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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泳敎 諡號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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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3-06-14 14:57 조회5,194회 댓글0건

본문

24세 휘 박영교(朴泳敎) 1849(헌종 15)~1884(고종 21).미----대원-相로-海壽-

齊堂-元陽-泳敎

박영교(朴泳敎) More Info.

고종(高宗)18년(1881년), 별시(別試) 병과3(丙科3)

생년(生年) 1849년, 기유

본관(本貫) 반남(潘南)

거주지(居住地) 경(京)

부(父) 박원양(朴元陽)

조부(祖父) 박제당(朴齊堂)

증조부(曾祖父) 박해수(朴海壽)

외조부(外祖父) 이윤행(李潤行)

전력(前歷) 유학(幼學)

응복-동량-미-세교-태두- -대원-상로-海壽-齊堂-元陽-泳敎

. |--泳孝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판서 원양(元陽)의 아들이며, 영효(泳孝)의 형이다.

1878년 음보(蔭補)로 금성현감(金城縣監)을 지내고 1881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수찬(修撰)이 되었으며, 통리기무아문주사(統理機務衙門主事)를 거쳐 승지(承旨)가 되었다.

1882년 《地球圖經》을 저술하였으며, 1883년에는 전라도암행어사가 되어 활동한 뒤 다시 승지에 임명되었다.

1884년 12월 4일 아우 영효와 김옥균(金玉均)․홍영식(洪英植) 등 개화당(開化黨)이 일으킨 갑신정변에 함께 가담, 우정국(郵政局)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사대당(事大黨)요인들을 타도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그러나 청군(淸軍)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김옥균․박영효․서광범(徐光範)․서재필(徐載弼)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자신은 홍영식과 더불어 끝까지 왕을 호위하다가 사대당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1894년 12월 죄명이 효주(爻周)되고 복관(復官)되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박영교

본관 반남(潘南). 시호 충목(忠穆).

1881년(고종 1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고,

1884년에 아우 영효(泳孝)와 함께 김옥균(金玉均)․홍영식(洪英植) 등과 모의하여 사대당(事大黨) 정부를 쓰러뜨리고 새로운 혁신정부(革新政府)를 세우려 하였으나 민비(閔妃)측의 요청으로 청(淸)나라 군사가 개입하자 좌절되고 홍영식과 함께 피살되었다. 1894년에 죄적(罪籍)을 말살하고 복관(復官)되었다.

고종 17/11/17(신사) / 성균관에서 감제를 거행하다 》

성균관(成均館)에서 감제(柑製)를 거행하였는데, 부(賦)에서 유학(幼學) 박영교(朴泳敎), 신석유(申錫游)

에게는 모두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고종 18/03/28(경인) / 박영교(朴泳敎)를 수찬(修撰)으로,

모두 임금의 특지(特旨)로 임명한 것이었다.

고종 19/02/21(정축) / 가례 도감의 관리들에게 품계를 올려 주다 》

가례 도감 도제조(嘉禮都監都提調) 이하 세자(世子)를 배종(陪從)한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 익위사(世子翊衛司) 관리 이하 사람들을 차등있게 표창하였다.

사옹원 정(司饔院正) 박영교(朴泳敎), 상례(相禮) 한기동(韓耆東)에게 다같이 품계를 올려 주었다

고종 19/08/23(병자) / 각종 외국 서적을 수집․연구시킬 것에 관하여 심석영이 상소하다 》

유학(幼學) 심석영(沈錫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러하였다.

우리 나라 교리(校理)인 김옥균(金玉均)이 편찬한 《기화근사(箕和近事)》,

전 승지(承旨) 박영교(朴泳敎)가 편찬한 《지구도경(地球圖經)》 등 책들은 모두 막힌 소견을 틔워주고

시무(時務)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들입니다.

고종 20/06/22(경오) / 전라도 암행 어사(全羅道暗行御史) 박영교(朴泳敎)를 소견(召見)하였다.

고종 21/10/19(경인) / 밤에 북묘에 거처를 옮겼다가 청 나라 오조유의 병영에 옮기다 》

밤에 임금이 북묘(北廟)에 거처를 옮겼다가 그길로 또 선인문(宣人門) 밖에 있는 청(淸) 나라

통령(統領) 오조유(吳兆有)의 병영(兵營)에 옮겼으며, 각 전(殿)과 궁(宮)들도 노원(蘆原)으로 옮겼다.

이날 신시(申時)에 청(淸) 나라 군사들이 대오를 나누어 대궐문으로 들어오면서 총포를 쏘았고

우리 나라 (左營)과 (右營)의 군사들도 따라 들어오니 일본 군사들이 힘을 다해 막았다. (酉時)에 임금이

(後苑)에 있는 (延慶堂)에 피접 해갔다가 각 전(殿)․궁(宮)들과 서로 연계를 잃고 다시 (玉流川)

뒤 북쪽 담문에 이르렀다. 이 때에 비로소 (武藝廳) 군사와 호위군사[衛士], (別抄軍)이 들어와서 호위하여

문을 열고 (北廟)로 갔다. 일본 공사(公使)는 군사를 거느리고 대궐을 떠났는데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서재필(徐載弼) 등은 모두 따라가고 오직 홍영식(洪英植)․박영교(朴泳敎) 및 사관 학교(士官學校)

생도(生徒) 7명만이 임금의 뒤를 따라 북묘(北廟)에 갔다. 해시(亥時)에 오 통령(吳統領)은 임금이 북묘(北廟)에

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거느리고 맞이 하러 갔다. 홍영식(洪英植) 등이 임금의 옷자락을 끌어당기 면서

가지 말라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임금을 부축하여 네 사람이 메는 가마에 태우니 홍영식 등은 또한

성이 나서 꾸짖었다. 우리 군사들이 홍영식과 박영교를 쳐죽이고 또 생도(生徒) 7명을 죽였다.

원세 개(袁世凱)도 군사를 보내어 임금을 영접하였다. (子時)에 (宣人門) 밖에 이르러 (吳統領)의 (軍營)에서 묵었다

순종 03/07/18(양력) / 조인승 등 83명의 벼슬을 추증하여 주다 》

죽은 도승지(都承旨) 박영교(朴泳敎), 에게 다같이 특별히 정2품의 품계를 주는 동시에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의

벼슬을 추증하며 죽은 부사(府使) 박헌양(朴憲陽)】에게 다같이 특별히 종2품의 품계를 주는 동시에

규장각 부제학(奎章閣副提學)의 벼슬을 추증할 죽은 학생(學生) 박제선(朴齊璿), 에게 다같이 특별히

종3품의 품계를 주는 동시에 규장각 직각(直閣)의 벼슬을 추증할 것이다

순조 03/08/24(양력) / 박영교, 조총희, 김학우 등에게 시호를 내려주도록 하다 》

지시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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