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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의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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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재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8 15:54 조회1,92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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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사랑] 외교관의 사망
                                             (2007/9/10 조선일보에서 갖어온 글)
이덕일 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입력 : 2007.09.09 22:38

사신길은 왕복 6개월이 걸리는 고달픈 길이었다. 광해군 13년(1621) 4월 만주에서 후금이 흥기하는 바람에 육로가 끊어져 뱃길로 명나라에 갔던 박이서(朴? )와 유간(柳澗)은 귀국길에 폭풍으로 익사했다. 폭풍 때문이니 명나라에 항의할 수도 없었다. ‘광해군일기’는 “이때부터 사람들이 사신으로 가는 것을 피하려고 뇌물을 써 면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전한다. 소현세자가 인질로 잡혀가 살던 심양관(瀋陽館)은 사실상 주청(駐淸) 조선대사관이었는데 장소는 좁고 사람은 많아 자주 병이 돌았다. 심양관에서 서울의 승정원에 보낸 ‘심양장계(瀋陽狀啓)’ 인조 16년 6월조는 돌림병 때문에 문신 박황(朴潢)과 선전관 이해룡(李海龍)의 종과 평양 군뢰(軍牢·죄인을 다루는 헌병) 등 여러 명이 죽었다며 의원과 약품을 빨리 들여보내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이 경우도 인질 신분이니 청나라에 항의할 수 없었다.

중국 사신이 조선에 와서 죽는 경우도 있었다. 성종 14년(1483) 10월 명나라 사신 정동(鄭同)이 조선에 왔다가 병이 났다. 조선에서는 최고의 의료를 제공하고 심지어 요동 의관(遼東醫官) 왕근(王謹)까지 초빙해 치료하게 했으나 그는 귀국 도중 황주(黃州) 생양관(生陽館)에서 죽고 말았다. 조선은 아무런 책임도 없었으나 성종은 대신들과 정사를 의논하는 상참(常參)과 경연(經筵)을 중지하는 것으로 조의를 표했다. 성종 21년(1490) 1월 일본사신 일행 중 충주(忠州)에서 병사하는 사람이 나왔다. 이들은 대마도에서 보낸 사신이었기에 대마도주 종정국(宗貞國)은 범하선사(梵賀禪師) 등을 보내 항의했고 성종은 구완을 담당했던 역졸(驛卒)을 이들이 보는 데서 엄하게 다스리는 것으로 일본인들의 마음이 풀어지도록 조치했다.

참치 샌드위치를 먹고 베이징의 한 병원에서 링거를 맞다가 사망한 황정일 주중 정무공사의 사인이 심근경색이라는 것이 중국 당국의 황당한 발표이다. 한국 정부는 이번에도 중국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구태를 반복하고 있다. 정부도 사연이야 있겠지만 조선과의 교역으로 먹고살던 대마도주가 왜 항의사절단까지 보냈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박황(朴潢) 1597-1648 나헌(懦軒)公 소-응순-동언-황-世相-泰淳-
자 덕우(德雨). 호 나헌(懦軒) 나옹(懦翁). 사복시정(司僕寺正) 동언(東彦)에게 입양.
1621년(광해군 1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624년 검열(檢閱)에 오르고 설서(說書)정자(正字)를 지냈다. 대사간 이조참의를 거쳐,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의병을 모아 반격을 기도하나 인조가 승낙하지 않아, 왕을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1637년 난이 끝난 뒤 척화신(斥和臣) 17명을 압송하라는 청나라 요구에 극구 반대, 2명만 보내게 하였다. 볼모로 가는 소현세자를 수행하여 선양[瀋陽]에 갔다가 돌아와,
1638년 병조판서 대사헌을 지냈다. 이때 김상헌(金尙憲)정온(鄭蘊)이 모함에 빠진 것을 구하고 사직하였다. 곧 대사간에 등용되고, 다시 선양으로 불려갔다 와서 대사헌 도승지를 지냈다.
1644년 전라감사로 있을 때 심기원(沈器遠)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반역혐의를 받고 김해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었다. 서예에도 능하였다.



