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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이단 아닌 아단자 서계 박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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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한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6-24 12:56 조회2,643회 댓글0건

본문

노론을 자극한 박세당의 이경석 비문. 

숙종 29(1703) 417일 성균관 유생 홍계적을 비롯한 180명이 상소를 올렸다. 전 판서 박세당이 자신들이 숭앙하는 스승인 송시열을 모욕했다는 것이었다. 박세당이 삼전도비문을 쓴 이경석의 신도비문을 쓰면서 송시열을 비난하는 내용을 적어 넣었다는 것이다. 죽은 송시열은 여전히 노론의 마음속에 살아 있었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아뢰기를, “박세당(朴世堂)은 전인(前人)이 주자(朱子)와 배치(背馳)된 것을 가리고자 하여 사서(四書)의 집주(集註)를 모두 삭제해 버리고 구절마다 이론(異論)을 세워 새로운 해설(解說)을 만들었으니, 이는 진실로 오도(吾道)의 이단(異端)이고, 사문(斯文)의 죄인입니다. 조가(朝家)의 처분이 명쾌(明快)하다고 이를 만하니, 국시(國是)가 이미 정하여져 다시 의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는데, 이제 그 문도(門徒) 홍우행(洪禹行) 등이 편파(偏頗)한 말을 주장(譸張)하여 방자하게 소()를 올리고, 망령되게 그릇된 증거를 인용하여 도리에 어긋남이 더욱 심합니다. 다만 박세당(朴世堂)이 있는 것만 알고, 주자가 있음을 알지 못하니, 이언(異言)과 사설(邪說)이 이제부터 멋대로 행해져서 인심(人心)이 이에 빠져들게 되면 다시 구제할 수 없을 듯합니다.

숙종실록29417일조.

 

이단 아닌 이단자 박세당(朴世堂). 

조선에는 이단(異端)이 없었던 사회라고 했는데, 이단이 아니면서 이단으로 몰려 죽은 사람이 있으니 이 또한 희한한 일이다.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이 그 사람이다. 박세당이라면 이른바 국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익히 아는 이름이다. 그런데 왜 박세당은 주자학(朱子學)의 이단으로 몰리게 되었을까?

이단(異端) 즉 사문난적(斯文亂賊)은 경전의 해석에서 생긴다. 경전(經典)이란 무엇인가. 경전은 다른 사람에 앞서서 무엇인가를 말한, 즉 최초의 발언이란 영광을 쓴 텍스트일 뿐, 태어날 때부터 기록한 텍스트는 아니다. 다만 뒷날 거룩하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경전은 고대의 말씀이다. 아득한 옛날 말의 의미를 어떻게 제대로 알 수 있는가.구약성서를 읽으면 그 심오한 의미가 환히 떠오르는가? 그렇다 치자. 하지만 당신의 해석이 다른 사람이 동의한다는 보장은 없다.

경전을 설()한 사람은 이미 먼지가 되어 버렸다. 더 냉혹하게 말하자면 그는 원소주기율표(元素週期律表)의 원소(元素)로 다시 되돌아가버렸다. 남은 것은 그의 말씀이다. 이것도 온전하지가 않다. 말씀은 입에서 귀로 떠돌다 어떤 사람의 손에 의해 문자로 정착된다. 그런즉 공자(孔子)의 제자와 예수의 제자들은 스승의 육성(肉聲)을 그대로 옮기고 있었을 것인가? 그대로 옮기고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도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 백번 양보해 육성이라고 하자. 그래도 그 말씀의 의미는 애매하다. 말씀을 가능하게 했던 상황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경전(經典)의 주석(註釋)은 이래서 생겨난다.

주석은 말씀의 의미가 이런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경전의 의미가 곧 주석가가 주장하는 의미란 등식(等式)은 필연적이지 않다. 그것은 단지 주석가의 주장일 뿐이다. 그렇다면 주석가의 주장이 진리가 되는 것은 어떤 조건에서인가. 주석가의 주석이 권력과 결합해 비판의 목소리를 뭉갤 수 있으면 진리가 된다. 진리를 만드는 것은 논리의 정합성(整合性)이 아니라 오로지 권력일 뿐이다.

 

주자(朱子)의 충실한 계승자 박세당. 

사서(四書)는 유가(儒家)의 경전이다. 한데 사서는 주자의 발명품이기도 하다. 공자(孔子) 맹자(孟子)의 시대에는 사서란 말이 없었다.논어』『맹자는 독립된 저작이었고대학중용예기의 일부분이었다. 사람들은예기속의대학중용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의 천재인 주자(朱子)대학중용이 짧지만 유가의 형이상학(形而上學)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것을예기에서 떼어냈다. 그리고논어』『맹자와 함께 사서란 이름으로 묶었다.

그런데 이 중요한 텍스트를 읽어보니 문제가 심각하다. 특히대학의 경우예기에 실린 원문(原文)대로라면 문리(文理)가 통하지 않는 곳이 적지 않다. 꼼꼼히 읽을수록 이해가 안 된다. 이럴 경우 가능성은 두 가지이다. 원래 원문이 그런 것이었다는 것, 아니면 정학했던 원문에 변개(變改)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주자는 후자를 택했다. 그는대학에 오자(誤字)와 탈자(脫字), 그리고 착간(錯簡)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대로 텍스트를 수정했다. 대학의 원래 텍스트에서, 공자의 말을 제자인 증자(曾子)가 그대로 기록한 것이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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