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자수
  • 오늘1,008
  • 어제801
  • 최대1,363
  • 전체 308,042

자유게시판

목릉 의인왕후 박씨<능묘이야기 중에서>

페이지 정보

no_profile 한가람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04-27 17:14 조회3,553회 댓글0건

본문

ec9d98ec9db8ec9995ed9b841691.jpg 목목릉, 선조와 의인왕후 박씨 <?xml: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xml:namespace prefix = "w"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word" /><능묘이야기>

2009.07.18. 10:48

http://blog.naver.com/singleway/40076260901             아래 글은 다음에서 갖어온 글입닌다.

 


 선조의 正妃인 의인왕후 박씨는 정유재란이 끝난지 얼마 안된 선조 33(1600)46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숨을 거둔다의인왕후 박씨는 명종 10(1555)에 탄생했는데 명종 仁順王后 沈氏 집안과 의인왕후 집안이 친밀했던 관계로 1569(선조 2)에 선조의 왕비로 책봉이 되었다 한다책봉당시 선조의 나이는 18세고 그녀의 나이는 15세였다. 18세면 조선시대 풍속상 상당히 늦은 결혼으로 선조는 완전 노총각이었다. 明宗妃 인순왕후가 선조의 결혼을 미룬 이유는 당시 선조의 母親喪 2년과 明宗3國喪 기간이 겹쳤기 때문이다. 인순왕후는 선조가 후궁을 두는 것조차 꺼려했다고 전해지는데 나중에 후사문제로 시끄러울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선조는 이미 소주방 나인(후에 공빈 김씨) 접촉을 하고 있었다 한다. 이를 눈치 챈 인순왕후는 서둘러 소주방 나인에게 昭容이란 職牒을 내려 適法化시켜준다. 선조는 의인왕후와 결혼 후에도 공빈 김씨를 총애하여 어린 신부는 허구 헌날 빈방을 지키는 날이 많았다 한다. 공빈 김씨는 1574년과 1575年年生으로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았다


 

 의인왕후 박씨는 성품이 부드럽고 온화했으며 검소하여 재물욕심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미모 또한 일품이라 누가 봐도 단번에 뛰어난 미인임을 알아보았다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 가장 안타까운 수치는 바로 아기를 못낳는 石女였다는 사실이었다. 1574년 궐내 최고 어른인 明宗妃 仁順王后 沈大妃는 그런 의인왕후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선조의 총애를 받던 공빈 김씨가 죽은 후 선조는 인빈 김씨에게 사랑의 발길을 옮기자 의인왕후 박씨는 선조에 대한 사랑을 체념하며 공빈 김씨의 자식인 임해군과 광해군 그리고 후궁들의 자식들에게 온갖 정성을 쏟는다. 또한 후궁들에게도 편하게 잘 대해줘 '살아있는 관음보살'이란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의인왕후 박씨의 심정이야 오죽했으랴 오직 그 길만이 자신의 역할이요, 남편에 대한 내조인 것을... 자기 남자가 다른 계집과 바람을 피거나 남의 씨를 보면 돌부처도 돌아앉는다고 했다의인왕후 박씨의 그 애끓는 마음이야 누가 알아주고 누가 보상하리오.

 


 의인왕후 박씨가 內殿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후궁들이 자신들의 자식을 세자로 세우려 설칠 때 말 한마디 못하고 자신의 신세만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나 동인 영수 이산해가 선조의 의중을 파악하곤 仁嬪 金氏와 연합해 신성군을 세자로 밀자, 의인왕후 박씨는 서인인 송강 정철과 연계하여 적극적으로 광해군을 세자로 밀었다 한다아마 남은 불꽃을 광해군에 대한 사랑으로 충당하였나 보다. 불여우라 불릴 정도로 지혜가 있는 인빈 김씨는 의인왕후가 공빈 김씨의 자식들을 총애한다는 사실을 알곤 의인왕후의 환심을 사기위해 엄청나게 노력을 하지만 남편의 사랑을 앗아간 여인에게 특별한 을 주진 않은 듯 하다.


 

 여러 후궁들이 있었지만 선조의 사랑은 늘 인빈 김씨에게 꽂혀 있었다임진왜란이 터지자 도망치듯 한양도성을 떠난 선조는 평양성에서 의주로 피난을 떠나며 의인왕후 대신 인빈 김씨를 데리고 떠난다. 의인왕후는 선조와 떨어져 홀로 평안도 강계로 피난을 가게 되니 인빈 김씨와 자신의 처지가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되었다. 하긴 어느 남자가 입안 혀처럼 구는 여잘 싫어하리오, 도외시 당한 의인왕후도 문제는 있겠다 싶다. 아무튼 도망치듯 평양성을 벗어나는 선조의 御駕에 백성들이 돌을 던지며 "인빈과 김공량(인빈 김씨의 친오빠)을 끼고 돌더니 왜 김공량에게는 왜적을 막으라고 보내질 않느냐"고 비난을 퍼부었다고 전한다존귀한 몸에서 나락으로 추락한 선조와 함께 인빈 김씨는 백성들 원망의 표적이 되었다. 1593(선조 26) 한양도성이 왜병으로부터 수복되자 선조는 인빈 김씨만을 데리고 한양으로 돌아오고 의인왕후 박씨는 그 후 4년간 계속 海州에 머물렀다 전하는데 오히려 궁궐보다 거기가 맘이 더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도 선조는 인빈 김씨와 행동을 같이했고, 의인왕후는 광해군과 함께 행동을 한다의인왕후는 전쟁 중 얻은 병으로 선조 33(1600) 46세를 일기로 승하한다몸의 병보단 선조의 박대와 마음고생으로 화병이 나 죽은지도 모르겠고 15세에 시집와 46세까지 살았으면 조선시대 정상적인 수명을 산 격이니 어느 순간 욕심을 버리고 보살처럼 무념무상으로 살다간지도 모를 일이다. 선조는 의인왕후 박씨의 죽음을 두고 "왕비는 투기하는 마음, 의도적인 행동, 수식하는 말 같은 것은 마음에 두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권하여도 하지 않았으니 대개 天性이 이와 같았다. 인자하고 寬厚하며 성실한 것이 모두 사실로 저 푸른 하늘에 맹세코 한 글자도 과찬하지 않는다" 글을 짓곤 의인왕후 생전의 덕을 칭송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부부사이가 상당히 무덤덤하지 않았나 싶다하긴 사랑은 휠이 꽂혀야 되는 것이지 얼굴만 예쁘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의인왕후 능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푹신푹신한 양탄자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단 그 놈에 날벌레만 없다면 비야 감수를 하고 밟는 촉감을 느끼며 충분히 즐길 수가 있었을 텐데 아쉽다봉분엔 병풍석은 없고 난간석만 설치되어 간소화 된 느낌을 받았다. 아마 당시엔 석공도 나라 재정도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의인왕후는 내게 세상을 참으로 허전하게 산 여인 혹은 無慾으로 산 여인으로 기억될 듯 하다. 광해군이 세자시절 많은 의지를 했다고 하는데 즉위 후 제사는 잘 올렸는지 모르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맨위로