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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대장부 박상충 드라마 정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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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태서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6-13 16:50 조회4,1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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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글은 인터넷에서 갖어온 글입니다.

사내대장부 박상충 드라마 정도전과 사료 읽기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건 역사

2014/01/23 21:10

복사http://enigma1942.blog.me/40205212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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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의 새 대하드라마 <정도전>을 갈무리한 장면, 저작권은 당연히 KBS에 있습니다.(이하 출처표기 생략)

 

 

사형(師兄)! 오 마이 사형(師兄)!

 

어느 조직에서나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때로는 나이와 위치에 걸맞지 않게 진중하지 못하고, 껄렁해 보입니다. 그래도 남들보다 조금 더 먹은 '짬밥'때문에 어느 정도 대우는 받고 있죠. 물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그런 자신을 보고 뭐라 쑥덕일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상사들이 보기에는 한심하고, 못나 보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구박을 받기도 합니다. 더욱이 아래서 치고 올라오는 잘난 후배들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기가 죽을만도 한데, 속이 없는건지 마냥 웃고 다닙니다. 그래도 묵묵히 뒤에서 할 일은 합니다. 

 

또 사람은 좋은지라, 후배들이 함부로 하지도 않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때는 앞장 섭니다. "그런 궂은 일은 원래 나 같은 사람이 하는거다"라고 말이죠. 이럴때 보면 영락없는 선배입니다. 사람이 180도 바뀝니다. 싸울 때는 싸울 줄 알고, 할 말은 하는 사람입니다. 마음 단단히 먹고 '돌직구'를 던져 댑니다. 그러니 후배들이 그런 선배를 썰렁한 농담이나 하고, 체신 없다고 그냥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적당히 현실과 타협할 줄도 알고, 때를 기다릴 줄도 압니다. 비록 발연기지만, 연기도 할 줄 알고, 탐문수사도 잘하는 '명탐정'이기도 한 이 사람을 안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실제 기록으로 보이는 박상충의 모습은 드라마 속 캐릭터보다는 다소 매력이 부족한 듯 보인다. 물론 나 개인적인 생각이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올곧고 꼿꼿하여 재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을 것 같다. 또한 극 중 자신의 대사처럼 풍자나 해학을 모르는 것은 정작 박상충 자신일 것 같다는 느낌이다.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야말로 그는 비분강개할 줄 아는 <사내대장부>이자 <사대부>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고려사> 권112 열전25 -박상충 

"성품이 침착 과묵했고 의기와 큰 뜻을 지녔으며 경서와 사서에 해박하고 글을 잘 지었다. 한가할 때는 책만 들여다 볼 뿐,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는 일이 없었다. 아울러 천문과 점복에 밝아 사람의 길흉을 점치면 대개 적중하였다. 집안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었으며 관직에 임해서는 부지런하며 신중하였다. 또 의롭지 못한 행동으로 부귀를 쌓은 사람을 보면 탐탁지 않게 여겼다."?? <출처: 네이버제공 지식백과>(이하 출처표기 생략)

고.지.식

아우, 숨막힌다. 사료를 읽고 있자니, 숨이 턱턱 막히고 답답하다. 이렇게 재미없는 사람이 또 있을까. 능력 있고, 똑똑한데 문제는 무슨 말이 없다. 그저 책만 읽을 줄 알았지, 어디 세상 돌아가는 것은 관심이나 있었을 지 모르겠다. 딱봐도 부인이 고생했을 스타일이다. 이런 재미없는 남자와 살아야 한다니. 풍류나 해학은 고사하고 부인과의 달달한 로맨스라도 있었을까. 

 

그는 충숙왕 복위 1년(1332)에 밀직부사 박수(朴秀)의 아들로 태어났다. 공민왕 2년(1353), 21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했는데, 당시 과거를 주관했던 좌주(座主)가 이제현과 홍언박이었고, 박상충은 그들의 문생(門生)인 셈이었다. 훗날 아들인 박은은 아버지보다는 2년 빠른 19세에 과거에 급제한다. 어쨌든 하필이면, 이 빈틈없는 사내가 발을 들여놓은 부서가 예부(예조)였으니, 이보다 안성맞춤은 없었겠다. 예부가 무엇을 하는 관서인가. 과거와 의례를 담당하던 곳이 아닌가. 딱 자신의 적성을 찾아갔다고 본다.

