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박봉필 선생 추모비 건립 취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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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8 16:23 조회2,015회 댓글0건본문
애국지사 박봉필.bmp

애국지사 박봉필 003.jpg
국권을 간악한 국가적 강도 일본의 마수에 침탈당하여 국민이 노예생활로 전락한 1910년의 한일합방은 우리가슴에서 영원히 지울수 없는 통분과 치욕의 역사이다.
그날로부터 고난과 암묵의 36년간 풍찬노숙 몽침간에도 조국광복을 위하여 자기 희생을 하였던 애국선렬의 고귀한 헌신없이 어찌 대한민국의 오늘의 영광이 있었으리오.
박봉필선생은 그 가운데 한 분이시다.
선생은 1908년 3월 29일 경북 예천군 용문면 덕신리에서 출생하신 반남인으로 일찍 실국의 비분을 참지못하여 일가솔권하여 멀리 만주로 이주하게 되었다.
북경소재 중국의숙에서 중국어와 영어를 전수하고 애국혼으로 정ㅇ신무장된 선생은 1934년 7월 김시현 선생이 이끄는 항일결사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39년 여러 항일 동지와 함께 중경의 항일 정부지역으로 망명 하였다.
1940년 6월 무장독립군 일개사단 편성의 병력충원에 맹활약을 하였으며
1941년 9월 일본군 점령지역인 봉천으로 잠입하여 간도성과 길림성 등지로 독립군 병력증강지하 활약을 하던 중 일경에 피체 되었다. 일년여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재만 105인 지하 항일 결사사건의 주모자로 기소되어 신경(장춘)고등법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옥중에
1945년 8월 13일 패망을 앞둔 일본 관동군 헌병대는 장춘교외로 연행하여 불법적인 총살형을 감행하니 선생의 향년38세 이다.
조국광복의 제단에 젊은 생명을 받쳐 만주황야에 순국의 열혈을 뿌렸건만 반세기가 지난 지금 까지 유행 봉안이 가망이 없으니 비분(悲憤)통탄(痛歎)은 비길바 없다
1977년에 정부에서는 건국훈장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여기 선생의 애국의열을 추앙하고 아직도 광야를 달리고 있을 고혼을 달래늰 추모비를 세워 숭고한 구국정신을 후인의 가슴에 길이 새기고자 한다
서기 1996년
애국지사 반남박봉필선생지비문
강토는 유린되고 민생은 질고에 신음하던 오욕(五慾)의 일제치하에서 국권을 회복하여 동포를 구출하려고 분연히 일어나 회천의 비수를 품고 만주 광야를 누비던 애국지사 박봉필 선생의 행적은 백절불굴한 민족혼의 발로이며 찬연한 민족정기의 정화라 하겠다.
선생이 가신지 반세기 그렇게도 숙원하신던 광복은 이룩되어 번영을 구가 하건만 만리이역에서 천추의 한을 품은 채 순국하신 선생의 고혼을 달랠 길이 막막하여 여기 작은 비를 세워 선생의 의연하고 혁혁한 공적을 후인들의 가슴에 면면히 새기로자 한다
선생은 반남인으로 시조 박응주의 25세 손이며 려말의 절의지사인 문정공 박상충과 태종조 좌명공신으로 좌상을 역임한 평도공 박은의 후손이며 상신과 문형등 수많은 명신 거유를 배출한 명문의 후예이시다.
선생은 1908년 3월 29일 향리인 경북 예천군 용문면 덕신리에서 선대인 승경공의 2남으로 출생하였다. 완장 승원공에게 출계하여 성장함에 선비정신이 투철한 생,양부 두 분의 근엄정중하신 훈도로 선생의 애국정신은 함양되었다.
1915년 5월 실국의 비분을 참지 못하여 일가 솔권(率眷)하여 고국을 떠나 멀리 만주지역의로 이주하게 되었고 그곳 남만주 무순현 동주천 소재 소사국민우급학교를 졸업했으며 북경의 중국의숙으로 부급(負芨)하여 중국어와 영어를 전수하면서 항일정신을 장양하였다.
1934년 7월 항일결사인 의열단(단장 김시현)에 입단하였고 단재 신채호 선생이 제창하신 조선혁명선언에 호응하여 독립군 양성으로 항일투쟁을 계속 하였다.
1939년 1월 남경군관학교설립 및 독립군양성사건으로 장기형무소에서 5년의 옥고를 겪은 김시현 동징와 재회하여 박시목 권애라 김봉년 권혁준 동지와 함께 중경의 항일정부지역으로 망명하였다.
