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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박씨의 서계가문 -김학수- 201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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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6-05 11:25 조회4,0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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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정치적 소용돌이의 땅…문화·학술의 씨앗 뿌리다
[경화사족의 삶과 문화] ⑧반남박씨 서계가문:지조로 일군 학자집안의 가풍
데스크승인 2014.06.02  | 최종수정 : 2014년 06월 02일 (월) 00:00:01   

⑧반남박씨 서계가문:지조로 일군 학자집안의 가풍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의정부시 장암동에 석림사(石林寺) 계곡으로 알려진 역사·문화공간이 있다. 수락산의 서편에 자리한 이 곳은 산세가 수려하고 수석이 아름다워 피서나 산림욕을 즐기려는 인파로 연중 북새통을 이루는 휴양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곳이 서계 박세당 집안의 사패지(賜牌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반남박씨 서계가문에 있어 1623년에 일어난 인조반정은 커다란 전기였다. 부친 박정(朴炡)이 28세의 나이로 반정에 참가하여 정사공신(3등)에 책훈되어 출세를 보장받고, 60결(結)에 달하는 토지를 하사받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박정은 기름진 호남의 땅을 마다하고 척박한 양주 수락산을 택할 만큼 절제를 아는 사람이었지만 이 시대의 수락산은 분명 정변의 부산물이었다. 패자의 땅을 몰수하여 새로운 승자에게 지급하는 그런 땅이었던 것이다.

이 방대한 토지는 서계에게 그대로 대물림되었다. 그러나 서계는 수락산을 풍요의 터전으로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수락산 석천동의 농민들과 호흡하며 지식의 실천에 목말라했고, 이 척박한 땅에 잔존한 정치적 색채를 말끔히 제거하고 문화와 학술의 새로운 씨앗를 뿌리기 위해 애를 썼다. 서계는 설흔 다섯 해를 그렇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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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 정사공신교서(1625년) : 서계의 아버지 박정이 인조반정에 세운 공으로 받은 교서(공신증명서).

<서계가문의 터전 : 양주 수락산 석천동>

원래 서계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토박이’였다. 어릴 때는 성명방(誠明坊)에서 자랐고, 비록 더부살이기는 해도 장가를 들어서는 10년 동안 정릉동(貞陵洞)의 처가에서 살았다. 그 후 출사하여 꼬박 여섯 해의 녹(祿)을 모아 서울 외곽의 양덕방(陽德坊)에다 새 집을 마련하였으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분가한 지 고작 5개월 만에 조강지처 의령남씨를 사별하고 만 것이다. 지아비의 학업과 출세를 위해 헌신한 부인이었기에 그녀의 때 아닌 사망은 서계에게 비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로부터 1년여 지난 1668년 정월 서계는 서울살이를 철거하여 양주 수락산 석천동으로 이주해 버린 것이다.

서계의 석천생활은 단순한 삶이기보다는 경영이라 해야 옳을 것 같다. 먼저 서계는 집 주변의 샘을 석천으로 명명한 뒤 동네이름으로 삼고는 바위에다 ‘석천동’이란 글자를 새겨 이 곳이 자신의 구역임을 천명하였다. 수락산이 서울의 동쪽이란 뜻에서 산등성이는 동강(東岡), 시내는 동계(東溪)라 했고, 당시 자신의 호였던 잠수와 결부시켜 물은 잠수(潛水), 언덕은 잠구(潛丘)라 했다. 동계로부터 북쪽으로 8~9보를 가면 잠수가 사는 집이 있다고 했는데, 지금의 서계종택이 바로 이 곳이다. 서계의자찬묘표(自撰墓表)에 따르면, 복숭아(桃)와 살구나무(杏), 배나무(梨)와 밤나무(栗)로 울을 삼은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집이었다.