 

 

예조(예부)정랑(禮曹正郞) 시절 박상충은 사전(祀典). 즉, 제사의 예전(禮典)을 썼다. 일종의 업무편람을 만든 셈이다. 공민왕 16년(1367)에 그는 정몽주, 이숭인 등과 함께 교편을 잡았다. 공민왕이 생원 수 증대, 5경 4서제 마련 등 '성균관을 개편'하는 사업을 하였고, 그에 발맞춰 경서에 밝았던 박상충이 '경술(經術)의 사(士)'로서 교관을 겸직하였다. 아마도 깐깐한 선생이 아니었을지. 한편, 모친상을 당했는데 하필이면 그때 전교령(典校令)에 임명되었다. 유학자이자 신진사대부로서 또 그 고지식함이 어디가겠는가. 굳이 <주자가례>에 입각한 3년상을 고집했다. 워낙 절차와 내용이 복잡하여 까다롭기로 유명했던 <주자가례>에 따라 상복을 3년이나 입으려 했으나, 아직 정식으로 법제화되지도 않았고 또 보통 사대부들은 100일상으로 끝마쳤기에 포기하고 전교령직을 받았다. 그러나 이 고집 센 사내는 고기를 일절 입에 대지 않는 것으로 대신하여 3년상을 마쳤다고 한다. 

 

당시 모든 향사(享祀)를 예의사(禮儀司)에서 관장하였으나 종전에는 의례를 기록해 둔 궤범이 없었으므로 자주 착오를 일으켰다. 박상충이 옛날의 의례를 참고하고 고증해 순서별로 정리한 뒤 손수 써서 제사의 궤범으로 삼으니 뒤에 이 업무를 이어 받은 사람들은 이를 근거로 삼게 되었다. 모친상 중에 전교령(典校令)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사대부들은 부모상을 1백 일 만에 마치는 것이 상례였다. 박상충은 삼년상을 치르려고 작정했다가 부득이 부임했으나 고기를 입에 대지 않고 삼년상을 마쳤다.   

 

 

박상충은 사대론(事大論)자였다. 유학자로서의 한계이기도 하다. 따라서 공민왕과 우왕 교체기 고려의 대외관계를 둘러싼 대립에 있어서 철저한 <친명파>였다. 이는 정도전도 마찬가지인데, 다만 차이가 있다. 연구에 의하면 정도전의 사대론이 북송과 남송대의 <명분론적 화이론(華夷論)>에 바탕을 두었다면, 박상충의 사대론은 <형세론에 입각한 사대론>으로 그 사상적 연원이 원의 관학(官學) 성리학에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은 '공민왕대에 이미 명나라를 섬겼으므로 다시 북원을 섬기는 것은 부당하다'는 명분하에 북원에 대한 화친을 반대하였던 것이다.

 

한편, 명 사신을 살해하고 북원으로 도주한 '김의'의 종자를 이인임과 안사기가 잘 대해준 것과 관련해서 의혹을 제기하였던 그였다. 또한 이인임이 대외적으로 혼란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북원 중서성에 백관들이 연대서명한 국서를 보내자는 제의에 한사코 서명을 거부했던 것도 역시 박상충이었다. 드라마 장면들에서 약간은 코믹하고 능글맞아 보이기도 한 그의 진면목이 여기서 나타난다. 자신의 신념을 절대 굽히지 않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모습이 기록에 나타난 사대부 박상충의 모습이다. 

 

결국, 자신의 상소로 안사기 등 친원파 세력을 몰아내었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정도전이 영접사로 갈 뻔한 북원 사신을 맞이해서는 안되며, 명나라와 손을 잡아야 한다는 상소를 두 번이나 쓰는 박상충이었다. 하지만 너무 과했던 탓일까? 오히려 이인임에게 역풍을 맞고 마는데...

 


“제가 시종(侍從)의 일원이 된지 여러 해인데 시종으로서 아뢰는 것은 예로부터 내려온 제도입니다. 근래 벌어지고 있는 일들 가운데 아뢰어야 할 것이 적지 않으나 저는 감히 입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저의 직책이 간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남의 직책을 침범할까 염려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또한 남들로부터 명성을 얻기 위해 그런 일을 한다는 말을 들을까 꺼려 침묵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은 언로가 크게 열려 있어 재상과 백관들이 모든 것을 다 말씀 올릴 수가 있으니 이는 백성을 편안하게 할 정책을 듣기 위함일 것입니다.

