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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 시제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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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한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3-11-07 11:57 조회3,8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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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반남 시제를 다녀와서.

 

114. 월요일. 맑음.

 

2일인 토요일 이른 아침 수원 북문에 있는 농협 앞에서, 경기도지회 주관으로, 나주의 반남면에 있는 호장공 세일사에 참례하는 일행을 따라 아침 9시에 출발을 하였다. 철원 망제단 세일사 때에 종서 대부님과 약속하기를 경기지회의 차편에 함께 동승하기로 하였는데, 종서대부님이 오시지 않아 의아한 마음으로 떠났다.

출발 후 10분이 지나자 대부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말씀은 없었으나 아마 차편의 시간을 놓치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안 나오셨습니까.?” 하고 묻자 저녁에 승용차로 혼자 내려가겠다.”는 대답을 듣자, “승용차로 혼자 내려가려고 하였으면 나더러 남아 있으라고 하였으면 좋지 않았어요? 혼자 장시간 운전을 하려면 지루하고 심심할 터인데, 이제는 어쩔 수없이 혼자 내려와야 하게 생겼으니 운전 조심하고 내려오시고, 내일 시제 때에 뵙시다.”하고 통화를 끝내었다.

버스가 출발하자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더니 고속도로에 들어설 무렵에는 제법 많은 양이 되어 내리기 시작하였으나, 단풍의 막바지를 즐기려는 나들이 차량이 도로에 가득하여 정체를 빗고 있었다.

젊은 총무의 오늘의 일정을 소개하는 안내 방송이 있고 이어, 부회장이신 문양 대부님의 인사와 당부말씀을 통하여 하루의 일정을 알 수 있었다. 내 옆자리는 종서대부님의 자리인양 비어 있었다. 묵묵히 비오는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가을의 향취를 음미하였지만, 천안을 지나면서 빨라지는 속도에 길가의 경치는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정안 휴게소에서 잠시 정차할 때, 안양에 사시는 토산공 총무인 찬훈씨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종서대부의 전화를 받았다는 이야기와 본래 늦잠이 많아서 차편을 놓쳤나보다며 미리 통화를 하여보지 못한 점을 후회하였는데, 그 점은 나 역시 마찬가지가 아닌가?

일정대로 차는 군산 시내를 어렵게 지난 후, 새만금 간척지의 제방대로를 달렸지만, 차창 밖의 풍경은 운무에 가려 보이는 것이 없었다. 오직 제방위로 난 일직선의 도로면과 제방 가에 부딪치는 파도만 보일뿐 넓게 펼쳐진 바다는 보이질 않았다.

버스는 탄탄대로를 쉬지 않고 달려 변산반도에 닿아 전망대에 올라가 멈추었으나 보이는 풍경은 운무에 가린 산봉우리 몇 개가 전부이고, 바다는 어디에고 볼 수가 없었다. 버스는 이내 출발하여 내소사를 향하자 차창 밖으로 간간히 붉은 단풍이 눈에 들어왔다. 버스는 변산반도를 가로지르는 말재를 넘어 내소사를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여보니 관광지답게 무수한 관광버스와 승용차가 넓은 주차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사통 발달로 잘 닦여진 도로로 인하여 국토는 좁아졌고, 행락객은 넘쳐나고 있어, 관광지라면 어디에나 인파로 메워지고 있어, 나라는 좁고, 인구는 넘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식당에서는 미리 계약을 하고 떠났기 때문에 도착하자 이내 산채비빔밥이 나왔다. 그러나 시간이 촉박하여 산사에는 올라가 보지도 못하고 이내 출발을 서두르는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복잡한 군산을 비껴 부안군의 신청사 뒤로 돌아가면, 암반에 각자한 커다란 글씨가 있는데, 옛날 부안 현감으로 오셨을 때 蓍壽께서 물 흐르듯 쓰신 蓬萊洞天’ 4자의 草書가 있으니 그 글자를 둘러보고 오는 것이 나을 번하였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총무가 어찌 미리 오늘의 날씨를 예측하였으랴?

 

나주에 도착하니 이미 날은 어두워진 후였고, 미리 예약한 국밥집에서 국밥으로 저녁을 먹었다. 국밥집의 상호는 거창하게 삼대를 이어가는 노안국밥집이란다. 국내 삼대 공중파 방송사에 이름이 소개된 집이라고 현수막은 자랑하고 있었으나, 모텔에서 잠을 자고 이튼 날 아침 다시 가서 아침 식사로 국밥을 먹은 후, 잠시 주위를 둘러보니 그러한 국밥집이 한 둘이 아니었다. 방송사에서 맛좋은 국밥집이라고 소개하는 방송을 보지 못하여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너도나도 그런 문구를 내걸고 영업을 하면서 방송에 나왔다고 자랑하는 그 문구를 어찌 신뢰할 수 있겠는가. 잠간의 틈을 내어 주변에 있는 옛 관아를 찾아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부지런히 반남의 호장공 묘소로 향했으나, 벌써 도착한 차량(버스)이 있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한 후 연이어 버스와 승용차가 도착하고 있었다. 큰 길에서 호장공의 묘소로 향하는 길에는 참사를 위해서 전국에서 모여오신 종인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묘소 입구에는 대종중 도유사님과 총무유사님이 주인의 입장으로 참례 종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대종중 도유사님과 총무유사님께 인사를 마친 후 종서대부를 찾았다. 만나서 몇 시에 도착하였는가를 물으니 밤 12시에 출발하여 5시경에 재각에 도착하였으나 잠시도 눈을 붙일 수 없는 상태라 온 밤을 한숨도 자지 못하여 피곤하단다. 종중의 여러분을 만나 뵙고 인사를 드리며 주위를 둘러보니 묘소 주변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고, 잔디는 고르게 윤색을 띠고 있었다.

