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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무게- 평도공 외조부 가정 이곡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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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3-23 09:56 조회5,649회 댓글0건

본문

2015년 3월 23일 (월)
침묵의 무게

[번역문]

  다른 사람이 근거도 없이 나를 의심한다면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 한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경우도 있다. 변명에 급급하다 보면 의심은 더욱 심해지지만 반대로 내버려 두면 저절로 의심이 풀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직불의(直不疑)는 같은 방을 쓰던 동료가 금을 잃어버리자 군말 없이 선뜻 보상해 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찌 잘못 알고 금을 가지고 간 사람이 누구인지 드러나서 자신의 결백이 밝혀지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한 일이겠는가. 그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남이 나를 의심하는 것은 평소 내 행동이 남에게 신임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도 분한 마음에 큰소리로 따지고 소송을 제기하고 신명에게 질정하여 기필코 해명하고 말아야 한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느니 나는 차라리 실체가 없는 누명을 묵묵히 참으며 내면의 인격을 연마하는 쪽을 선택하겠다. 인격이 쌓여 겉으로 드러나면 모든 사람이 심복할 것이니 그때 가서는 내가 실제로 도둑질을 했더라도 현재의 훌륭한 행실이 지난날의 허물을 충분히 덮어 줄 것이다. 하물며 나는 도둑질을 하지도 않았으니 굳이 해명하며 따질 이유가 없다.”

  이것은 옛사람이 자기반성을 소중하게 여긴 일화이다. 돌아보아서 스스로 진실하다면 천지와 귀신도 믿어 줄 것인데 사람에 대해서야 염려할 게 뭐 있을까.

[원문]

人之疑己以所無。必明之可也。然或有不必者。盖急則其疑益甚。緩之然後自有可解之理焉。……直不疑之償同舍亡金。豈逆料其誤持者出。而己得以明之耶。其意盖曰。人之疑我者。以素行不能取信於人也。吾非不知憤憤其心。譊譊其口。訟之官府。質之神明。期於必明而後已。吾寧外受虛名而內修實德。積而發之而人皆心服焉。則雖眞爲盜。而今日之美。足以盖前日之愆。况其所無者乎。此古人貴於自反也。苟自反而信之。天地鬼神將信之。吾於人何慮之爲。

 
- 이곡(李穀, 1298~1351), 「의심을 푸는 방법[釋疑]」, 『가정집(稼亭集)』 제1권 「잡저(雜著)」

  
  살다 보면 터무니없는 오해를 받거나 엉뚱한 일로 남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일 같지도 않은 작은 일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점점 부풀려져 걷잡을 수 없이 퍼지기도 한다. 남의 뒷얘기라는 게 원래 재미있는 일이라, 이 입에서 저 입으로 건너갈 때마다 사실 아닌 사실이 새롭게 보태지고 말하는 사람의 재미는 커져만 간다. 그런 이야기는 대부분 ‘누가 뭐라 하더라’, ‘누가 어떻다 하더라’라는 식으로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은 것이지 말하는 당사자가 직접 보거나 들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당하는 사람으로서는 분하고 답답하여 복장이 터질 노릇이다. 소문의 진원지를 알 수 없으니 가서 따질 수도 없고, 이야기의 알맹이가 뚜렷하지 않으니 이치를 들어 해명할 수도 없다. 쑥덕거리는 소리에 귀가 간지럽고 흘깃거리는 눈초리에 뒤통수가 따가워도 꾹 참으면서 사람들이 제풀에 시들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해명을 하려고 해도 해명할 거리가 없고, 해명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또 다른 오해와 소문을 만들어낼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도 개인적인 문제에서는 내버려 두면 머잖아 말하는 사람들도 흥미를 잃어서 소문은 곧 사그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공인(公人)의 공사(公事)에 관련한 일에서는 문제가 달라진다. 어떤 비리가 밝혀져서 누군가가 그 주역으로 지목되면 그때부터 모든 언론, 전 국민이 한 마디씩 거들고 나선다. 출처도 뚜렷하지 않고 사실 확인도 되지 않은, 풍문 같은 내용이 시시각각 더해지고 너도나도 한 마디씩 거들고 나선다. 
  누구든 그 입길에서 빠지면 시대에 뒤진 사람으로 매도당하기에 십상이므로 뒤질세라 입방아에 끼어들고 자기 생각을 덧붙인다. 누구의 말이 사실이고 어떤 것이 진실인지 가늠할 수 없는 수많은 말이 떠돌아다닌다. 이쯤 되면 진실 그 자체는 이미 뒷전으로 밀려나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 소문의 올가미에 걸리면 배겨날 사람이 없다.

