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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문순공 현석 박세채의 생애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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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4-20 17:27 조회3,7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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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칼럼니스트

2015년은 문묘에 마지막으로 배향되었으며, 탕평책을 최초로 주장하였던 문순공 현석 박세채의 서거 32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인데, 박세채는 어떤 삶의 발자취를 남겼는지 뒤돌아 본다.


거슬러 올라가서 초등학생 시절로 기억하는데 집에 가끔 오시는 집안 어르신이 계셨는데 필자에게는 재종조부가 되시는 분이셨다.


시기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나 어느 날 재종조부가 가문의 역사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태종 대에는 좌의정을 지내신 평도공이 계셨고, 숙종 대에도 좌의정을 지내신 현석공이 계셨다”고 말씀하여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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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관우 ⓒ브레이크뉴스

당시 초등학생 나이에 평도공이 누구이고 현석공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본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재종조부의 그 말씀이 필자의 가슴 깊은 곳에 늘 간직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세월은 하염없이 흘러 1990년대초에 증조부가 연천에서 우두시술을 하신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러한 사실이 하나의 동기부여가 되어 증조부의 행적을 본격적으로 추적하는 과정에서 증조부의 바로 밑에 동생이 박세채의 종손으로 출계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자는 종증조부가 박세채의 종손으로 출계한 사실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였으며, 2013년 8월 출간된“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에 소개된 33인중에 박세채도 포함시켰다.


박세채의 본관은 반남으로서 1631년(인조 9) 한경 서부 양생방 창동에서 교리 박의와 신씨 부인사이에 출생하였는데 그의 생모는 영의정으로서 조선왕조 4대 문장가의 한명으로서 명성을 떨쳤던 신흠의 딸이었다.


그의 가계를 거슬러 올라 가면 고조부 박소는 조광조의 문인으로서 왕도정치를 구현하려고 하였으며, 증조부 박응복은 대사헌을 역임하였는데 특히 조부인 박동량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동량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였으며,더불어 선조가 승하하기 전에 영창대군을 지켜 달라고 부탁한 유교7신 중의 한명이었다는 점이다.


아울러 그의 백부 박미는 선조의 딸 정안옹주와 혼인하여 금양위에 책봉되었으니 박세채는 이러한 명문가의 배경속에서 출생하였던 것이다.


1648년(인조 26)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 가지만 1650년(효종 1) 이이,성혼의 문묘종사문제가 제기되자 영남유생 유직이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박세채는 이이의 격몽요결로써 학문을 출발했고 이이를 존경했기에 그 상소의 부당성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이에 대한 효종의 비답속에 선비를 박대하는 글이 있자 이에 분개하고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게 되었다.


1651년(효종 2) 김상헌과 김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그의 백부 박호와 박미를 비롯하여 부친도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한 관계로 그의 사승관계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1659년(효종 10) 천거에 의하여 익위사세마가 되었으며, 그 해 5월 효종이 승하하면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거론되었을 때 3년설을 주장한 남인계열의 대비복제설을 반대하고 송시열,송준길의 기년설을 지지하였다.


당시 그가 지은 복제사의는 남인 윤선도 윤휴의 3년설의 부당성을 체계적으로 비판한 글이었다.

그는 다시 서한을 보내어 윤휴를 꾸짖었는데, 이러한 서한을 계기로 두 사람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1674년(현종 15) 숙종이 즉위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기해복제 때에 기년설을 주장한 서인측의 여러 신하들이 다시 추죄를 받게 되었다.


이에 박세채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양근,지평,원주,금곡 등지로 전전하며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기간동안 학문에 전념하여 소학,근사록,대학,중용을 중심으로 난해한 구절을 해석한 독서기를 저술했다.


또한 춘추에 대한 정자,주자의 해설을 토대로 20여 문헌에서 보충자료를 수집하여 추가한 춘추보편과 성리학의 수양가운데 가장 핵심개념인 경에 대한 선유의 제설을 뽑아 엮은 심학지결 등을 저술했다.


1680년(숙종 6) 이른바 경신대출척이라는 정권교체로 인하여 재등용되어 사헌부 집의를 시작으로 동부승지,공조참판,대사헌,이조판서를 거쳐서 우참찬에 이르렀다.