문득 논산의 참판공 묘소가 뇌리를 스쳤다. 묘소의 잔디가 이렇게 잘 자라고 잡초 하나 없이 관리하지 못하는 나의 무능력에 허탈한 심사가 들었다. 이런 묘소를 보면 부러운 생각이 들으나 더는 어쩔 수 없는 나의 처지가 아닌가?

 

이윽고 제향을 시작한다는 총무유사님의 말씀에 따라 參祀者들의 자리가 정돈되고, 집행부의 인사순서가 끝나자 집례를 맡으신 문양 대부의 유창하고 낭랑한 창홀에 이에 서계공 종부의 부드럽고 해맑은 목소리로 해설이 잇달아, 순 한문으로 이루어진 홀기의 뜻을 알아듣기 어려운 참사자분들에게는 이해함에 많은 도움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나 자신도 평소에 생각하기를 제례식순에 불과한 창홀을 구태하게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한문 문장을 그대로 낭독하기 보다는 번역을 한 문장으로 낭독하여 준다면 신세대들이 얼마나 알아듣고 이해하기 좋을까 하고 생각하여 왔었다. 호장공의 묘소에서 진행된 제사는 매끄럽고 막힘없이 순조롭고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문제는 霜露齋로 건너와 망제단의 급제공의 단제 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상로재 앞마당에 마련된 천막안의 식탁으로 몰려가 점심을 먹으려는 종인들이 망제단에 모여 제사를 지내려하는 종인들보다 더 많았고, 여러 종인들이 식탁에 모여서 내는 시끄러운 소리는 망제단의 제사를 방해하고 있었으며. 상로재에서 받드는 문정공의 제사에 모인 종인들의 수는 전체 참사원의 삼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시조공의 제사를 끝내자 마치 가을놀이를 온양 마음이 풀려, 얼른 점심을 먹고 다른 곳의 관광지로 이동하려는 듯 하는 모양이 영 마뜩찮았다. 멀리서 이곳까지 왜 왔는가? 나의 선조에게 경배하고 흠모의 정을 표하려는 참례자의 마음이 없이, 그저 늦은 가을날 관광을 겸한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까지 왔다면 너무나 실망스럽다. 참사하시는 종인이 이제 거의 600여명에 가깝다고 하지만, 다섯 분 제위의 제사에 끝까지 참례하는 분은 겨우 150여분에 불과함에는 돌이켜 생각하여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사에 참례하려면 먼저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음주가무를 삼가며 근신하여야하고, 참례 중에는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고 어른들에게 늘 교육을 받아왔다. 물론 喪中祭祀哀祀哀痛의 심정으로 를 지내며, 大喪을 지난 이후의 慶祀이니 즐거움을 가지고 임하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墓祀는 추모의 정을 표함이 그 목적이니 그것에 걸 맞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부인과 딸들과 함께 어린 손자들을 데리고 오신 종인들도 여러분이 계셨는데,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이들에게도 교육상 좋은 본보기가 됨은 아닌 것 같다. 일단 먼 길을 여기까지 오셨고, 오실 때의 목적은 선조님들의 제사에 참여가 목적이었으니, 모든 제사절차를 마칠 때 까지는 함께 참례하는 모습을 보임이 당연한 것 아닌가? 다섯 분을 모시는 제사에서 겨우 두 분의 제사를 마쳤을 뿐인데 우르르 식사를 하러 몰려가는 모습은 교육상으로도 보기가 좋은 것은 아니니, 차후에는 이런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제물을 차림에 있어 옛 보다는 정성이 덜 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옛 어른들은 포를 놓으셔도 문어포를 정성스럽고 보기 좋게 오려서 놓으셨고, 육포도 올리셨으며, 고임새를 보더라도 일정한 높이에 키를 맞추어 보기가 좋았는데, 대종중에서 주관하는 성대한? 세일사에 단출하게 차림도 좋으나, 높이가 과일과 유과의 고임새 높이가 제 각각이라 아래에서 올다 보려니 별로 좋은 모양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과방을 책임지고 일을 하시는 분의 어려움과 고충은 십분 이해를 하지만, 밖에서 바라보는 한 사람의 종인으로서는 좀 더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 외 다른 분들은 점심식사 문제를 가지고 말들이 있었으나,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로 좀 불편하다는 것뿐임으로 거론할 문제가 되지 않았고, 모두가 주인이라는 주인 의식이 있다면, 일을 하시는 여러분의 수고를 나누려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은가 합니다. 식탁 앞의 의자에 편히 앉아서 식당에서와 같이 써빙하여 주기를 바람은 조금 지양하여야할 자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식사 끝에 가서는 밥이 떨어지는 사태가 벌어졌지만 이는 오히려 좋은 징조가 아닌가 하는 점은, 주관하는 대종중의 집행부의 예상을 뛰어넘는 종인들이 찾아주신 결과니 예상 인원이 줄어둠 보다는 좋은 일인 것 같아 흐뭇하다면 흐뭇한 결과라고 봅니다. 조금 참고 기다리니 새로 한 밥을 먹을 수 있었고, 또 기다리는 동안 여러 어른 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길어서 좋았습니다. 상경하는 버스 안에서 문양대부께서 식사가 소훌 하였더라도 이해하라는 말씀은 가당치가않는 말씀으로, 대종중의 도유사와 총무유사 재무유사를 비롯한, 여러 직임으로 봉사하신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2013년 11월 7일. 평택에서 한우 頓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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