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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덕행을 존경해 사후에 재혼 안한 연암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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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태서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6-12 17:21 조회3,9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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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창권의 조선시대 부부사랑법(5):연암 박지원① 이 카테고리의 다른 기사보기

    아내의 덕행을 존경해 사후에 재혼 안한 연암 박지원

  • 4061.jpg
    정창권
    고려대 초빙교수
    E-mail : myjin55@hanmail.net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 스토리텔링 사업 자문위원, 국립한글박물관 콘텐츠 자문위원, 한국박물관협회 박물관교육 프로그램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주로 여성사나 장애인사, 하층민사 등 역사 속의 소외계층을 연구하여 널리는 알리는 한편, 문화콘텐츠나 스토리텔링, 융합 등 응용학문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주요 저서로『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향랑, 산유화로 지다』,『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꽃으로 피기보다 새가되어 날아가리』,『역사 속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기이한 책장수 조신선』,『거리의 이야기꾼 전기수』,『포도대장 장붕익, 검계를 소탕하다』,『한쪽 눈의 괴짜화가 최북』,『문화콘텐츠학 강의(깊이 이해하기)』,『문화콘텐츠학 강의(쉽게 개발하기)』,『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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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6.12 10:27 | 수정 : 2015.06.12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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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식 처가살이

18세기 대문호이자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 유명한 <허생전>, <양반전> 등의 작가이자 『열하일기』의 저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개인적 성품이나 부부생활, 자식사랑 등 인간적 측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우선 연암은 키가 크고 풍채가 좋았으며, 용모가 엄숙하고 단정했다. 무릎을 모아 조용히 앉아 있을 때면 늠름하여 가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연암은 20살 전후부터는 불면증에 시달려 3~4일씩 잠을 이루지 못한 적이 많았다. 그 뒤 불면증이 약화된 후에도 새벽닭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가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곤 했다. 평생동안 하루에 고작 두어 시간 밖에 잠을 자지 않았던 것이다. 그와 함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조용히 앉아 생각에 잠기기를 좋아했다. 눈 내리는 날이나 얼음이 언 추운 겨울에도 그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연암은 16살 때 동갑내기인 전주이씨와 결혼했다. 그는 특히 처가의 도움과 영향을 많이 받았다. 결혼 후 장인 이보천으로부터 『맹자』를 배우며 학문에 정진하게 되었고, 그 아우 이양천으로부터 사마천의 『사기』를 배우며 문장 짓는 법을 터득했다. 또 처남 이재성은 평생 동안 그의 학문의 충실한 조언자가 되어 주었다. 원래 연암의 집안은 노론 명문가요 조부께서도 경기도관찰사와 같은 높은 벼슬을 지냈으나, 워낙 청빈(淸貧)을 추구했기 때문에 집안 살림이 늘 쪼들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와 형은 평생 벼슬하지 않고 포의로 지냈고, 그도 역시 나이 50세까지는 말단 벼슬조차 하지 않았다.

전주이씨는 이처럼 가난한 집안에 시집와서 남모를 고생을 많이 했다. 신혼 초에는 집이 비좁아 친정에 가 있을 때가 많았고, 중년에도 자주 이사를 다니곤 했다. 그럼에도 단 한번도 눈살을 찌푸리거나 괴로워하는 기색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또 집안 살림을 주장하는 맏동서를 공경하며 동서간의 우애도 좋았다. 그래서 연암은 평소 아내의 덕행을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박지원 초상화.
박지원 초상화.
아내에게 절개를 지킨 남자

연암은 나이 50살에야 평생지기 유언호의 천거로 종9품 선공감 감역이 되어 벼슬길에 나아갔다. 가난한 살림살이로 아내의 고생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평시서 주부, 제릉령, 한성부 판관에 오른 후 55세엔 안의혐감을, 61세엔 면천군수를, 64세엔 양양부사를 각각 역임했다. 그런데 연암이 벼슬길에 나아간 지 반년도 안 되어 전주이씨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실컷 고생하다가 이제 좀 살만하려니까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나이에 아내를 잃으면 다른 남자들은 재취를 하거나 첩을 들이곤 했다. 하지만 연암은 아내에게 절개를 지키며 여생을 홀로 살아갔다. 예컨대 아들 박종채가 아버지의 언행을 기록한 『과정록』의 한 대목을 살펴보자.