1940년 6월 임시정부 김구주석과 김규식박사 및 임정요인과의 회합에서 임시정부의 국제적지위의 합법적 공식승인에는 무장독립군 1개사단 병력편성이 시급한 요건으로 지적되자 선생은 영어의 능숙한 구사로 중국방면연합군최고사령관 “위드마이어” 장군과 면담하여 무기원조의 승인을 받아내었고 독립군 충원에 심혈을 경주하였다.
1941년 9월 일본군점령지구인 봉천에 잠입하여 간도성과 길림반석등지로 활동범위를 확장하면서 독립군병력증강지하운동을 전개하던 중 주구의 밀고로 일경에 피체 되었다.
비밀감옥에서 1년 이상 혹독한 고문을 받은 끝에 재만 105인 지하 항일결사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신경(장춘) 고등법원에서 무기형을 선고 받았다. 두발에 족쇄가 채워진 채 투옥되었으니 그 정황에 뉘라서 절치하지 않으리오.
1945년 8월 13일 패망이 임박하자 단말마적광란에 빠진 일본관동군헌병대는 선생을 장춘교외로 연행하여 불법적인 총살형을 감행하고 말았다.
오호 슬프도다. 38세의 젊은 목숨을 조국광복의 제단에 바쳐 순국의 열혈을 만주 광야에 뿌렸건만 반세기가 지난 지금 까지 유해봉안이 한중양국의 국교단절기와 중국문화대혁명으로 모든 문건이 소실되어 가망이 없게 되었으니 비분 통탄을 무었으로 비하리오.
1977년도에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애국장을 추서하니 선생의 애국일념의 위대한 행적은 조국의 역사와 더불어 영달하리라.
배 부인 의성김씨와 사이에 1남1녀를 두셨으니 아들은 찬녕이고 딸은 찬옥이며 손에 진형 질에 찬명 찬동 찬기 삼형제이다.
이에 선생의 위대하신 행적을 약술하고 삼가 선생의 영령앞에 송가를 올립니다.
모든 것을
나라에 바친 불멸의 이름이여
님의 영원한 애국의 승리자.
이제 따뜻한
조국의 가슴으로 돌아오시라.
광야를 말 달려서 포근한
선령의 품안으로 돌아오시라.
서기 1996년 10월 26일
(숙천공 후 찬기씨 자료제공)

애국지사 박봉필 003.jpg
국권을 간악한 국가적 강도 일본의 마수에 침탈당하여 국민이 노예생활로 전락한 1910년의 한일합방은 우리가슴에서 영원히 지울수 없는 통분과 치욕의 역사이다.
그날로부터 고난과 암묵의 36년간 풍찬노숙 몽침간에도 조국광복을 위하여 자기 희생을 하였던 애국선렬의 고귀한 헌신없이 어찌 대한민국의 오늘의 영광이 있었으리오.
박봉필선생은 그 가운데 한 분이시다.
선생은 1908년 3월 29일 경북 예천군 용문면 덕신리에서 출생하신 반남인으로 일찍 실국의 비분을 참지못하여 일가솔권하여 멀리 만주로 이주하게 되었다.
북경소재 중국의숙에서 중국어와 영어를 전수하고 애국혼으로 정ㅇ신무장된 선생은 1934년 7월 김시현 선생이 이끄는 항일결사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39년 여러 항일 동지와 함께 중경의 항일 정부지역으로 망명 하였다.
1940년 6월 무장독립군 일개사단 편성의 병력충원에 맹활약을 하였으며
1941년 9월 일본군 점령지역인 봉천으로 잠입하여 간도성과 길림성 등지로 독립군 병력증강지하 활약을 하던 중 일경에 피체 되었다. 일년여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재만 105인 지하 항일 결사사건의 주모자로 기소되어 신경(장춘)고등법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옥중에
1945년 8월 13일 패망을 앞둔 일본 관동군 헌병대는 장춘교외로 연행하여 불법적인 총살형을 감행하니 선생의 향년38세 이다.
조국광복의 제단에 젊은 생명을 받쳐 만주황야에 순국의 열혈을 뿌렸건만 반세기가 지난 지금 까지 유행 봉안이 가망이 없으니 비분(悲憤)통탄(痛歎)은 비길바 없다
1977년에 정부에서는 건국훈장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여기 선생의 애국의열을 추앙하고 아직도 광야를 달리고 있을 고혼을 달래늰 추모비를 세워 숭고한 구국정신을 후인의 가슴에 길이 새기고자 한다
서기 1996년
애국지사 반남박봉필선생지비문
강토는 유린되고 민생은 질고에 신음하던 오욕(五慾)의 일제치하에서 국권을 회복하여 동포를 구출하려고 분연히 일어나 회천의 비수를 품고 만주 광야를 누비던 애국지사 박봉필 선생의 행적은 백절불굴한 민족혼의 발로이며 찬연한 민족정기의 정화라 하겠다.
