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典이 傳하는 文康公 冶川先生의 記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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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이 傳하는 文康公 冶川先生의 記錄.
潘南朴氏 世譜의 世蹟篇에 우리 선대조(先代祖) 文康公 冶川先生 遺事의 첫 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xml:namespace prefix = "o" />
◯ 朴紹 癸丑生 字彦胄 未及第 登己卯春式年壯元 以是免斥 官至司諫 以他事罷 歸田里卒. - 金正國 《己卯黨籍》. -
그런데 이 글의 번역은 경신보(庚申譜)와 임진보(壬辰譜)가 약간 다르다.
경신보(1980년)에 실린 번역문은 이러하다.
◯ 朴紹는 癸丑生으로서 字는 彦胄니 文科에는 아직 及第하지 아니하고 己卯年 봄 式年으로 보이는 司馬試에 壯元이 되었기 때문에 排斥은 免하고 官은 司諫까지 이르렀으나 다른 事件으로써 退官하여 故鄕으로 되돌아와서 卒하였다. - (金正國의 己卯黨籍에서 出함). -
그러면 임진보(2012)의 번역은 어떠한가?
◯ 박소(朴紹)는 계축년 생으로 자가 언주(彦胄)니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다가, 기묘년 봄 식년시 문과에 장원으로 합격함으로써 배척되지 않고, 관직이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다른 일로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났다. - 김정국(金正國)의 《기묘당적(己卯黨籍)》에서 나온 것이다. -
그런데 경신보의 번역문에서는 본문에서는 보이지 않는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하고 사마시(司馬試)에서 장원이 되었다고 하는 구절(句節)이 번역되어 있다. 그러면 왜 이러한 문장의 번역되어 있을까?
아마 그렇게 미루어 짐작을 하고 번역을 한 것 같은데, 그 이유는 앞에 나오는 미 급제(未及第)라는 문구(文句)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무엇인가 미진(未盡)함을 금할 수 없었다.
그 원인은 김정국이 기록한 원문을 살펴보면 확연(確然)이 나타나는데《사재집(思齋集)》에 있는「己卯黨籍」에는 擧 賢良科.라는 문구가 未 及第 라는 구절의 앞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思齋集》에 있는「기묘당적」의 기록이다.
◯ 朴紹。癸丑生。字彥胄。擧賢良科。未及第。登己卯春式年壯元。以是免斥。官至司諫。後以他事。罷歸田里。卒。
《己卯黨籍》
즉《사재집》에 있는 원문(原文)과 전사(轉寫)한 기록에는 중요한 부분을 누락시킴으로써, 번역에 혼돈이 오지 않았나하는 생각인데, 최초에 전사(轉寫)한 분의 실수? 가 아쉽다.
위의 원문을 번역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 박소는 계축생으로 자는 언주이다. 현량과에 천거되었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는데, 기묘년 봄 식년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림으로 부터)배척은 면하였다. 관직은 사간에 이르렀는데 후에 다른 일로 파직이 되어 전리로 돌아가서 졸하였다.
사실 김사재(金思齋)는 야천공과는 당대(當代)를 함께 살아간 인물이면서 또한 교유가 있었고, 그 시대의 석학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의 기록은 천금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이 기록은 후대의 문인학자들에게는 하나의 저본(底本)이 되어 여러 기록에 전사(轉寫)되어 있는데, 우리 반남박씨 세적편도 그 중의 하나이다.
김 사재(金思齋) 기록한《기묘당적》은 그 내용이 간략하지만, 후대(後代)의 학자들은 이글을 저본(底本)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 저본은 옮겨져 필사(筆寫)될 때마다 약간씩의 탈 보충(脫補充이 보이는 것은 시대 상황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라고 이해는 하지만, 한 글자를 넣고 빠트리는데 따라 한 사람의 역사적 평가가 달리 나타날 때에는, 거듭하여 살피고 살펴서 한 글자라도 탈 오자(脫 誤字)라도 없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알게 한다.
안로(安璐)의《기묘당적 보유(己卯黨籍補遺)》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朴紹癸丑生。字彥胄。擧賢良科。未及登第。己卯春。式年壯元。以是免斥。官至司諫。後以他事罷。歸田里而卒。
그런데 이 문장은 未及第登己卯春式年壯元이라는 연결문장에서 未及登第己卯春式年壯元으로 及第 가운데로 登字가 들어가 있다.
그러하다면 세 문장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여보자.
①朴紹。癸丑生。字彥胄。擧賢良科。未及第。登己卯春式年壯元。
以是免斥。官至司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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