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온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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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8 14:21 조회1,933회 댓글0건본문
아래글은 한국명문이란 사이트에 댓글로 올라온 글입니다
신과객
"클린코리아"님의 의도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6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당사자도 아닌 그 후손들에게 형식보다 "정신적"으로 사죄/용서/화해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입니다. "면죄부"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님께서 그 사건의 실상을 얼마나 알고 계시는지는 모르지만
[갑]가문을 죄인(악), [을]가문을 무고한 피해자로 단정하시는 것은 너무 성급하신 판단은 아닌지 한번쯤 물러서서 다시 생각해 보실 필요는 없을까요? 물론 정말로 무고한 가문의 사람들을 모함하여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면, 즉 정말로 "죄"를 저질렀다면, 사죄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 참으로 마땅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사죄와 용서가 “형식과 정신이 같이 조화를” 이루려면 가해자 쪽에서 정말로 자신이 “죄”를 저질렀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데 6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 후손들에게 그런 생각을 가지라고 요구하는 것은 저로서는 납득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개국한 조선왕조 500년사를 더듬어 볼 때 피를 뿌린 정치적인 사건은 무수히 많았던 것 같습니다. 만약 그 많았던 피의 역사에서 모든 가문들이 [갑]-[을] 가문처럼 원한으로 대립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의 후손들은 “원수” 아닌 사람들이 없을 것입니다. [갑]-[을] 가문의 비극적 결과도 결국은 정치적 소용돌이 속의 한 역사적 사건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다만 [갑]-[을] 가문의 관계가 다른 경우와 달라 보이는 것은 [을] 가문의 한 분께서 “금혼유언”을 남기셨기 때문인데, 물론 ‘원한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그런 유언까지 남기셨을까’하는 생각도 해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결코 덜하지 않았던 사건에서도 그런 원한에 사무친 “유언”은 없었던 경우가 많았다는 것도 기억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금혼유언” 때문에 가해자가 악(죄인)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매우 수긍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저 자신이 공식적으로 배웠던 국사 시간에는 [갑]-[을] 가문의 문제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고 다만 ‘용의 눈물’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아, 그런 일이 있었던 모양이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지요.
그 사건 자체는 우리 역사의 주요 사건으로 자리 매김될 수 있을지언정 [갑]-[을] 가문의 ‘원한 관계’는 어디까지나 양 가문의 문제이지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드라마는 글자 그대로 드라마이므로 이야기의 극적인 면을 강조하기 위해, 그리고 시청자들의 감정, 즉 호기심, 동정심 등을 자극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극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버릇이 있지요. 시청자들이 거기에 따라 울고 웃고 분개하고 좋아하는 것은 자유이나, 현실에서는 늘 냉정하고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우리는 이제 냉정한 마음으로 이 시각, 이 장소에서 생각합시다.
600년 전 그 사건이 있었을 당시 당사자들이 마음속에 품었던 그 원한, 그 증오는 어디까지나 간접적일뿐, 오늘날 그 모든 후손들의 가슴속에 100%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죄가 있으면 반성하고 상대방에게 사죄해야 합니다. 제가 그걸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님께서 “면죄부”라는 말을 무슨 뜻으로 쓰신 것인지는 알듯 말듯하지만 이 경우 어디에서도 함부로 써서는 안 될 말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는 말 속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근거가 희박한 엄청난 가정(assumption)을 전제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만인이 납득할 수 있는 자료와 근거에 의하지 않고 섣불리 한 가문을 “죄인” 또는 악인 취급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갑]가문의 후손들이 [을]가문의 후손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갑]가문의 후손들이 600년 전 자신들의 조상을 “죄인”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게 과연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더구나 100% 수긍도 되지 않는 사건에 후손들이
조상을 “죄인”으로 몬다는 것은 그들 입장에서는 ‘천하에 불효막심한’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 자신도, 사실 문제를 떠나서, [을]가문의 가슴에 품은 한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갑니다. 그리고 당시에 그 분들이 겪었을 참기 어려운 고초에 대해서도 간접적이나마 느끼고 있으며 그에 대해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6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언제까지 과거 회귀적 사고로 “형식과 정신이 조화된” 사죄와 용서를 요구하실 것입니까? 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정신”을 요구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것은 어린 학생들 교육 문제가 아닙니다. 그저 경전 속에 나오는 말이라고 모든 것에 다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설령 그것이 일반적으로는 옳은 말이라 하더라도 실제 상황 속에 해당되는지는 잘 가려서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들춰내어서 고칠 수 없다면 (혹은 더 악화된다면) 덮어둘 수밖에 없지요. 그것이 비록 올바른 정답은 아니라 하더라도 현 상황에서 피할 수 없는 최선의 해결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그들끼리 형식적이나마 (“정신”은 알 수 없음)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하니 다시 그 문제를 제3자가 거론하는 것은 자칫 오해를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쯤에서 기다려 봅시다.
