活塘公을 위한 辨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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活塘公을 위한 辨明.
임진년 4월 16일에 왜병이 침략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충주에서 신립(申砬)이 패전하였다는 소식을 전해오자, 30일. 거가(車駕)가 서행(西幸)하다.
이보다 수일 앞서, 서울 안이 싹 비어 버렸고 대소의 신료(臣寮)ㆍ근시(近侍)ㆍ위졸(衛卒)들이 일시에 흩어져 가 버리니, 임금은 가슴 아프게 울면서, “2백 년이나 길러온 그 속에 충신과 의사(義士) 없음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하고는, 밤중에 중전과 함께 여러 궁인(宮人)들을 거느리고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서 서울을 떠나서 아침에 벽제(碧蹄)에 이르렀다.
도중에 비를 만나 곤룡포는 다 젖었고, 동네가 텅 비어 팔진미(八珍味) 식사도 궐한 채 장단(長湍)으로 달려갔으나, 부사는 이미 도망했고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사람이라곤 없어 일행이 모두 굶주린 채 잠시 쉬고는 곧 개성부(開城府)로 향하다. 『亂中雜錄』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상공(相公)의 문집에, 파천하던 날 밤의 정경이 유릉(裕陵)에 대한 만사(輓詞)로 남아 있는데 그 만사에 그날 밤의 황망함이 잘 나타나 있다.
유릉(裕陵)에 대한 만사
伊昔仁和夜 / 그 옛날 인화문 밖 어느 날 밤에
蒼黃鳥擇棲 / 허둥지둥 새가 둥지를 찾듯 하였네.
蘭階燈影少 / 난계(궁전의 미칭)에는 등불이 매우 희미하고
繡幄雨聲凄 / 수놓은 장막엔 빗소리가 처량했는데.
獨秉金蓮照 / 나 홀로 금련 초 잡아 밝히니
親扶玉輅西 / 친히 옥로에 올라 서쪽으로 향하면서.
再三天語慰 / 두 번 세 번 간곡하게 위로해 주시니
只尺寸心迷 / 지척 사이에 촌심이 아득하였네.
運復千春慶 / 국운은 천년의 경사를 회복했건만
生萬姓啼災 / 재앙은 만백성의 울음을 자아내도다.
銜恩兼仰德 / 은혜를 입고 겸하여 덕을 앙모하오나
詞拙若爲題 / 문장이 졸렬하니 어떻게 쓴단 말인가.
임진년(壬辰年)의 변이 일어나서 충주(忠州)의 패보(敗報)가 이르자, 상(上)께서 서쪽으로 몽진(蒙塵)하겠다는 전교를 내렸는데, 이때 백관(百官)은 모두 사제(私第)로 돌아가 있었고, 위사(衛士)들도 일시에 흩어져 돌아가 버려서, 대궐 안이 적막하기가 마치 텅 빈 궁전 같았다. 새벽에 이르러서는 하늘이 흐리고 비가 내려서 캄캄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고, 거가(車駕)는 이미 준비되었으나 인화문(仁和門) 밖에는 전혀 인적이 없었다. 그러자 내전(內殿)께서 홀로 시녀(侍女) 10여 인과 함께 인화문까지 걸어 나왔다.
이때 나는 도승지(都承旨)로서 촛불을 잡고 문 밖에서 기다렸다가 앞에서 인도하여 나왔는데, 내전께서 돌아보고 촛불 잡은 사람이 어느 관원이냐고 묻자, 시녀가 도승지 이모(李某)라고 아뢰니, 내전께서 감탄하고 위로하여 타이르면서 충의(忠義)를 면려하였으므로 여기에 언급한 것이다. 『白沙集』
거가(車駕)를 따라 수행한 관료들.
영의정 이산해(李山海)ㆍ좌의정 유성룡(柳成龍)ㆍ우의정 이양원(李陽元)서울에 잔류 ㆍ좌찬성 최황(崔滉)ㆍ우찬성 정탁(鄭琢)ㆍ좌참찬 최흥원(崔興源) 순찰(巡察)로 황해도로 갔음 ㆍ사인 윤승훈(尹承勳) 나머지 사람은 모두 빠졌음 ㆍ이조 판서 이원익(李元翼) 순찰로 평안도로 갔음ㆍ참판 정창연(鄭昌衍)ㆍ참의 이정암(李廷馣)ㆍ정랑 조정(趙挺)ㆍ정랑 유영경(柳永慶) 최흥원(崔興源)의 종사관으로 갔음 ㆍ정랑 정광적(鄭光績) 어사로 강원도에 가서 돌아오지 못하였음 ㆍ좌랑 이호민(李好閔)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갔음 ㆍ좌랑 김시헌(金時獻) 나머지 사람은 빠졌음 ㆍ호조판서 한준(韓準) 참판 이하의 사람은 기록 못했음 ㆍ예조판서 권극지(權克智) 죽은 지 2일이 됨ㆍ참판 박응복(朴應福) 참의 이하는 기록하지 아니하였음 ㆍ좌랑 이경류(李慶流) 상주(尙州)에서 죽었음 ㆍ병조판서 김응남(金應南)ㆍ참판 심충겸(沈忠謙)ㆍ참의 정사위(鄭士偉)ㆍ참지 황섬(黃暹)ㆍ정랑 이홍로(李弘老) 개성에서 뒤처졌음 ㆍ정랑 구성(具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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