선생이 가신지 반세기 그렇게도 숙원하신던 광복은 이룩되어 번영을 구가 하건만 만리이역에서 천추의 한을 품은 채 순국하신 선생의 고혼을 달랠 길이 막막하여 여기 작은 비를 세워 선생의 의연하고 혁혁한 공적을 후인들의 가슴에 면면히 새기로자 한다
선생은 반남인으로 시조 박응주의 25세 손이며 려말의 절의지사인 문정공 박상충과 태종조 좌명공신으로 좌상을 역임한 평도공 박은의 후손이며 상신과 문형등 수많은 명신 거유를 배출한 명문의 후예이시다.
선생은 1908년 3월 29일 향리인 경북 예천군 용문면 덕신리에서 선대인 승경공의 2남으로 출생하였다. 완장 승원공에게 출계하여 성장함에 선비정신이 투철한 생,양부 두 분의 근엄정중하신 훈도로 선생의 애국정신은 함양되었다.
1915년 5월 실국의 비분을 참지 못하여 일가 솔권(率眷)하여 고국을 떠나 멀리 만주지역의로 이주하게 되었고 그곳 남만주 무순현 동주천 소재 소사국민우급학교를 졸업했으며 북경의 중국의숙으로 부급(負芨)하여 중국어와 영어를 전수하면서 항일정신을 장양하였다.
1934년 7월 항일결사인 의열단(단장 김시현)에 입단하였고 단재 신채호 선생이 제창하신 조선혁명선언에 호응하여 독립군 양성으로 항일투쟁을 계속 하였다.
1939년 1월 남경군관학교설립 및 독립군양성사건으로 장기형무소에서 5년의 옥고를 겪은 김시현 동징와 재회하여 박시목 권애라 김봉년 권혁준 동지와 함께 중경의 항일정부지역으로 망명하였다.
1940년 6월 임시정부 김구주석과 김규식박사 및 임정요인과의 회합에서 임시정부의 국제적지위의 합법적 공식승인에는 무장독립군 1개사단 병력편성이 시급한 요건으로 지적되자 선생은 영어의 능숙한 구사로 중국방면연합군최고사령관 “위드마이어” 장군과 면담하여 무기원조의 승인을 받아내었고 독립군 충원에 심혈을 경주하였다.
1941년 9월 일본군점령지구인 봉천에 잠입하여 간도성과 길림반석등지로 활동범위를 확장하면서 독립군병력증강지하운동을 전개하던 중 주구의 밀고로 일경에 피체 되었다.
비밀감옥에서 1년 이상 혹독한 고문을 받은 끝에 재만 105인 지하 항일결사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신경(장춘) 고등법원에서 무기형을 선고 받았다. 두발에 족쇄가 채워진 채 투옥되었으니 그 정황에 뉘라서 절치하지 않으리오.
1945년 8월 13일 패망이 임박하자 단말마적광란에 빠진 일본관동군헌병대는 선생을 장춘교외로 연행하여 불법적인 총살형을 감행하고 말았다.
오호 슬프도다. 38세의 젊은 목숨을 조국광복의 제단에 바쳐 순국의 열혈을 만주 광야에 뿌렸건만 반세기가 지난 지금 까지 유해봉안이 한중양국의 국교단절기와 중국문화대혁명으로 모든 문건이 소실되어 가망이 없게 되었으니 비분 통탄을 무었으로 비하리오.
1977년도에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애국장을 추서하니 선생의 애국일념의 위대한 행적은 조국의 역사와 더불어 영달하리라.
배 부인 의성김씨와 사이에 1남1녀를 두셨으니 아들은 찬녕이고 딸은 찬옥이며 손에 진형 질에 찬명 찬동 찬기 삼형제이다.
이에 선생의 위대하신 행적을 약술하고 삼가 선생의 영령앞에 송가를 올립니다.
모든 것을
나라에 바친 불멸의 이름이여
님의 영원한 애국의 승리자.
이제 따뜻한
조국의 가슴으로 돌아오시라.
광야를 말 달려서 포근한
선령의 품안으로 돌아오시라.
서기 1996년 10월 26일
(숙천공 후 찬기씨 자료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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