  이럴 때 오해를 불식시키고 결백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묵묵히 자신을 수양하는 것이라고 가정(稼亭)은 권한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되면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말고 자신의 평소 행실을 반성하라는 준엄한 충고이기도 하다. 말과 행동이 진실하여 평소 주위 사람에게 신뢰를 받는 사람은 설사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지목되더라도 ‘그 사람이 그럴 리 없다.’고 믿지 않거나 어쩌다 실수한 것이라고 덮어 준다. 그와 반대의 경우에는 사건만 생기면 자신이 한 일이 아닌데도 덤터기를 쓰는 일이 종종 생긴다. 이럴 때 억울하면 출세하려고 몸부림칠 게 아니라 먼저 스스로 반성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인용한 가정의 글 속에는 한 가지 일화가 더 소개되어 있다. 가정과 친했던 홍언박(洪彦博, 1309~1363)의 이야기이다. 홍언박의 집 여종 하나가 유모가 되어 아이에게 젖을 먹였는데 수유(授乳) 기간에 임신을 하고 출산을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홍언박의 부인이 노발대발했다. 젖을 먹이는 동안 임신을 하면 젖먹이에게 해로울 뿐 아니라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동안에는 밖에 나가지 말고 아이를 돌보는 데만 전념하라고 했는데 그 명을 어기고 남자를 끌어들였다는 죄목이었다. 닦달을 견디지 못한 여종은 상대가 홍언박인 것처럼 둘러댔다. 
  당시 연경(燕京)에 가 있던 홍언박이 뒤늦게 돌아오자 부인이 남편을 몰아붙였다. 홍언박이 “나는 천하절색 미녀도 거들떠보지 않는데 종을 가까이했을 리가 있는가?”라고 해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종은 끝내 사실을 말하지 않았고 부인도 의심을 풀지 않았지만 홍언박은 더 이상의 설명 없이 태연자약하게 생활했다.

  설령 여종이 사실대로 고백했다고 해도 부인은 의심을 풀지 못했을 것이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홍언박처럼 의연하게 일상을 유지하며 묵묵히 자신의 인격을 함양하는 것이다. 이때의 침묵은 어떤 웅변보다 더 큰 무게를 지닌다. 터무니없는 누명을 쓰면 반드시 해명하여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굳이 해명할 필요가 없는 경우도 있고 해명이 먹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도 기어이 해명하겠다고 나섰다가 의심만 증폭시키는 일이 허다하다. 그래서 세상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확인할 수 없는 말들이 난무하는 시대, 직불의와 홍언박이 보여준 침묵의 무게를 생각해 본다. 말은 또 다른 말을 만들어 내어 사고를 마비시키지만, 침묵은 깊은 성찰을 동반한다.


  

  
김성재 글쓴이 : 김성재
  • 한국고전번역원 역사문헌 번역위원
  • 주요 번역서
    - 정조대 『일성록』 번역 참여
    - 『고문비략(顧問備略) 』, 사람의무늬, 2014



 평도공 외조부   가정  이곡 선생

<고려사>

이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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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穀, 中父, 初名芸白, 韓山郡吏自成子也. 自齠齕, 擧止異常, 稍長知讀書, 亹亹忘倦. 早喪父, 事母孝. 爲都評議使司椽吏. 忠肅四年, 中擧子科. 硏窮經史, 一時學者, 多就正焉. 七年登第, 調福州司錄·叅軍. 忠惠元年, 遷藝文檢閱. 忠肅後元年, 中征東省鄕試第一名, 遂擢制科. 前此, 本國人雖中制科, 率居下列, 所對策, 大爲讀卷官所賞, 置第二甲. 宰相奏, 授翰林國史院檢閱官. 與中朝文士, 交遊講劘, 所造益深. 爲文章, 操筆立成, 辭嚴義奧, 典雅高古, 不敢以外國人視也. 奉興學詔還國, 尋復如元, 本國授典儀副令. 元授徽政院管勾, 轉征東省行中書省左右司員外郞.

 

<한국학 중앙연구원>

1298(충렬왕 24)1351(충정왕 3). 고려 말엽의 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 초명은 운백(芸白). 한산 출생. 한산이씨 시조인 윤경(允卿)6대손이다. 찬성사 자성(自成)의 아들이며, ()의 아버지이다.

이곡은 1317(충숙왕 4) 거자과(擧子科)에 합격한 뒤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원나라에 들어가 1332(충숙왕 복위 1) 정동성(征東省) 향시에 수석으로 선발되었다. 다시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하였다.

이 때 지은 대책(對策)을 독권관(讀卷官)이 보고 감탄하였다. 재상들의 건의로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이 되어 그때부터 원나라 문사들과 교유하였다.

이곡은 1334년 본국으로부터 학교를 진흥시키라는 조서를 받고 귀국하여 가선대부 시전의부령직보문각(嘉善大夫試典儀副令直寶文閣)이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휘정원관구(徽政院管勾정동행중서성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郎)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 뒤에 본국에서 밀직부사·지밀직사사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고 뒤에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이곡은 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 編年綱目을 증수하고 충렬·충선·충숙 3(三朝)의 실록을 편수하였다. 한때는 시관이 되었으나 사정(私情)으로 선발하였다는 탄핵을 받았다. 다시 원나라에 가서 중서성감창(中書省監倉)으로 있다가 귀국하였다.

공민왕의 옹립을 주장하였으므로 충정왕이 즉위하자 신변에 불안을 느껴 관동지방으로 주유(周遊)하였다. 1350(충정왕 2) 원나라로부터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郎中)을 제수 받았고, 그 이듬해에 죽었다.

이곡은 일찍이 원나라에서 문명을 떨쳤다. 원나라의 조정에 고려로부터 동녀를 징발하지 말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는 중소지주 출신의 신흥사대부로,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실력을 인정받음으로써 고려에서의 관직생활도 순탄하였다. 그는 유학의 이념으로써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대결하였다.

그러나 쇠망의 양상을 보인 고려 귀족정권에서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그의 여러 편의 시에 잘 반영되어 있다.

동문선에는 100여 편에 가까운 이곡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죽부인전 竹夫人傳은 가전체문학으로 대나무를 의인화하였다. 그밖에 많은 시편들은 고려 말기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구체적인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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