한편 1684년(숙종 10) 회니의 분쟁을 계기로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그는 황극탕평론을 주장하여 양측의 파당적 대립을 막으려 하였으나 끝내 소론의 편에 서게 되었다.


숙종 초기 귀양에 돌아와서는 송시열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 하였으나 노,소 분열 이후에는 윤증을 옹호하고 소론계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때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야인생활을 하였으니 이 무렵이 학자로서 큰 업적을 남긴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 기간중에 윤증,정제두를 비롯하여 소론계 학자들과 서신왕래가 많았으며, 양명학을 비판하고 유학의 도통연원을 밝히려는 학문적인 변화를 보였다는 점이다.


양명학변, 천리양지설을 비롯하여 이학통록보집, 이락연원속록, 동유사우록, 삼선생유서, 신수자경편 등은 이 시기에 저술한 중요한 저서들이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 이후에는 송시열이 세상을 떠나고, 서인 내부가 노론과 소론으로 양분된 상태였으므로, 박세채는 우의정,좌의정을 거치며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남구만,윤지완 등과 더불어 이이,성혼에 대한 문묘종사 문제를 확정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대동법의 실시를 적극 주장하였다.


박세채는 국내외로 다난한 시기에 태어나서 수난을 거듭하는 생활을 보냈다.


대내적으로는 당쟁이라는 정치적 대립이 격화된 시기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을 몸소 겪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라는 국제적 격동기였다.


현석의 학문은 당시 국내외 상황과 관련하여 네가지 특성으로 구별할 수 있다.


첫째는 정치적으로 존주대의의 입장과 붕당의 탕평론, 둘째는 학문의 계통을 분명히 하고 수호하는 일, 셋째는 이단을 비판하고 배척하는 일, 넷째는 사회규범으로써 예학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현석의 공적에 대해 제자 김간은 “계개의 공과 찬술의 풍부함은 참으로 근대 유현에는 없다”라고 평했다.


그가 이단을 비판하고 배척한 태도는 양명학변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여기에서 고본대학,대학문,치양지,주자만년정론, 등 양명학의 이론을 일일이 비판하였다.


양명학의 비판은 도통수호에 근거한 것이지만, 그의 제자 정제두가 양명학을 신봉함으로써 스승과 제자 관계에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제두는 8년전에 이미 의고결남계서를 써서 양명의 심설을 바꿀 수 없다 고 했고, 그 뒤 여러 사우간에 논변이 있었으므로 스승의 입장에서 이러한 저술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박세채의 많은 저술가운데 예학에 관한 저술은 매우 큰 업적을 남겨 “예학의 대가”라고 칭할만하다.


남계선생예설, 육례의집 등은 예의 구체적 실천 문제를 다룬 서술로서 과거에 보지 못한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의식 절차까지 문제삼고 있다.


이러한 예학은 변용은 17세기 성리학의 예학적 전개라는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며, 오륜의 근거를 밝히는 예학의 구현이라는 의미가 된다.


여말 선초의 사상적 전환기에 제기되었던 불교의 멸륜성을 극복하고, 예에 의한 실천 방법으로서 오륜은 매우 중요한 과제의 하나였다.


가례를 권장하고 삼강행실도, 국조의례 등을 간행한 것은 일종의 범국민적 규범 원리로써 예 의식을 광역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비의 복에 대해 기년복, 삼년복을 주장하거나, 또는 대공 기년이어야 한다는 이른바 예송은 당파적 대립의 성격을 띠기도 했지만 문제는 대립의 성격이 예에 대한 기본 문제를 검토하는데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대립적 성격은 예학의 구현이라는 유학의 기본 과제에 대한 새로운 검토이며 예학적 전개라는 발전적 차원의 문제이다.


현석의 예학적 전개는 육례의집, 별례질문 등에 잘 나타나 있으며, 이러한 그의 견해는 문인 김간의 동방예설에 계승되었으며, 정제두의 글에서 고례를 존중하고 간례를 강조하면서 이이, 성혼과 더불어 박세채의 예설을 자주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그의 예설은 정제두에게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탁월한 정치가이면서 수 백권의 저술을 남겼던 대학자 현석 박세채는 1695년 2월 5일 향년 65세로 파란만장하였던 생애를 마쳤으며, 어느 덧 서거 320주년이 되었는데, 당파를 초월하여 능력에 따라 인재등용을 주장한 점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pgu77@naver.com 

*필자/박관우.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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