 

  

저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할 정책이 아무리 많이 세워졌더라도 국가의 큰 정세가 불안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그 목표를 이룰 수 없을 것으로 봅니다. 지금 국가가 처한 정세는 불붙은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자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불이 아직 타오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편안하다고 한다면 식견 있는 선비들치고 누가 마음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선왕께서 돌아가시고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하였고 명나라의 사신이 아직도 국경에 있을 때 갑자기 북원을 섬기자는 말을 꺼내어 인심을 어지럽게 만든 자는 누구입니까? 정료위(定遼衛)에서 보낸 사람을 함부로 죽인 자는 누구입니까?

 

거짓말로 사람들을 선동하면서, 사신을 맞이하려는 정료(定遼)의 군인을 도망치도록 한 후 구해주지 않은 자는 누구입니까? 선왕의 분부로 사신을 호송했던 자가 김의뿐이 아니니, 선왕의 분부로 안주(安州 : 지금의 평안남도 안주시)까지 갔다가 스스로 돌아온 대신은 누구입니까? 서북군(西北軍)을 동원해 정료위를 치려고 했던 자는 누구입니까? 김의의 글을 찢어버려 증거를 없앤 후, 사람을 함부로 죽여 사단을 일으킨 자 및 반역을 사주한 자들을 그대로 두고 불문에 붙인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김의가 반역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명나라 조정에 보고하지 않으려고 획책한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최원(崔源)이 사신으로 간 것은 과연 그 모두가 대신들의 뜻에 따른 것입니까?

 

  

지금 또한 들으니, 김의와 함께 반역을 저질렀던 자가 북원의 사신으로 함께 온다고 합니다. 반역한 적도의 몸으로 스스로 돌아와서 자신이 죄를 저질렀다고 하는데도 본국에서는 무슨 이유로 신문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김의가 반역한 배후에는 그를 조종한 자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국가의 존망이 걸린 지극히 중대한 일인 것입니다. 정세가 이와 같으니,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도 무엇이 이롭고 해로운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말씀을 올리는 자들이 전혀 이 일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자기에게 큰 화가 닥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치로 말하자면 순리대로 행하면 길하고 역리를 좇으면 흉하며, 정세로 말하자면 남쪽의 명나라가 강하고 북쪽의 북원이 약한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무릇 신의를 저버리고 역리를 좇는 행위는 천하의 불의이며 강한 것을 등지고 약한 것으로 향하는 것은 오늘날의 잘못된 정책입니다. 명나라의 신하된 처지로서 선왕께서 큰 나라를 섬기던 뜻을 어기고서 천자의 사신을 죽이고 그 말을 빼앗기까지 했으니 이보다 큰 죄악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 두 사람의 신하가 불충한 마음을 품고서 나라를 팔아 스스로의 이익을 꾀하고 그 죄악으로 인한 재앙을 나라에 떠넘기며, 종묘사직이 무너지고 백성들이 피폐해진 뒤에야 그만두려고 하니 어찌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정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전하께서 두 세 명의 충직한 대신과 함께 조속히 상황을 판단해 대처하지 않으신다면 장차 종사는 어찌될 것이며 백성들은 어찌 되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이로운 것을 따르고 해로운 것을 피하며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게 마련인데, 제가 미친 자도 아니면서 왜 이런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처형당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감히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충심에서 우러나온 지극한 분노로 위해를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어찌 제가 명성을 얻기 위해서거나 관직을 얻기 위해 이런 말씀을 올리겠습니까? 만일 전하께서 저의 말을 진지하게 살피신 후 상황을 잘 처리하시어 종묘사직을 편안하게 하고 백성들이 길이 의지하게 만드신다면 제 한 몸은 만 번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이번 주에 방영될 <정도전> 제7화, 제8화에서 아마 다루어질 것으로 보이는 <이인임의 역습>은 기록으로 봐도 실로 놀랍다. <안사기 사건>으로 코너에 몰렸던 이인임의 역풍에 우리의 '사형, 오 마이 사형' 역시 그 화를 피하지 못하였다. 고초를 겪다가 유배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4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때 다섯 살짜리 아들 하나를 남겨두었는데, 박은(朴?)이 그 이름이었고 그는 조선 세종대까지 관직에 있었는데, 좌의정까지 지낸 인물이었다.

 

       

 

 

언젠가 대언(代言) 임박(林樸)에게 보냈다는 

 

 

충신과 의사가 대대로 이어져서

나라의 국운이 오백 년 내려왔네.

어찌 짐작하였으랴 간악한 인간이 나라를 팔아서

앉은 채 역적들이 편한 잠 이루게 만들 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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