마지막으로, 토론 전개 과정에서 작은 예 하나로 전체적인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서로서로 조심하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끝내고자 합니다.
“클린코리아”님의 관심과 걱정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리면서 조용히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가다리기로 하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2007-07-27 오후 3:18:00
클린코리아
그렇긴 합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서 그 때 상황을 지켜보지 않는 이상
누가 잘못한 것이고 누가 진짜 피해자 였는지 는 그 시대에 살아가신 분들만 아시겠지요.
어쨌든 갑 가문과 을 가문의 대표님들께서 서로 공식적으로 화해를 하셨다니
이것만 보더라도 정신적인 화해도 어느 정도 이루진거라 생각합니다.
제 덧 글에 친절히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07-07-27 오후 4:36:00
고선지
동성동본도 8촌 이내만 아니면 결혼할수 있는 세상에 600 년전의 일을 갖이고 논한다는것은 웃기는 일이 아닌가.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하고 최영을 죽였다
이방원은 포은 정몽주를 죽이고
이방원은 삼봉 정도전, 동생인 방석.방번을 죽였고
유자광은 남이 장군을 죽이는데 앞장을 섯다.
조광조는 홍경주 심정 남곤에 의해서 죽게 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적을 제거하는데 별다른 도의적 책임이 없었다.
조선조 전기역사 에서는 훈신들에의해 사림이 사화로 얼마나 많이 죽임을 당했나
조선조 후기에는 환국이란 이름으로 서인 남인 소론 노론의 싸움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다
이들이 모두 정적을 원수처럼 여겼다면 우리나라는 원수로 넘쳐났을 것이다.
이방원의 왕권강화 정책 공신 척신의 발호를 없애기 위해 많은 사람을 제거했다. 그중에 가장 억울한 피해를 본 가문이 여흥민씨, 청송심씨다
조선조 후기 학자인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민씨와 심씨네의 죽음은 태종이 훗날을 위해 죽인것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현대 역사학자도 이를 수긍하고 있다.
조선조 역사 전체를 보고 해석을 해야지 당시 사항만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근시안적인 행동이다.
2007-08-01 오후 2:20:00
고선지
태종은 상왕 시절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도 제거했다. 영의정 심온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갈 때 전별하는 거마(車馬)가 장안을 뒤덮었다는 보고를 듣고 자신의 사후 세종의 왕권 강화를 위해 제거한 것이다. 심온의 동생인 총제(總制) 심정이 상왕 경호 문제를 언급한 것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심온까지 연루시킨 것이다. 이 비정한 외척 제거에 대해 이익(李瀷)이 ‘성호사설’인사문에서 “민(閔)씨·심(沈)씨 두 집안이 함께 흉화(凶禍)를 당하게 되었으니, 대개 먼 장래를 생각함이 매우 깊었던 것이다”라고 긍정했듯이 역사의 평가는 냉혹한 것이다
2007-08-01 오후 2:33:00
설총
고선지님! 옳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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