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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석치 정철조와 연암 산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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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한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3-10-02 15:31 조회5,400회 댓글0건

본문

 

石痴 鄭喆祚燕巖山莊圖.

 

18세기 서울에서는 일부 학자가 서양의 신학문을 받아드려 깊이 연구하

여 그 이해도가 폭넓게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 그들은 청나라를 통하여 들

어온 서양 학문에 급속하게 빠져들고 있었다
.

이미 도그마 화하여 매너리즘에 빠진 정주학은 정체된 학문이 되어 앞으

로 나아갈 수 없었고
, 급변해가는 시대를 따라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젊은 선비들을 중심으로 서울의 한 복판에서 지식의 변혁이 진

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 지식의 패러다임이 급속히 변화하여 가는 중심에

연암선생을 중심으로 한 그룹을 이루고 있었으니
, 그들은 利用厚生를 이

루러 면 북쪽 청나라의 선진화한 문물제도를 받아드려 개혁을 하여야 한

다는 북학파였으니
,

연암 박지원과 담헌 홍대용을 정점으로 이덕무, 박제가, 이서구, 유득공,

石痴 鄭喆祚
등과, 남인계열인 이용휴 , 이가환 정약전, 정약종 등이 있었

.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석치 정철조((1730~1781), 그는 영조

50
년 갑오(1774)의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을 지낸 사람으로 김원행

의 문하에서 담헌 홍대용과 동문수학한 문아한 선비인데
, 그의 재주가 뛰

어나서 여러 방면에 재주가 뛰어 났다한다
.

박종채가 쓴 <과정록>에는 아버지의 친구 정철조를 평가한 대목이 있

.

 

석치는 학문과 교양을 지녔고 기예에 빼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리하여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인중
(引重), 물건을 높이 들어 올리는

승고
(昇高), 회전하는 물레인 마전(麻轉) 물을 퍼 올리는 기구인 취수(

)와 같은 각종 기계를, 마음으로 연구하여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 모두

옛 제도를 본떠 지금 세상에 쓰이도록 시도했다
.”

 

선비에게 요구되는 文雅의 측면은 말할 것도 없고, 다양한 기예에 골고루

빼어난 재능을 소유했다고 밝혔다
. 심지어는 여러 가지 기계까지 직접 제

작했다고 한다
. 여러 문헌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당시 일반 선비의 평범

함에서 벗어나 있다
. 당시의 지배계층의 안목으로 볼 때 그는 사회 규범

에서 벗어나 일탈의 길을 간 사람이다
. 그는 사대부들이 선호하는 전통적

학문의 범주에 속하지 않은 수학과 천문학
, 지도학에 매진했다고 한다.

그리고 세밀한 그림
(현대화의 기법)을 잘 그려, 조정에 불려가 어진을 모

사하는데도 참여하였다고 하며
, 특히 벼루의 조각에 뛰어나 당시에 그가

조각한 벼루 하나는 가지고 있어야 선비로서의 체면이 선다고 하였다고

한다
.

그때까지는 바람 풍자처럼 생긴 벼루라 하여 밋밋한 風字벼루만 있었으

, 정철조가 비로소 돌의 모양을 살려 여러 무늬를 정교하게 새긴 벼루

를 조각해내니 그 모양이 뛰어나고 오묘하기까지 하여 하나의 훌륭한 예

술품이기에
, 소장의 가치가 충분하여 뭇 선비들의 요청이 쇄도하였다고

한다
. 그는 돌만 손에 들었다하면 조각하는 칼이 무엇이 되었든 뛰어나게

정교한 문양을 새겼다고 한다
.

그의 石痴돌에 미친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이란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는 石痴가 그렸다는 <燕巖山莊圖>를 인터넽을

뒤적거리다가 보았기 때문이다
.

오래전에 국문학자 이가원(1859~1948) 박사가 <연암소설연구>를 출

판할 때 인쇄되어 출판된 책에서 촬영하여 올린 것으로 생각되는데
, 그림

이 작고 검게 뭉겨진 듯 보여 잘 알아볼 수는 없으나
, 글에서 연암협을 읽

었고 상상하여 왔기에 충분이 그 정경을 떠올릴 수 있었다
.

 

여기 안대희 라는 작가가 지은 <벽광나치오(癖狂懶痴敖)>에 실린 글을

옮겨본다
.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 1807~1876)도 정철조의 그림을 보고 평

을 남겼다
.

그가 쓴 <이호산장도가(梨湖山莊圖歌)>에는 정철조가 그린 <연암산장

>를 묘사한 대목이 나온다.

 

우리 집에도 산장도(山莊圖)가 있거니

산장은 할아버지 연암 선생께서 지으셨네.

고반정(考槃亭)은 계곡을 내려다 보고

하당(荷堂)과 죽각(竹閣)은 연목 뒤에 있네.

별처럼 널리고 바둑알처럼 놓여 면면이 새로워

단청을 칠하지 않았어도 산골짜기에 찬란하지.

석치 정공께서 <산장도>를 그려주시니

빈풍(豳風)의 시에 망천(輞川.당의 화가 왕유)의 그림인 듯.

실오라기 하나, 털끝 하나 나눠 그려 눈에 어른어른하고

참된 경물은 파려축경(玻瓈縮景) 그림보다 더 오묘하네.

나뭇잎 짙은 속에 꾀꼬리 숨어 있고

계곡물 흐르는 곳에 사슴이 물마시네.

가서 소요하고 싶어도 길이 너무 멀어

대청에 펼쳐놓고 마음만 달려가네.

鄭公이 비록 그림에 정통하다 하나

그림 밖 풍경까지 집안에 끌어들이지 못하고.

정공이 비록 그림에 정통하다 하나

눈 내린 겨울 풍경과 장마철 여름 풍경을 한 폭에는 못 담아내지.

 

김기서(金箕書)가 보여준 <이호산장도>를 보고 집안에 전해오는 <

암산장도
>를 자랑삼아 묘사한 시다. 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박지원

의 집인 연암산장을 정철조가 사실적으로 그려주었다
.

그 그림을 박규수가 소장하고 늘 감상했다. 박규수는 그림이 실오라기

하나
, 털끝 하나 나눠 그려 눈에 어른어른하고 / 참된 경물은 파려축경 그

림보다 더 오묘하다
.”고 했다. 파려축경은 카메라 옵스큐라로 그린 것을

뜻한다
.

그림이 실제 풍경을 마주본 듯 하고, 카메라 옵스크라로 재현한듯하다는

것이다
.

정철조가 실제로 카메라 옵스큐라 기법을 사용해 그림을 그렸을까. 단정

하기는 어렵지만 서양과학에 몰입한
知的 경향으로 볼 때 충분히 가능하

.

 

이 그림 <연암산장도>는 후손 박영은 씨가 소장했다고 했으나 현재 소

재를 알 수 없다 한다
. 이가원 선생의 <연암소설연구>에 수록되어 있다.

 

2013년 추석을 지나며. 평택 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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