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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국모 순정황후의 밀사 윤홍섭 추모[브레이크뉴스-2013-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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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관우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3-09-09 14:42 조회5,7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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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국모 순정황후의 밀사 윤홍섭 추모

 
박관우 칼럼니스트

독립운동가 창석 윤홍섭은 해평윤씨 문중의 후예로서 1893년 해평부원군 윤택영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대한제국 마지막 국모 순정황후의 친정오빠이면서 한편으론 밀사의 역할을 수행하였던 창석의 삶을 뒤돌아 보면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창석의 선친과 백부는 일제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방이 되는 순간까지 결코 일제에 타협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순정황후의 내탕금 10만원을 신익희에게 전달하여 상해임정수립 준비자금으로 사용된 점은 황실의 자금이 임정수립에 관련되어 있음을 입증하여 줄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창석은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된 이후 신익희,나경석 등과 함께 항일운동을 모의하였으며,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에 최남선의 부탁으로 윤용구에게 항일운동에 동참하여 줄 것을 권고하다가 일제에 의하여 체포당하는 수난을 겪었는데 이러한 내용은 3.1운동과 관련된  그의 심문조서에서 밝혀진 것이다.
 
이와 더불어 1922년 부인 한유상과 함께 도미하여 미국에서 와세다 대학동창인 장덕수와 함께 친이승만 계열의 뉴욕 한인 유학생들이 창간한 3.1 신보의 발기인으로 활동하였으며, 특히 미국생활과 관련하여 대학에 진학한 사실을 눈여겨 보지 않을 수 없다.
 
구체적으로 오레곤 주립대학을 졸업하였으며, 이어서 콜롬비아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 이후 1935년에는 아메리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니 이것으로만 미루어 보아도 그의 학구열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마침내 1935년 귀국하여 항일 비밀결사 단체인 흥업구락부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된 경력이 있는 것을 통하여 볼 때 창석이 일제시대에 다양한 방법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던 사실을 엿볼 수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창석의 행적은 황실의 독립운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순정황후의 밀사로서 신익희에게 자금을 지원한 부분과 더불어 해방 전에 일본에 있는 영친왕을 방문하여 대한제국 황태자라는 사실을 선언하라고 권고한 점은 의미심장한 일로 생각된다.
 
한편 일제시대가 끝나고 해방이후의 창석을 행적을 살펴 보면 이왕직에서 명칭이 변경된 구왕궁청의 사무장관을 비롯하여 순헌황귀비가 창립한 숙명여대의 이사장을 역임하였으니, 창석은 한마디로 일제시대는 황실의 인척으로 순정황후의 밀사로서 항일운동을 하였으며, 해방이후에도 황실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활동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특히 창석의 선친과 백부가 일제에 협력한 그러한 배경속에서 일제와의 타협을 단호히 거부하고 항일운동에 투신한 창석을 숙연한 마음으로 추모하며 순종황후의 밀사 창석 윤홍섭의 항일운동 행적이 널리 전파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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