堂號와 濯纓 金馹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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堂號와 濯纓 金馹孫
사람은 누구나 출생하면 성명 삼자를 지어 부르게 되는데, 우리의 선조들은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가장 존귀하게 여겨 남들이 함부로 부르는 것을 불경스럽게 여겨서 함부로 부르지 않으려는 뜻에서 아호나 당호를 지어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태어나서 부모나 조부에게서 성명을 받더라도 함부로 부르지 않고 따로 아명을 지어 불렀으며, 장성하여서 관례를 올리면 웃어른이나 스승에게서 자를 지어 받아 불리었고, 사회에 나가 교제가 넓어지거나 글이라도 짓게 되면 호(號)를 지어 자신을 불렀으니, 이것을 자호(自號)라고 하며, 벗들이 지어 주어서 부르기도 하였으니 이것을 아호(雅號)라고 한다.
또는 자신이 거처하는 집에 이름을 짓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당호(堂號)이며, 그 당호로 자신의 호를 삼기도 하였다.
15세기 말엽, 연산군이 왕위에 있을 때에 조선조(朝鮮朝) 최초의 사화가 일어났으니 이것이 무오사화(戊午士禍)다. 이 사화의 시초(始初)는 이극돈(李克墩)이라는 훈구대신과 유자광(柳子光)이라는 서출의 벼슬아치가 사감(私感)을 품고, 임금 성종이 승하하여 전왕의 실록을 편찬하고 있던 사관(史官)인 탁영 김일손에게 위해(危害)가하고자 하여, 사초(史草)에 실린 점필재 김종직 (佔畢齋 金宗直)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트집 잡아, 광해군(光海君)에게 모해(謀害)하여 죽게 하였으니, 이 영남의 선비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이다.
우리 정랑공(正郞公)은 탁영 김일손과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정랑공(正郞公) 유사(遺事)에 나오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少與濯纓金季雲友善, 濯纓繫獄, 公日候金吾門外, 時廢主遣金吾郞, 搜採濯纓家文書, 公之筆跡最多, 金吾郞匿其書, 公得免. 濯纓集, 朴敎理增榮哀詞, 有高靈申漑之, 錦川朴期叟云云, 卽公也.
(哀詞云, 希仁旣斂, 翌日吾往哭焉, 尋與申漑之,朴期叟送柩於東門外.)
어렸을 적에 탁영 김일손과 사이가 좋았는데, 탁영이 옥에 갇히자 날마다 금오문 밖에서 기다렸다.
그때 폐주(연산군)가 의금부 도사를 보내 탁영의 집에 있는 문서를 수색하게 하였는데 공의 필적이 가장 많았으나 의금부 도사가 이를 숨겨 주어 공이 화를 면하였다. (무오사화 때).
『탁영집』의 「박교리증애영사」에 고령 신개지, 금천 박기수라는 말이 있으니 바로 공이다.
(애사에 희인이 이미 염을 하고 그 이튼 날에 내가 가서 곡을 하였다. 조금 뒤에 신개지 박기수와 같이 동문 밖에서 영구를 보냈다.)
『탁영집.濯纓集』에 있는 「탁영선생년보」에서 정랑공(正郞公)에 관한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〇 庚申權葬于楊州之石橋原{在州南五十里}
<1498년 7월> 경신(29일) 양주(楊州)의 석교원(양주 남쪽 50리)에 임시 장례를 지내다.
[註] 경신일은 26일이다. 앞의 글에서 날짜가 3일씩 밀리는 것으로 보아 29일 계해일 같다.
朴期叟{兆年}先生之神交也,先生繫獄日候金吾門外,至是不避危機與先生家人營窆于此.
정신적 교우 관계에 있던 박기수(朴期叟;兆年)가 선생이 옥에 갇히던 날 의금부 문 밖까지 와서 문안한 바 있었는데, 처형당한 지금에 와서도 위기를 피하지 아니하고 선생 집안사람들과 더불어 양주에 무덤을 만들었다.
『탁영선생년보(濯纓先生年報)』.
역적의 협의를 쓰고 감옥에 갇힌 죄인을 감옥으로 찾아가서 면회를 한다는 것은, 왕조시대에는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목숨을 건 행동으로 대단히 무모한 일이다.
더구나 가인(家人)들을 데리고 가 역적이 되어 죽은 사람의 시신을 거두어 그의 무덤을 만들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 때의 대다수 사람들은 탁영과 왕래한 사실이 알려져 연루될까 전전긍긍하면서 숨을 죽이고 눈치만 보고 있던 때였다.
오늘은 그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이, 그의 벗 권자범(權子汎)의 당호(堂號)를 지어주던 이야기를 적어 보련다. 권자범의 이름은 경유(權景裕,?~1498)로 자범(子汎)은 그의 자(字)이다.
그도 탁영에 연좌되어 제천에서 잡혀 올라와 탁영과 같이 사형을 받았다.
이 글은 탁영이 죽기 석 달 전인 4월에 휴가를 받아 고향인 영남으로 내려가던 길에, 제천의 수령으로 있던 권자범에게 들렸을 때 지은 것이라고 한다.
김일손(金馹孫)이 지은 「치헌기(痴軒記).」
연산군(燕山君) 때, 3년 동안 제천현감으로 있으면서 많은 선정을 베풀었던 권자범이 이곳에 조그마한 초당(草堂)을 짓고는,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 탁영 김일손(1464~1498)에게 초당의 당호(堂號)를 지어 달라고 부탁을 하자 「치헌(痴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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