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문정공 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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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혜 2 |
1332 |
1 |
공암현 마산리 출생 字誠夫, 羅州潘南縣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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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 2 |
1353 |
22 |
을과(乙科) 제이명(第二名)으로 급제. 익재 이재현이 시관이었다. 목은 이색이 乙科 1 壯元, 문정공 乙科 2 亞元 恭愍朝登第, 학유(學諭)에 임명되었다가 세 번 자리를 옮겨 박사(博士) 지공거(知貢擧) 익재 이제현(※문정공은 익제의 제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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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 3 |
1354 |
23 |
성균관 학유 임명---> 세 번자리옮겨 박사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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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 7 |
1358 |
27 |
상서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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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10 |
1361 |
30 |
선덕랑 대부시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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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11 |
1362 |
31 |
승봉랑 봉거서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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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12 |
13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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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주부. 조봉랑 전교시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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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주사(知錦州事)로 나가 삼년 기간에 치적이 이루어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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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13 |
13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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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穡이 매부 朴尙衷과 함께 가정집을 초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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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14 |
13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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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직랑 삼사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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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16 |
1367 |
12 |
凡享祀, 禮儀司悉掌之, 舊無文簿, 屢致錯誤. 尙衷叅證古禮, 序次條貫, 手寫之, 以爲祀典, 後之繼是任者, 得有所據. 겨울 12월, 성균관 박사를 겸하였다.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양선생 및 제공과 함께 성리학을 창명하였다. 신축년1361 병화(兵禍=홍건적의 난)를 겪은 이래로 학교가 오래도록 피폐해져 복구하지 못했다. 공민왕이 부흥시키고자 하여 전해 병오년1366에 국학(國學)을 마암(馬巖) 북쪽 숭문관(崇文舘) 옛터로 옮겼다. 이에 이르러 사당과 건물들을 세우고 당대 명유들을 뽑아 다른 관직과 함께 학직(學職)을 겸하게 하였다. 목은 이선생이 대사성을 겸하여 수장이 되었고 선생과 정포은선생,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 정재(貞齋) 박의중(朴宜中),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등 제공(諸公)이 다 관속이 되었다. 매일 명륜당에 앉아 경전을 나누어 수업하고 강학을 마치면 서로 함께 의심스러운 곳을 논란하고 변석하고 절충하여 반드시 정주(程朱)의 뜻에 부합하기를 힘썼다. 이에 동방의 성리학이 크게 일어나 학자들이 기송(記誦) 사장(詞章)의 구습을 제거하고 심신(心身) 성명(性命)의 이치를 궁구하여 유가의 도를 종주로 삼을 줄 알고 이단에 현혹되지 않으며 의리를 바로하고 공리(功利)를 도모하지 않아 유풍(儒風) 학술이 찬연히 일신되었으니 다 교육의 힘이다. 선생은 또 장사(長沙) 이존오(李存吾), 정도전(鄭道傳), 김제안(金齊顔) 제공과 서로 친하여 강론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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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18 |
13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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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는 과거를 보면 미리 지공거를 지명하였는데, 기유년에 비로소 옛 제도를 혁파하고 중국의 제도를 따르니 과거 시험 하루 전날에야 비로소 지공거를 지명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과거 시험 출제를 어렵게 여겼다. 염공이 사사로이 사람들에게 “박상충 공과 정몽주 공이 아니라면 누가 출제를 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염공(=廉興邦)이 마침내 지공거의 명을 받고 두 선생이 동지공거가 되었으니 그 문장이 존중받음이 이와 같았다 겨울, 지왕부인(知王府印)으로 들어가 국정에 참여했다. 선생이 추천하여 등용한 이들이 모두 당시 명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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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19 |
1370 |
아들 은(訔)이 태어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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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思錄 성리학해설서> 1370(공민왕 19년) 李仁敏이 중국의 근사록을 복간한 책, 보물 제262호. 목판본. 4책. 제14권 제15장 끝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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