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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玄 石 公 의 題 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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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한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3-07-26 12:23 조회3,389회 댓글0건

본문

題跋

跋活塘公所讀大學 乙巳(1665) 二月十九日

 

世稱東方理學之倡. 蓋自麗季牧老諸公. 而圃隱爲之首.

我先祖潘南先. 並生一時 其學相埒. 遂同掌敎泮宮. 之乙卯樹立.

且與鄭公長弟罹禍. 則其所以麗澤交輔者. 必有端緖. 而今不可得聞矣.

逮我朝城中之際. 聖化休明. 學問之士. 蔚然輩出. 而寒暄爲之冠. 根瀋末茂.

源遠而流益盛.及門私淑之徒. 號多巨儒. 若靜菴. 慕齊. 松堂卽其人也.

我高祖冶川先生少志于學. 師友松 慕. 大爲靜菴諸公所推後

復興晦齊李文元公昵侍冑筵. 啓沃仁廟. 俾聖德日躋.

未幾被壬人安老所擠
. 而論沒嶺南.
 
道之難行也如是 鳴呼憘矣.

自是厥後 余家以率禮好善 表爲搢紳楷範洎

基子南逸公與 其嫡孫活塘公.

擧能繼述先志 益以勉學篤行 尊賢取友自厲 孶孶講誦不已.

及乎正色立朝 讜論直道 俱有可著 眞所謂不忝其先者也.

第以累經兵燹. 遺文書籍 散亡殆盡 近始得聞活塘公所讀大學一冊獨存

其舊觀
. 而批閱朱墨. 手澤粲然. 世采於是俯仰摩挲. 反復嗟歎. 不勝高

景之思
. 若躬奉警欬於函丈之間.
 
則又未嘗不恨 其後嗣罔能用力于家學也.

今同宗姪錦昌副尉泰定 寔爲公曾孫. 而將後南逸公者.

間挾是書詣世采 . 請問頗勤. 余旣嘉其有志. 仍勉以二祖所學.

且謂是書本末. 不可以不錄. 於是乎遂言.

 

세상에서 말하기를,

동방에 처음으로 성리학이 흥기할 때는 대개 고려의 끝머리이다,

선생 牧隱諸公이 창도하실 때로,

그중에 圃隱, 우리 선조이신 潘南 선생이 계셨으니,

그 학문이 비등하시어, 일시에 뛰어 나셨는데,

乙卯年에 중흥시킨 泮宮에서, 同伴으로 敎官이셨다.

 

그리고 차례로 鄭公禍害를 입으심은,

高麗를 보좌하려하심이 단서가 됨이니,

(國家) 은택을 입으심에 있는 것이다.

이제, 오늘날도에 그 말이 들리는 것은,

우리 朝鮮이 성립되는 중에도, 聖化가 멈추지 않고 미치어,

학문하는 선비가 蔚然하게 배출되니,

寒喧(김굉필)이 그 영광을 입었고,

근원은 깊고 후학이 무성함은,

원류가 멀리서 흘러 내려와 더욱 번성함이어라,

 

그를 私塾하는 문도들에는,

세상에서 호칭하는 거유들이 많으니,

약간만 헤아려도, 靜菴慕齊, 松堂 이 있으니, 즉 그 사람들이다.

나의 고조이신 冶川선생이 어릴 때부터 학문에 뜻을 두시어,

師友이신 松堂慕齊에게 배우셨고,

大科 때에는 靜庵諸公의 추천을 받으셨더라.

후에 晦齋 李文元公과 더불어 東宮仁宗을 계도하여 가르치시니,

나날이 성덕이 더하시었다.

 

미기에,

金安老謫所에서 풀려날 때에 禍害를 당하시고,

嶺南으로 물러나 하셨으니,

오호, 어렵고도 어렵도다. 를 행하기가 이렇게 지난함을.

 

먼저 자신을 바로잡은 후에,

家率에 이르게 하고,

을 좋아하여 그 안에 머물며,

表裏가 여실하여 紳者(朝臣)들 중에 이름을 떨친 분은,

그 아들이신 南逸公嫡孫이신 活塘公이시니,

능히, 先祖雄志를 잃지 않고 계승하셨음이라.

나날이 勉學에 힘써서 학문을 높이고,

행실을 신실하게 하며,

현자는 존숭하고,

벗을 사귐에는 괴로움을 함께하셨다.

부지런히 학문을 갈고닦아,

조정에 임하여 정직함을 말하고,

의론에는 直道에 머무시니,

이에 모든 것을 갖추어 구비하시어,

소위,

더 할 것 없는,

진실로 선도자라 하시리라.

 

차례로 병란을 당해,

경전들이 불에 타 없어지고,

남겨진 문적도 흩어져 없어질까 위태로운데,

근래에 듣기를,

활당공이 읽으시던 대학책 한권이 남아있어,

(웃어른이 남기신)오래된 책을 볼 수가 있었으니,

손수 검열하시며 적어가신 붉은 먹물의 찬연함에,

世采는 무릎 꿇고 엎드려, 두 손을 받쳐 받아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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