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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합천(陜川) 화양(華陽) 기거기(起居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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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태서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1-02 17:15 조회3,020회 댓글0건

본문

      

선고(先考 弘緖) 께서는 정묘(丁卯 1927)년 5월 23일 경남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552번지에서 2남 6녀중 장남(長男)으로 생(生)하시고 정해(丁亥 2007년) 8월 7일 졸(卒) 하셨다.

선고(先考)의 고조(高祖 台壽)께서는 갑술(甲戌 1814)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시어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이르셨고 증조(曾祖 齊璿)께서는 을미(乙未 1835)년에 문과에 급제하시어 벼슬이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에 이르러셨다.

선고의 조부(祖父 文陽)께서는 한양을 떠나 전라도를 거쳐 을해(乙亥 1899)년 11월 2일 아들 4명(勝仁, 勝璣, 勝斗, 勝浩)을 데리고 합천 화양 야천(冶川) 선조(先朝) 묘소하(墓所下) 에 기거(起居)하셨는데 선고의 부(勝璣) 수 18세 되던 해이시다.

그러나 정착한지 4년 만인 1903년 선고(先考)의 조부(문양)께서 갑자기 졸(卒)하시고 난 후 선고의 백부(伯父 승인) 과 숙부(叔父 승두 승호) 마저 합천 화양을 떠나시니 선고의 부(승기)만 홀로 외롭게 화양에서 기거하셨는데 처음에는 거족(巨族) 윤씨(尹氏)들과의 대립으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다.

그 이유는 그 당시 산림 및 위토 전답 관리는 윤씨들이 좌지우지 하였는데 (종중에서는 1919년부터 시향관(時享官)을 파견하고 묘소 및 위토전답을 관리하였음) 갑자기 후손이 나타나 주권을 행사하니 눈에 가시가 아닐 수 없었다.

특히 1950년 농지개혁법으로 인하여 합천 화양 위토전답 6,000 여(餘)평(坪), 거창 신원 위토전답 4.000 여 평이 소작인들에게 넘어 갔으나 합천 화양 위토전답의 경우 선고께서 소작인들에게 회유와 협박을 통하여 강제로 빼앗다시피 하여 선고의 명의로 등기하였다가 나중에 종중에 기부하였으며 거창 신원 위토전답의 경우 그 당시 신원 면장인 신두성(愼斗星)씨가 선고와 평소 교류가 있던 관계로 신두성씨를 찾아가 신씨 할머니 후손임을 강조하면서 위토전답이 모두 없어졌으니 이를 어찌할꼬 찾아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자 합심하여 역시 강제로 빼앗았다

당시는 전쟁 중 이라 종중의 어느 누구도 신경쓸 겨를도 없었고 오르지 선고 혼자의 힘 만으로 합천 화양, 거창 신원의 위토전답을 모두 찾았으니 다행이 아닐 수 없으며 선고의 공적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아니 할 것이다.


선고께서는 평소 혼잣말로 그 당시 만약 위토전답을 찾지 못했다면 어느 후손이 와서 시제를 모셨을까 하고 반문 하시곤 하셨다.

또한 선고 께서는 평생을 지극정성으로 선조묘소는 물론 위토전답을 관리해 왔으며 묘소 관리인이 없는 동안에는 자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령의 몸으로 10 여 년동안 시제를 직접 준비하였으며 항상 자식들에게도 숭조(崇祖)정신을 강조 하셨다.

이처럼 4대에 걸쳐 110 여 년 동안 합천 화양, 거창 신원. 심지어 경북 선산까지 관리해 오던 것을 이제 어머니 마저 돌아가시면 그 손길이 미치지 못할까 두렵다.

2008년 2 월 15일

자(子) 朴 贊 浩 지음


위의 글은  합천  대종중 봉사위  문강공 묘역을 관리 하시던  서포공 후 홍서님의 자제분

찬호님께서 쓰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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