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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드디어 박찬오의 학적부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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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관우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3-05-08 23:33 조회4,1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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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박찬오의 판결문을 발견한지 20주년이 되는 2013년에 오매불망 그리도 알고 싶었던 그의 실체가 완전히 확인되었다.


이미 관련 칼럼을 올린 바 있지만 몇차례의 우여곡절속에 5월 8일에 완벽한 그의 기록이 밝혀진 것이다.


그 핵심은 바로 그의 학적부였다.


사실 이러한 학적부를 필자가 확인하기 전에 교민 사업가가 1차적으로 필자의 메일로 사진을 보내 왔었다.


그런데 그 사진을 보니 1941년 그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될 당시의 사진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일제시대의 사진에는 안경을 쓰지 않았고 해방이후의 사진에는 안경을 썼다는 점이었다.


일단 이렇게 사진을 통하여 그가 스베르들롭스크 광산대학에서 재학하였다는 심증을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필자의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확실한 자료를 원했으니 그것은 무엇보다도 학적부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 필자의 마음을 알았는지 두번째 메일이 도착하였으니 바로 거기에 그렇게 보고 싶었던 학적부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판결문을 발견한 이후부터 무려 20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학적부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칼럼에 소개하였지만 바로 어제같은 경우만 하여도 참으로 암담한 상황이었다.


그것은 그리도 기대하였던 우랄공대에서 박찬오의 기록이 나오지 않았으며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던 박찬석도 결국은 동일인이이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었으며 추가로 발견된 박순옥도 역시 박찬오는 아니었다.


여기에다가 사업가가 통화할 때 우랄공대 고문서 담당자의 말을 전했는데 우랄공대에 박씨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1923년생은 전혀 없다는 것이었으니 그동안 박찬오가 우랄공대에서 재학하였을 것으로 믿었던 필자의 희망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기적같은 일이 일어 났으니.....


필자가 작년에 구입하였던 책이 문득 떠올랐던 것인데 그것은 예전에 본 내용중에 "1947/48학년도 북한 유학생의 소련 고등교육기관 입학 현황"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리스트를 보면서 이미 확인한 우랄공대에 학부생 20 대학원생 2을 보면서 이제 더 이상 우랄공대에서 박찬오을 찾는 것은 힘들다고 생각하였는데 바로 그 밑에 있는 스베르들롭스크 광산대학 10에 촛점이 모아 졌던 것이다.


사실 광산대학은 책을 구입한 이후 몇차례 본 바 있지만 모든 촛점이 우랄공대로 모아졌으며 더불어 박찬오가 전공을 물리학을 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광산대학은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런데 필자가 결정적으로 놓친 부분이 있었으니 그것은 스베르들롭스크라는 대목이었다.


박찬오의 판결문을 발견한 이후 그가 해방이후 우랄산맥에 있는 스베르들롭스크에 있는 공과대학으로 유학갔다는 것이 해방이후의 최초의 흔적이었다.


그렇다면 아무리 우랄공대도 중요하지만 설사 물리학 분야가 아니고 광산학분야라 해도 스베르들롭스크를 주목하고 이 학교를 추적해야 하였거늘 바로 그 부분을 소홀히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믿었던 우랄공대에서 결국 그의 기록을 찾는데 실패하면서 속으로 그렇다면 이제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 솔직히 막막한 심정에서 바로 그 책이 혜성같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서 사업가와 다시 통화할 때 광산대학읜 존재를 처음으로 언급하였더니 비록 광산대학이 공과대학과는 별개의 대학이지만 일단은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그런데 타이밍이 절묘하였던 것이 사업가가 방문하였던 우랄공대에서 그 광산대학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사업가가 이왕 우랄공대까지 온 김에 가는 길에 광산대학도 방문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이번 사업가는 금년에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에 알게 된 사업가인데 한마디로 신뢰감이 가는 분이었으니 필자가 이런 좋은 분을 만난 것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연락이 왔는데 박찬오의 기록을 찾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정식으로 학적부 기록이 아니라 사업가의 전언에 의하면 광산대학의 PC에서 박찬오로 검색하니 그 성함이 나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러한 성함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는 이것을 통하여 박찬오가 이 학교에 재학하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필자는 이 부분을 주목하였던 것이며, 그러한 조사결과를 칼럼으로 완성하여 어제 올린 바 있다.


그리고 바로 오늘 뜻밖에도 사업가가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광산대학을 방문하는 열정적인 행보를 보인 끝에 결국 사진과 더불어 그리도 보고 싶었던 박찬오의 학적부를 보내 옴으로써 드디어 해방이후의 박찬오의 공식적인 기록이 발견되는 결실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2013년 5월 8일(수) 칼럼니스트 문 암 올 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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