석천동의 여러 승경들 중에서도 서계가 가장 즐겨 찾던 곳은 집 주변의 취승대(聚勝臺)였다. 취승대는 동계 안에 있던 네 개의 자연석으로 천하의 승경을 취합해 놓은 아름다운 장소라는 뜻이다. 서계는 틈만 나면 지팡이를 짚고 취승대로 나들이를 떠났다. 봄이면 동대에서 꽃을 감상하였고, 여름이면 남대에서 바람을 쇠고, 가을이면 서대에서 달을 완상하였으며, 겨울이면 북대에서 눈을 가지고 놀았다. “그렇다고 동대에 달이 없는 것이 아니었고, 서대에 꽃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며, 남대에 눈이 없는 것이 아니었고, 북대에 바람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고 한 서계의 표현처럼 취승대는 풍화설월을 만끽하는 조망대이자 빼놓을 수 없는 일상의 공간이었으며, 자연과 교감하며 심신을 달래는 유식(遊息)의 무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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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계종택 : 박세당이 살던 집터에 19세기 초반에 그 후손 박종길이 건립한 종가.

<17세기를 대표하는 학술과 문화의 공간 : 석천동>

인걸과 자연의 조화 때문이었을까. 삭막하던 수락산에서는 어느새 사람의 훈기가 느껴지기 시작했고, 문화와 학술의 향도 피어 올랐다. 석천에서의 안정된 생활은 서계의 시심(詩心)을 자극했고, 비록 절창(絶唱)은 아니지만 이 시기의 옥고들은석천록(石泉錄)으로 묶여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제 서계는 야인이 다 되었지만 그를 찾는 사람들은 날로 늘어만 갔다. 남구만(南九萬), 윤증(尹拯), 박세채(朴世采), 최석정(崔錫鼎), 최석항(崔錫恒), 최창대(崔昌大), 조태억(趙泰億) 등 저머다 한시대를 풍미했던 명사들의 내방 행차가 그치지 않았으니, 만동(滿洞)의 호황이 따로 없었다. 특히 서계는 손아래 처남인 남구만과 세사를 잊은 채 창수화답하는 일이 잦았다. 지금도 개울 상류에는 두 처남·매부가 놀던 반석이 남아 있고, 그 아래의 바위에는 남구만이 쓴 ‘수락동천(水落洞天)’이란 글씨가 300년의 풍우 속에서도 웅건한 필치를 간직하고 있다.

사실 서계는 1686년에 장자 태유, 1689년에 차자 태보를 잃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석천동에서 저술에 열중했다. 그의 저술활동은 29세 때인 1657년(효종 8) 동소록(東溯錄)의 저술에서 시작되었고, 1680년 이후부터는 대부분의 시간을 저술에 쏟아 부었다. 그 결과가 바로 사변록이었다. 사변록의 저술은 전후 약 13년 세월이 소요된 대작업이었다.

사변록은 대학사변록(1680), 중용사변록(1687), 논어사변록(1688), 맹자사변록(1689), 상서사변록(1691), 모시사변록(1693) 순으로 완성되었다. 사변록의 저술에 여가가 없었지만 중간 중간에 도덕경주해(1681), 장자주해(1682),북정록(1688) 등을 저술하여 왕성한 정력을 과시하였다.



< 동봉 위로 떠오른 달 서계를 비추고 : 김시습 추모사업>

석천에 입거한 서계가 그 어떤 일보다 중시한 것은 매월당에 대한 추념사업이었다. 추념사업은 온 산 가득히 남아 있는 매월당의 자취를 찾는 데에서 시작되어 그를 위해 사당을 건립하는 단계에서 마무리 되었다. 서계는 이를 위해 무려 30년 이상의 세월을 소요하게 된다.

