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장 (戶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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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장(戶長)이란 어떠한직임(職任)을
하였을까?
호장[戶長]
호장이란 주,부,군,현,의 향임(州,府,郡,縣,의 鄕任)을 담당하던 관리로 섭호장(攝戶長) 정조호장(正朝戶長) 안일호장(安逸戶長)등이 있었으며 향리(鄕吏)라고 하였다.
향직중 가장 높은 직으로서 고려 성종 2년(983)에 향리의 직을 개정할 때 신라 이래의 [당대등(堂大等)]을 [호장]으로 개칭한 것인데 조선시대에는 이것을 [아전]이라 하고 천시하였으나 고려시대에는 그 지방호족이 이에 임명 되였으며 그들은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정부에 들어가 얼마든지 출세 할 수 있었다.
◎ 우리나라 명문거족의 시조 태반이 호장 출신이었던 것이다.
[고려사]열전에 향리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수상까지 올라간 경우가 무수히 많은 것을 보면 고려시대의 호장은 사회적 지위가 낮지 않았든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제75권 선거지 에 보면 향직의
1품은 삼중대광, 중대광
2품은 대광, 정광
3품은 대승, 좌승
4품은 대상, 원보
5품은 정보
6품은 원윤, 좌윤
7품은 정조, 정위
8품은 보윤
9품은 군윤, 중윤
[문헌비고]에 기록되어 있는 각 성의 시조를 보면 경주를 본으로 한 [박], [석],[김],삼성과 [이],[최],[정],[손],[설],[배],등 6부의 성을 비롯하여 신라 이전의 사람을 시조로 한 성도 약간 있으나 대부분은 고려시대의 사람을 시조로 삼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민족이 고려시대로부터 일반민중이 중국식 성을 썼기 때문이다.
[성]은 본래 중국에서 발생한 것이지 우리나라 고유문화가 아니다.
우리가 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중국 문화를 수입한 이후의 일로서 대략 4세기 내지 5세기 무렵 삼국시대부터 이나 먼저 왕실에서 사용하고 다음으로 중국에 내왕한 일부 귀족과 유학생 등이 사용하였을 뿐이요 기타 귀족과 일반 민중은 [거칠부],[이사부],[사다함],등과 같이 우리말로 된 이름만 사용하고 성은 쓰지 아니하였다.
고려초기부터 중앙정부의 관리는 대개 성을 사용하였으나 [호장],[부호장],등 지방의 호족과 일반국민은 여전히 [성]을 쓰지 아니하였다.
고려중기 [문종]9년[1055]에 성을 붙이지 아니한 사람은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주지 아니한다는 법령을 제정한 후부터 [호장],[부호장],등 지방의 호족도 차츰 성을 쓰기 시작하여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다 성을 쓰게 되었다.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 신라 이래의 고성은 10여종에 불과 하고 나머지는 모두 고려시대에 발생한 [성씨]인데
예를 들면
[한산이씨 시조 이윤경]
[진성이씨 시조 이석]
[반남박씨 시조 박응주]
[동래정씨 시조 정지원]
[풍산유씨 시조 유절]
[고령신씨 시조 신자성]
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명문 거족의 시조 중 고려말기의 호장이 많은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참고문헌, 삼국유사,삼국사기,고려왕조사,증보문헌비고,제계고,1,2,3,권)
2007.5.6
성균관 전인, 전례사, 연천향교, 의전장의,
숙천공 후 원우(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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