극력으로 간하다가 모진 고문을 받고 귀양길에 나선 뒤, 결국은 그 고문의 후유증으로 별세하신 분입니다.

제목 : 曉行(효행) / 새벽 길

晨發(여점능신발) 주막에서 새벽길을 나서며

參旗堂馬頭(참기당마두) 말머리에 깃발 세 개 나란히

泉流虛響駛(천류허향사) 샘물은 가벼이 소리 내며 흐르고

蕎麥暗香稠(교맥향암조) 메밀꽃 향기 그윽이 전해오네

冷踈螢曉(노랭소형효) 찬 이슬 성글고 반딧불 나는 새벽

風高葉秋(풍고난엽추) 거센 바람에 나뭇잎들 어지러워

抱鞍殘夢罷(포안잔몽파) 안장 부여잡고 새벽꿈에서 깨어

前路曙光浮(전로서광부) 달려가는 앞길에는 동이 터 온다.

蕎麥(교맥) : 메밀() ()

(트일 소) : 소와 동 : 성글다

殘夢(잔몽) : 아직 다 꾸지 않은 꿈

曙光(서광) : 동틀 때 비추는 빛

조선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을 지냈다. 예조좌랑으로 있을 때 남인의 모함을 받아 선천에 귀양 갔다가 복직되었다.

성품이 결백하여 아부를 하지 않았으므로, 시기하는 자가 많았으나 왕의 총애를 받았다. 이조좌랑으로 암행어사가 되어 호남 지방을 시찰할 때 폐단을 시정하여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1689년 기사환국 때에 西人으로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귀양 가는 도중 노량진에서 죽었다.

숙종은 후회를 하고 이조판서에 추증하였다.

그 뒤 다시 영의정으로 가증되고, 문열공文烈公의 시호가 내려진다.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1667년 음력 423~1701년 음력 814)는 조선 숙종의 계비이다. 본관은 여흥(驪興)민씨이고, 시호는 효경숙성장순원화의열정목인현왕후(孝敬淑聖莊純元化懿烈貞穆仁顯王后). 여양부원군 민유중과 은성부부인 송씨의 딸로 민진후, 민진원, 민진영의 누이이다. 1680년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가 천연두로 사망하여 불과 반달 만인 1681년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 이후 폐위되었다가 1694년 갑술환국의 여파로 복위했다. 1700년에 발병한 괴질로 투병하다 1701년에 별세했다. 무덤은 서오릉 중 하나인 명릉(明陵)이다.

석전대제 이수자, 교육학 박사 이 상명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