서계가 수락산에 들어 왔을 때만 해도 김시습이 살던 매월당(梅月堂)은 없어진 지 오래였고, 한 때 그토록 융성했던 흥국사(興國寺)도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무엇보다 서계는 자신이 사는 수락산 서쪽에 매월당을 기념할만한 절이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이에 서계는 은선암의 승려 석현(錫賢)과 치흠(致欽)에게 사찰의 건립을 권유하며 공역에 드는 대부분의 비용을 부담해 주었고, 이로부터 1년만에 암자가 완성되었다. 속세와 떨어진 청정구역에 암자가 들어서자 서계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석림암(石林菴)이라 명명하고는 손수 기문을 지어 낙성의 변(辯)에 가름하였다.

매월당에 대한 추념사업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후속 사업으로 서계는 영당(影堂) 건립을 서두르게 되는데, 홍산(鴻山)의 선비들이 무량사(無量寺)에 봉안되어 온 매월당영정을 모실 새 영당을 건립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무량사는 매월당이 생을 마감한 곳으로 고종하기 전에 손수 그린 진영(眞影)이 보존되어 있었다. 이 진영은 율곡이 매월당의 자필임을 공증한 명품의 초상화였다. 이 참에 서계는 수락산에 영당을 건립하여 모사본이나마 봉안할 요량이었던 것이다.

각고의 노력 끝에 1686년 동봉사우에서 향화(香火)가 피어오르자 서계는 지인들과 함께 그날의 벅찬 감동을 함께 나누었다. 매월당에 대한 서계의 향념과 집념을 지켜보던 양주 유생들은 청액운동을 자청하기에 이르렀고, 이를 가납한 숙종은 서계가 사망하기 두 해 전인 1701년 ‘청절사(淸節祠)’라는 편액을 내림으로써 추모사업도 일단락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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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계 박세당 초상화 : 평양 출신으로 숙종 어진의 제작에도 참여한 바 있는 조세걸의 작품으로 추정.

<서계의 가훈>

1696년(숙종 22) 11월 한질에 걸려 위독한 상태에 빠진 서계는 죽음을 직감하고 1자 2손을 소집하여 유계를 내리게 된다. 이것이 그 유명한 계자손문(戒子孫文)이며, 1자 2손은 다름 아닌 태유와 필기·필모를 말한다.

서계유계는 ‘행신(行身)의 지침’과 ‘치가(治家)의 법도’를 규정했다는 점에서 ‘서계집안의 가훈’으로 규정할 수 있는데, 대부분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서계의 유계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상제(喪祭)의 절차를 검소하게 할 것, 독서(讀書)와 학문에 있어 충신(忠信)을 근본으로 할 것, 형제간에 우애할 것, 근신퇴묵하여 명철보신(名哲保身)할 것 등 그 내용은 매우 평이하였지만, 이것은 70을 바라보는 노유(老儒)의 경험에서 나온 절실한 것이었다. 검약(儉約)·간소(簡素)함으로 집약되는 박세당의 유계는 서계가문의 가풍 및 가학의 근간으로 세전되었다.



< 도봉(道峯)을 직시하는 잠수유궁(서계묘소)>

서계는 한 시대의 지성으로서 그리고 대장부로서 후회없는 삶을 살았다. 기환자제로 태어나 문과에도 장원한 수재였지만 한 때는 환해에서 부침하기도 했고, 세로에 나간 두 아들의 죽음을 목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말년에는 이단논쟁에 휘말려 70 노구를 이끌고 입성하여 대죄하는 곡절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학문적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우암과 타협하지도 않았으며, 그에 대한 호오(好惡)를 희석시키지도 않았다. 이 점에서 ‘끝내 세상에 고개를 숙이거나 소침해 하지 않았다’는 자찬묘표의 문구는 과장도 객기도 아니었다. 그 행(行)을 보면 그 언(言)을 가늠할 수 있기에 서계의 입언(立言)은 더욱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서계는 죽어 수락산과 더불어 영면에 들어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유궁은 우암의 족적이 서려있고, 사후에는 위패가 봉안된 도봉산과 도봉서원을 직시하고 있으니, 죽어서도 조면(阻面)치 못하는 두 학인의 운명이 우연치고는 너무도 공교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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