박황(朴潢)
光海君)13년(1621년), 정시(庭試) 병과4(丙科4)
생년(生年)     1597년, 정유
자(字)             덕우(德雨)
호(號)             나옹(懦翁) 懦軒
부(父)             박동언(朴東彦)
생부(生父)     박동열(朴東說)
조부(祖父)     박응복(朴應福)
증조부(曾祖父) 박소(朴紹)
외조부(外祖父) 정엄(鄭淹)
처부(妻父)     홍서봉(洪瑞鳳)
손(孫)             박태손(朴泰遜)
전력(前歷)         유학(幼學)    
관직(官職)     대사헌(大司憲&), 옥당(玉堂)

(조선왕조실록)
인조2 11/20    박황(朴潢)을 홍문관 정자로 삼았다
인조2 12/22    박황(朴潢)을 주서로,
인조3 2/12     박황(朴潢)을 주서로,
인조3 3/17     박황(朴潢)을 검열로,
인조3 4/30     박황(朴潢)을 겸 시강원 설서로 삼았다. 박정을 홍문관 응교로,
인조3 7/3     박황(朴潢)을 홍문관 박사로,
인조3 7-/21    박황(朴潢)을 정언으로 삼았다.
인조3 10/11    박황(朴潢)을 수찬으로 삼았다.
인조4 2/11     박황(朴潢)을 정언으로 삼았다. 박동선(朴東善)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인조4 2/28    박황(朴潢)을 헌납으로
인조4 5/7     박황(朴潢)을 부수찬으로
인조4 6/11    박황(朴潢)을 헌납으로,
인조4 6/3     박황(朴潢)을 홍문관 교리로,
인조5 1/6     전라 우도 박황(朴潢) 등 열 사람을 인견하였다.
인조5 2/14    직강 박황(朴潢),
인조5 5/13     지금 순검 어사(巡檢御史) 박황(朴潢)의
인조8 6/14     박황(朴潢)을 부교리로 삼았다.
인조9 4/24     부교리 박황(朴潢)
인조10 7/19    박황(朴潢)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인조11 1/9     박황(朴潢)을 사간(司諫)으로,
인조11 2/13    박황(朴潢)을 응교로,
인조11 9/13     박황(朴潢)을 사간으로
인조12 8/1     박황(朴潢)을 전라도 양전사로,
인조12 8/19     박황(朴潢)을 대사간으로,
인조12 9/1     박황을 이조 참의로
인조12 9/21     대사간 박황이 양전사(量田使)가 되어 사체(辭遞)되고
인조13 3/4     박황(朴潢)을 이조 참의로
인조14 3/5     박황(朴潢)을 동부승지로,
인조13 3/15     박황(朴潢)을 대사간으로
인조15 2/5     왕세자가 오랑캐 진영에서 와서 하직을 고하고 떠나니, 신하들이 길 가에서 통곡하며 전송하였는데,호위해가는 재신(宰臣) 남이웅(南以雄), 좌부빈객 박황(朴潢)
인조17 3/23     三南巡檢使 朴潢이 차자를 올려 해상 방어의 기의(機宜)에 대해 논하였는데,    
인조17 5/28     박황(朴潢)을 도승지로
인조17 7/8     순검사(巡檢使) 박황(朴潢)을
인조17 12/25    박황(朴潢)을 대사헌으로,
인조18 4/27     박황(朴潢)을 대사간으로,
인조18 8/9     행 호군 박황(朴潢)이 상소하기
인조19 1/7     박황(朴潢)을 대사간으로,
인조19 1/20     행 대사간 박황(朴潢)
인조21 4/27     행 호군(行護軍) 박황(朴潢) 등을 인견하였다.
인조 21 12/5    박황(朴潢)을 도승지로,
인조 21 12/25 박황(朴潢)을 전라 감사로,
인조26 5/19    전주 부윤(全州府尹) 박황(朴潢)이 졸하였다.
     박황은 인품이 기개가 있고 뜻이 컸는데 청현직을 두루 역임하여 대사헌에 이르렀는데,
갑신년 (1644년)봄에 심기원(沈器遠)과 서로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연좌되어 김해(金海)로 귀양갔다가
수년 만에 석방되었다. 전주 부윤으로 나갔다가 이때에 이르러 졸한 것이다

특히 박황은
생부 남곽공 박동렬 문하에서 박정(금주군) 구봉서(평안감사) 홍명구(대사간.병자호란중 전사) 이지조 임당(이조판서) 등과 학업을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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