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자수
  • 오늘627
  • 어제1,165
  • 최대1,363
  • 전체 308,826

자유게시판

朴紹의 妻家 이야기

페이지 정보

no_profile 김형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3-04-10 00:12 조회3,793회 댓글0건

본문

 

합천에서 과거공부하던 박소(1493~1534)는 京에 거주하는 남양홍씨 홍사부(洪士俯)의 따님과 결혼했는데, 이 혼사가 언제 어디서 이루어졌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략 15~18세 정도에 결혼했다면 1508~1511년 사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슬하에 5남2녀를 두었는데 장남 응천(應川) 위로 딸이 1명 있었으며 사위 한산이씨 이희백(李希伯)은 중종8년(1513년)생이다. 신부가 신랑보다 1~2살 정도 더 많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장녀는 1511년생이고 그렇다면 적어도 1510년 이전에 결혼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다만 이 혼사가 어떤 방식으로 즉 누구의 중매로 이루어졌는지 상상의 나래를 펴본다.


서계 박세당의 고조가 되시는 박소의 유소년기 및 청소년기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서계문화재단>의 관련기사가 있는데 내용이 너무 소략하고 애매하거나 과장된 표현이 많지만 우선 직접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박소의 유년시절은 매우 고단하였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읜 그는 어머니 파평윤씨를 따라 합천의 외가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원래 그의 선조는 박은 이후로 줄곧 한양에 세거해왔다. 그러나 아버지 박조년의 사망과 설상가상격으로 뒤이어 닥쳐 온 연산군의 민가훼철령으로 서울을 떠나 외조부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의 아호인 야천(冶川) 역시 외가가 있던 합천의 야로현(冶爐縣)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한다.

이 과정에서 박소는 합천의 명현으로 칭송되는 한편 합천지역의 사족명부(士族名簿)인 「합천향안(陜川鄕案)」에도 등재되기에 이른다.

청년 박소는 가야산의 산사(山寺)에서 학업에 정진하여 『근사록(近思錄)』『성리대전(性理大全)』 등 유교서적을 두루 섭렵하는 한편 박영, 김안국 등 명사들과 교류하면서 학식과 견문을 넓혔다. 이에 조광조 등의 이른바 기묘사림들에게 학행이 알려지면서 1519년(중중 14)에는 현량과에 천거되었고 같은 해에는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함으로써 문명(文名)을 떨치기에 이르렀다. 박소의 문과 합격은 아버지를 이은 양대 과경(科慶)이었으며, 박은에 이은 두 번째의 장원급제였다.

-------------------------------


일단 ‘박영, 김안국 등 명사들과 교류하면서 학식과 견문을 넓혔다’는 표현은 너무 애매하고 과장된 것이다.


松堂 朴英(1471~1540)은 이른 나이에 치사하고 고향 선산에 내려가 후진을 양성하던 대학자이다. 박소는 그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이때 이웃 성주에 세거하며 역시 박영의 문하로 있던 외외가 벽진이씨의 인물 李光(1485~1551)을 만났을 가능성이 크다. 수재였던 박소는 박영 문하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신진이었을 것이다.


慕齋 金安國(1478~1543)은 1509년 10월 선산에 암행어사로 파견된 적이 있는데 이때 박영을 통해 수재소년 박소의 이름을 알았을 것이며 박소가 결혼하기 직전의 시점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1517년 2월 경상감사로 내려왔을 때도 문명이 자자하던 청년 박소를 중앙의 조광조에게 천거했을 가능성도 있다.


수재소년 박소는 누구나 선망하는 사윗감이었고 여기저기서 청혼이 들어왔을 것이다.


1. 친가쪽


친가쪽 어른들의 알선을 통해 남양홍씨와의 혼사가 성사되었을 가능성은 비교적 낮아 보인다. 왜냐하면 1510년경 친가쪽의 조부 박임종, 백부 박억년, 부친 박조년 등은 모두 돌아가신 뒤였으며 그리고 남양홍씨와 중매를 알선할만한 당숙들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2. 외가쪽


박소가 어려서부터 외가쪽에 의탁해 살았기 때문에 외조부 윤자선 집안 어른들의 중매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3. 친가쪽 인척


친가쪽의 인척 중에 조부 박임종(배위 양천허씨)의 동서로 남양홍씨 홍임(洪任)이 있다. 홍임은 중종반정의 공신 홍경주의 아버지이다. 홍경주는 중종의 후궁 희빈홍씨(1494~1581)의 친정아버지이다. 홍임의 후손 집안에서 먼 친척인 홍사부에게 중매를 섰을 가능성도 있다.


4. 장인 홍사부가 합천, 성주, 선산 근처의 수령을 내려왔을 때 박소의 소문을 듣고 직접 사위감으로 골랐을 가능성도 있다. 


5. 스승이던 송당 박영이나 모재 김안국의 중매를 통해 혼사가 성립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처가 남양홍씨는 시조를 달리하며 동성동본을 사용하는 우리나라 유일의 성씨이다. 그래서 하나는 당홍(唐洪)으로 다른 하나는 토홍(土洪)으로 구분하는데 박소의 장인 홍사부는 당홍 익산군(13세 云遂)파 18세손이다. 처조부 홍흥(洪興)은 성종조 “당대 최고의 풍채”로 유명했으며 성종임금이 조선의 인물을 자랑하기 위해서 자주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고 한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란 말이 떠오르며 아울러 박소의 처 남양홍씨의 용모와 품격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홍흥의 형 홍응(洪應)의 아들 홍기(洪紀)는 성종의 누이 명숙공주의 남편으로 추존왕 덕종의 부마이며 더 간단히 말하면 왕의 자형이다. 박소의 장모 청주한씨[처외가]는 한절(韓岊)의 따님이며 조부 문양공(14세 繼美)은 한명회와 6촌간이다.


박소는 비록 이른 나이에 졸하셨지만 치사후 다시 합천에 거주하던 몇 년간 남양홍씨와 더불어 자식들을 제대로 훈육하므로써 그 아들 및 손자, 후손들이 조선최고의 명문가로 부상하는데 있어 토양을 마련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박소의 일생을 한마디로 담아낼 수 있는 객관적 수식어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문강공 박소, 사인 박소, 야천 박소 등이 있지만 가장 객관적 표현은 壯元公 박소가 아닐까 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