“아버지는 어머니를 여읜 후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맏며느리의 상을 당하였다. 그래서 끼니를 챙겨줄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혹 첩을 얻으라고 권했지만, 아버지는 우스갯소리로 대꾸할 뿐 종신토록 첩을 두지 않았다. 친한 벗들 가운데 이 일을 두고 아버지를 칭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체 그는 왜 아내를 여읜 후 첩조차 들이지 않았을까? 곤궁한 생활 속에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해준 데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평소 그의 곧은 성품과 기개 때문이었을까? 그보다는 오히려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인 듯하다. 실제로 연암은 아내가 죽자 도망시(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20수나 지었으며, 또 한글을 배우지 않아 평생 아내와 한글편지 한통을 주고받지 못한 걸 매우 한스럽게 여기기도 했다. 연암의 도망시는 모두 잃어버린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얼마 전 김명호 교수가 유만주의 일기 『흠영』에서 2수를 발견해서 세상에 내놓았다. 그중 첫 번째 작품만 살펴보기로 하자.

“한 침상에서 지내다가 잠시 헤어진 지가 이미 천년이나 된 듯,
눈이 다하도록 먼 하늘로 돌아가는 구름 바라보네.
하필이면 나중에 오작교 건너서 만나리오,
은하수 서쪽 가에 달이 배처럼 떠 있는데.”

사별한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당장이라도 뒤따라가고 싶은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②편에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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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식들에게 손수 고추장과 쇠고기 장볶음을 만들어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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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창권
    고려대 초빙교수
    E-mail : myjin55@hanmail.net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 스토리텔링 사업 자문위원, 국립한글박물관 콘텐츠 자문위원, 한국박물관협회 박물관교육 프로그램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주로 여성사나 장애인사, 하층민사 등 역사 속의 소외계층을 연구하여 널리는 알리는 한편, 문화콘텐츠나 스토리텔링, 융합 등 응용학문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주요 저서로『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향랑, 산유화로 지다』,『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꽃으로 피기보다 새가되어 날아가리』,『역사 속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기이한 책장수 조신선』,『거리의 이야기꾼 전기수』,『포도대장 장붕익, 검계를 소탕하다』,『한쪽 눈의 괴짜화가 최북』,『문화콘텐츠학 강의(깊이 이해하기)』,『문화콘텐츠학 강의(쉽게 개발하기)』,『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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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6.12 10:27 | 수정 : 2015.06.12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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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편에서 계속>

손수 고추장을 담아 자식들에게 보내주다

아내를 잃은 후 연암은 종의와 종채 두 아들, 며느리, 손자 등 자식들에 대한 정이 더욱 각별해져갔다. 그래서 멀리 타관에서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자주 편지와 함께 물건을 보내곤 했는데, 심지어 손수 고추장 같은 반찬거리를 담아 보내주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와 큰 아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차례대로 살펴보자.

“나는 고을 일을 하는 틈틈이 글을 짓거나 혹은 글씨를 쓰기도 하거늘, 너희들은 해가 다 가도록 무슨 일을 했느냐? 나는 4년간 『자치통감강목』을 골똘히 봤다. 두어 번 읽었지만 늙어서인지 책을 덮으면 문득 잊어버리곤 한다. 그래서 작은 초록 한 권을 만들었는데, 그리 긴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한 번 재주를 펴보고 싶어 그만둘 수가 없었다. 너희들이 하는 일 없이 날을 보내고 어영부영 해를 보내는 걸 생각하면 어찌 몹시 애석하지 않겠니? 한창 때 그러면 노년에는 장차 어쩌려고 그러느냐? 웃을 일이다, 울을 일이야! 고추장 작은 단지 하나 보낸다. 사랑방에 두고서 밥 먹을 때마다 먹으면 좋을 게다. 내가 손수 담근 건데, 아직 푹 익지는 않았다.”
연암선생서간첩 중 일부.
연암선생서간첩 중 일부.
“이전에 보낸 쇠고기 장볶이는 잘 받아서 조석 반찬으로 먹고 있니? 어째서 좋은지 싫은지 한번도 말이 없니? 무심하다, 무심해. 나는 그게 포첩이나 장조림 같은 반찬보다 나은 듯하더라. 고추장 또한 내가 손수 담근 것이다. 맛이 좋은지 어떤지 자세히 말해주면 앞으로도 계속 두 가지를 인편에 보내든지 말든지 하겠다.”

아버지가 손수 고추장 같은 반찬을 담아 자식들에게 보내주다니, 역시 우리 문학사상 대문호이자 실학자답다. 필자도 나이 들어 자식이나 제자들에게 손수 반찬을 담아 갖다 주고 싶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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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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